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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요불망(久要不忘)

소요유 : 2020. 10. 1. 15:58


금년은 예년에 비해 배증(倍增)한 블루베리의 수확에 따른 가외의 노역(勞役)이 따랐고,

이어 긴 장마 때문에 밭일이 늘어져, 이제야 얼추 밭 정리가 끝났다.

예서 저리로 옮겨 다니는 발걸음이 사뭇 늘어졌다.

아, 나도 늙어가고 있음이다. 


예전엔 흥이 일어 열심이었던 일도

이젠 막상 벌여놓고 보면 힘에 부치기 일쑤다.

하여 그 앞에 멈춰 숨을 헐떡이고 있다.


무상(無常)

모든 존재는 이 무상성에 함몰되어 있다.

기진(氣盡)

기가 다하고 있음이니,

맥진(脈盡)이라, 

혈맥이 또한 무상에 노출되고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어떤 철학자는 말한다.

‘인간은 죽는다.

그런즉,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에 대처하며 죽음을 맞이하여야 한다.’


그럴싸한 말인가?

하지만, 직시하든 아니든, 인간은 죽고 만다.

자칫 저 철학자의 말은 죽음이후를 기대하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의심이 든다.

부처는 다만 현실을 정시(正視)하라 하였을 뿐이다.

죽음이후의 세상이 있다한들,

역시나 무상성을 빗겨갈 수 없다.

천당으로 간다한들,

무상한 것이 존재의 실상일진대,

그 다음 역시 무상 밖으로 넘어가진 못한다.


부처는 결코 사후세계에 대하여 답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신비주의도 아니오,

물음에 대한 회피도 아니다.

죽음 이후 세계가 있다 없다 하는 물음 자체가 난센스다.


왜냐, 죽음이란 유무가 아니라, 그 경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면도칼처럼 얇디얇은 그 경계일 뿐이다.

그 밖에 대하여, 우리는 잔나비 뛰는 가슴으로 억측만 일삼을 뿐이다.


따라서 있다 또는 없다라는 논의는,

희론(戱論)에 불과하다.


불교는 무상을 무상으로 직시할 뿐이다.

백골이 될 뿐이라는 蓮如의 탄식처럼,

생의 한가운데 서서 지그시 무상을 관조할 뿐이다.

솔직하고, 의연한 이런 자세는,

오로지 불교만이 가진 훌륭함이다.

아아, 부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それゆえ、朝には紅いの血気盛んな顔色であって

も、夕には白骨となる身であります。今にも無常の風が吹いたならば、二つの眼はたちまちに

閉じ、一つの息は永遠に途絶えてしまいます。紅顔もはかなく変り、桃李のような美しいすがた

も失われてしまうのです。そのようなときには、家族親族が集まって歎き悲しんでもまったく何

の甲斐もありません。そのままにもしておかれないと、野辺に送り火葬して、夜半の煙となって

しまえば、ただ白骨が残るばかりです。あわれといってもなお十分ではありません。人間のは

かないことは、老少定まりのないこの世界のならいです。ですから、どの人もはやく後生の一大

事をこころにとどめ、阿弥陀仏を深くおたのみ申し上げて、念仏するのがよいでしょう。あなか

しこ、あなかしこ。


그러므로 아침에 붉은 혈기 왕성한 피부이며

또한 저녁에는 백골이 되는 몸입니다. 

당장 무상의 바람이 분다면, 

두 눈은 순식간에 닫히고 하나의 숨결은 영원히 끊어지고 맙니다. 

紅顔도 덧없이 바뀌고 桃李 같은 아름다운 모습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가족 친족이 모여 한탄하고 슬퍼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대로도 두지 않은 경우, 野辺에 보내 화장하여 한밤중의 연기가 되어버리면

그냥 백골이 남을 뿐입니다. 

불쌍해도 또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덧없음은 노소 정해진 것 없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빨리 제발 後生의 일대사를 마음에 두고

아미타불을 깊게 부탁하고 말씀 염불하는 것이 좋습니다.

(蓮如 白骨の御文) 


※ 일어에 익숙치 않아 부분 번역기 도움 받음.


그래, 요즘 글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 하여, 글 재료가 다 쇠한 것은 아닌 것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의 단편은 여전히 쉼이 없다.

다만, 글로 기록하기엔 내가 좀 지쳤는가 보다.


하여, 그간 떠오른 생각 하나를 모처럼 추려 적어두고 만다.


蓋朋友之道,有義則合,無義則離。善則久要不忘平生之言,惡則忠告善誨之,否則止,無自辱焉。

(蔡中郎集 正交論)


“벗을 짓는 일은 의가 있으면 합하고, 의가 없으면 결별한다.

선하면, 평생의 말(약속)을 잊지 않으며,

악하면, 충고하여 바로 가르쳐 이끈다. 

그렇지 않으면 그치고, 스스로 욕되게 할 바 없다.”


久要不忘平生之言란 말은 본래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마침 이에 대하여는 앞선 글에서 살짝 다룬 적이 있다.

(※ 참고 글 : ☞ 인격)


채옹(蔡邕)의 정교론은,

사람 사귀는 일에 대해 짧지만, 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사람 사귐에 있어,

의로움을 돈독히 하여 바름을 추구하였다.


사람이 부귀해지면 추종자가 구름 떼처럼 모이고,

가난해지면 흩어져 떠나가고 만다.

따라서 오는 모습을 보면 떠날 때를 알 수 있다.

권력 마찬가지다.

세력을 잡으면, 밑이라도 핥을 듯, 다투듯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권병(權柄)을 잃으면 헌신짝 버리듯 바삐 돌아서고들 만다.

其義敦以正,其誓信以固。

그러함이니 예로부터, 사람의 사귐은,

매사 바르게 하여 의를 돈독히 하며,

믿음의 서약을 바윗돌처럼 굳게 한다.


내가 시골 땅에 인연이 닿자,

여기 사람들을 하 많이도 만났다.

그 중 흙일 하는 소위 노가다들을 적지 아니 접하였는데,

약속을 밥 먹듯 저버리고, 

거짓말을 베틀에 북 드나들 듯 바삐 뒤집어 늘어놓곤 하였다.

인간 차별이라 나무라도 할 말은 하고 말 수 밖에 없다.

나는 정말로 이들의 천박함, 그 인격 내용을 염오(厭惡)하지 않을 수 없다.


오죽 하였으면,

내가 집사람에게, 저들과는 평생 인간적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리 선언을 하였을까나?

내 유언인줄 알아라 이리 말하였다.


久要不忘平生之言


아무리 오래된 말일지라도,

약속을 잊지 않는다 하였다.

이는 벗을 사귀는 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신의를 지켜 제 말의 무게를 엄히 느껴야 한다.


여기 농장에 있다 보면 별별 사람들이 다 찾아온다.

하지만,

속수지례(束脩之禮)라,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갖추고 찾아온 이는 거의 없다.


내가 처음 농사를 짓겠다 나섰을 때,

불원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전국 투어에 나섰다.

처음 찾아가 뵙는 이마다, 속수지례를 다하지 않은 적이 없다.

도대체 남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자리,

얼굴만 드밀면 남우세스럽고 부끄럽지 않은가 말이다.

상대의 귀한 시간을 축내고,

축적된 경험과 기술을 구하는데,

어찌 염치를 차리지 않을 수 있겠음인가?


自行束脩以上,吾未嘗無誨焉。

(述而)


“(공자가 말하길)

속수 이상의 예를 갖추고 찾아온 자를,

내 아직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


여기 속수는 마른 육포 묶음이라 할 수 있는데,

스승을 처음 만날 때 가지고 가는 조그마한 예물을 의미한다.


무엇이 되었든,

배움을 청하는 마당인즉,

이리 예를 차리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 하겠다.


하지만, 

처음 배우려는 이나,

찾아온 답답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성의를 다하여, 

묻는 바에 응하였다.


어느 날,

흔치 않은 일이겠거니와,

한 사람이 속수 들고 찾아왔다.

흔치 않은 일이다.

이제, 사람이 찾아왔는가 싶었다.


하였던 것인데,

면식을 트고, 몇 차의 거래 후,

배움을 얼추 챙겼다 싶었는지,

그 동안의 약속을 어기고,

소식 부절이다.


아아,

그러함이니,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는 고인(古人)의 말씀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孟子曰:「愛人不親反其仁,治人不治反其智,禮人不答反其敬。行有不得者,皆反求諸己,其身正而天下歸之。

(孟子 離婁)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을 아끼는데도, 친해지지 않으면, 

자신의 어짐이 부족한가 반성하고,

사람을 다스리는데, 다스려지지 않으면,

자신의 지혜가 부족하지 않은가 반성하며,

예로써 대하는데, 답례가 없으면,

자신의 공경함이 부족한가 반성할 일이다.


행함에 얻음이 없으면,

모두 다 돌이켜 자신에게 원인을 찾을 일이다.

자기 몸이 바르다면 온 천하가 귀순해 올 것이다.”


이렇듯,

맹자는 그 잘못을 자신에게 구하라 이르시고 계시다.

그러함이니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헌데, 이루(離婁)편은 사뭇 재미가 있어,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맹자는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때로는 친근한 악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올 김용옥도 어떤 때 보면,

짓궂은 꼬마 악동처럼 보여 귀엽다.

사람에 따라 호오(好惡)에 매일 수 있지만,

이런 감정상의 기우러짐을 넘어,

이들의 천진난만(天眞爛漫)함을 나는 그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순수한 감정과 배움에 대한 열정이 존경스럽다.


君子必自反也:我必不忠。自反而忠矣,其橫逆由是也,君子曰:『此亦妄人也已矣。如此則與禽獸奚擇哉?於禽獸又何難焉?』是故君子有終身之憂,無一朝之患也。


군자는 이리 자신을 먼저 반성한다.

만약 그리 반성하였음에도, 상대가 여전히 무례하다면,

거푸 자신을 반성한다 하였다.

그러함인데도 다시 또 상대가 무례하다면,

금수로 취급하며 상종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리 삼단의 형식을 통해,

그는 사람을 대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은근히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묵직한 가르침이 가슴에 와 닿는다.


如此則與禽獸奚擇哉?於禽獸又何難焉?


금수와 다름이 없을진대, 금수를 비난할 일이 있으랴?


是故君子有終身之憂,無一朝之患也。


그러므로 군자는 종신의 근심은 있을지언정,

하루아침의 근심은 없다.


如有一朝之患,則君子不患矣。


하루아침에 우환이 생기더라도,

군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아,

저 의연함이라니.

어찌 맹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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