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결(理)

소요유 : 2008. 4. 20. 14:03


자리에서 눈을 뜨니 불현듯 理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주마등과 같이 열차(列次)지어 理라는 글자를 중심으로 여러 상념들이 지나간다.

오늘 마침 한가하니,
그날 아침 상념들의 옷자락을 따라가던 마음결의 흔적을 기록해두려 한다.
우선 글자의 뜻을 풀자면,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중심으로 시작하는 것이 실수가 적으리라.
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내겐 그리 마땅스럽지 않다.
전공자도 아닌 그저 바람결에 소요유하는 도락가(道樂家)인 주제인지라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떠나 마음 가는대로 설(說)을 게워내는 자유로움을 한껏 즐기고 싶었던 게다.

그런데, 문제는 나 홀로 그리 즐기다 행여 그릇되었한들 대수러울 것이 하나도 없으련만,
혹여 다른 사람이 내 글을 읽고 잘못된 길에 든다면 이 또한 무책임한 노릇이 되겠다.
하여, 구름처럼 떠돌던 그날 아침녁의 상념들을 제 멋대로 소개하되,
시비장단(是非長短)을 가리며, 권위에 기댈 분들을 위해 설문해자 내용을 먼저 끌어 달아본다.


[說文] 理, 治玉也, 从王里聲.
[설문]  理는 옥을 다듬는 것이다. 王(玉)의 뜻과 里{리}의 소리를 따른다.(형성자라는 소리로 보면 된다.)
[段注] 理, 爲剖析也, 玉雖至堅, 而治之得其䚡(角+思)理, 以成器不難, 謂之理.
[단옥재 주] 理는 자르고 쪼개는 것이다.
玉이 매우 단단하지만, 그것을 다스려 그 심지의 다듬음을 얻어내서 그릇을 이루는 것이 어렵지 않으니,
이를 가리켜 理라고 한다.

설문해자의 풀이를 이리 앞세워두되,
이제부터 나는 이에 구애받지 않고 나름대로 한 설(說)을 풀어내고자 한다.

나는 앞에서 文이 곧 紋인즉 이를 ‘꾸밈’이니 또는 ‘무늬’라 풀이하며 몇자 피력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理를 순수 우리 말로 풀이 하자면 ‘결’에 해당하니 文과 제법 가깝지 않은가 말이다.
문득 떠오른 이런 생각 때문에 한동안 이리저리 글자들을 손 안에 든 구슬 굴리듯 가지고 놀았다.
(※ 참고 글 : ☞ 2008/03/04 - [소요유/묵은 글] - 무늬, reality, idea

‘나무 무늬결’이라고 할 때,
우리는 무늬와 결을 함께 붙여 그 뜻을 한결 굳건히 한다.
하지만, 이 양자는 차이가 있으니 구별해둘 필요가 있다.
무늬와 결은 둘 다 그 조형성 때문에 대하는 이의 미감(美感)을 자극한다.
하지만 결은 무늬에 비해 조형물의 규칙성이 더 뚜렷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무늬라 하면 규칙적인 패턴이 아닌 경우라도 그리 부르지만,
결은 조금일지언정 무엇인가 규칙적 내지는 정형적인 모습을 가질 때라야 이리 일컬음에 한결 어울린다.
여러 이유중에 하나지만, 바로 이 ‘규칙성 내지는 정형성’ 때문이라도
‘무늬’와는 다르게 ‘理’는 단순한 문양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나중엔 이치, 도리, 원리 등 궁극적인 형이상(形而上)의 세계를 지칭하는 쓰임으로 진화한다.

또한 무늬는 남의 형상을 빌어 차용한 경우에 그 말을 사용할 수 있지만,
결은 남의 것을 빌지 않은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인 경우라야 그리 지칭할 수 있다.
예하건데,
천에다 꽃문양을 새겨 넣을 경우 ‘꽃무늬’라고 부르는 것은,
이는 곧 꽃 모양을 본떴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꽃 자체가 그려내고 있는 조형상을 보고
우리는 ‘꽃무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현실에선 쓰지 않는 말이지만 이 경우는 ‘꽃결’이라는 말이 어떠할까나 ?
‘물결’이라고 할 때는 거부감이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나는 ‘물결’이든 ‘꽃결’이든 이 양자간 ‘결’을 차별하고 싶지 않다.

(※ 잠깐 생각난 김에 말하거니와, ‘꿈결’에서의 ‘결’은 ‘겨를’의 약자이니,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理=결’과는 관련성이 멀다.)

켜낸 나무 단면의 형상을 보고 ‘나무결’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
이를 두고 ‘나무무늬’라고 할 수는 없음이다.
우리가 ‘나무무늬’라고 부를 때는, 가령 파티클보드 위에 무늬목을 붙여 나무결을 살려내었을 때,
이를 칭하길 ‘나무무늬’ 보드라고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즉, 가짜나무인 보드가 나무결 문양을 빌려와 흉내를 내었을 뿐이니,
그게 진짜 나무가 아님을 ‘나무무늬’라는 말에서 바로 뜻을 길어 올릴 수 있다.

한편, 나무 고유의 아름다운 결을 보고 ‘나무결’이라고 해야 하는 것을,
‘나무무늬’라고 한다면, 그 나무가 제것을 갖추고도,
무심한 사람들에 의해 공연히 남의 옷을 빌어 걸친 형국이 되고 마니,
실로 진짜 나무에게 미안한 노릇이다.
앞으로는 ‘나무결’을 행여 ‘나무무늬’라고 부르며,
나무에게 예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나무라한들 제 행색과 어긋나게 대하면, 섭섭하지 않으리오.

이리 볼 때, 무늬는 제것 아닌 남의 형상을 빌어온 것임이 명백해진다.
물론 현실의 세계에선 이 둘을 엄격히 가려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탓한들 이 부박스런 세상에 그 누가 대수럽게 생각할까마는,
나는 지금 그 차이만이라도 이리 구별해두고자 한다.

천문(天文)이란 하늘의 문양이요,
천상(天象)은 하늘을 추상화하여 본뜬 것이니,
가사 주역을 든다면 건위천쯤이 이에 해당될런가 ?

그런데 천리(天理)란 무엇인가 ?
보통 ‘하늘의 이치’로 새길 수 있지만, 이는 내 식으로 풀이하자면 ‘하늘결’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늘도 ‘나무결’, ‘꽃결’, ‘물결’처럼 제 고유의 본성을 지니고 계시니,
이것이 곧 천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조옥(粗玉)은 겉으로 보기엔 그냥 돌덩이에 불과하다.
설문해자의 풀이대로 이 원광석을 ‘爲剖析也’ 가르고 쪼개 다듬으면 비로소 옥이 된다.
옥장(玉匠)이야말로 황금치환의 마이더스 손이다.
돌덩이가 옥으로 변화는 연금술,
물체의 ‘결’을 보면 그 이면에 숨은 사물의 이치 ‘理’를 대하듯 마음을 가다듬을사.

나는 격물치지(格物致知)란 것도 옥장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주자식으로 풀이하자면
‘사물에 이르러 그 이치를 궁구하고, 나의 앎을 궁극까지 미루어 궁리하는 하는 것’이니,
돌덩이 속에 숨겨진 옥의 숨결,
그 옥리(玉理), 즉 ‘옥결’을 더듬어 궁구하는 옥장의 마음과 다를 바 무엇이 있으리리.

절차탁마(切磋琢磨)
끊고(자르고), 갈고, 쪼개고, (갈아)닦고 ...
군자 역시 옥처럼 마음결, 숨결을 닦아 아름다이 빛난다.

천문관상대(天文觀象臺)
여기를 보면 文이며 象이란 글자는 들어가 있어도 ‘理’字는 들어가 있지 않다.
하늘의 무늬를 관찰하는 것이 직접적인 소임임을 이로서 바로 확인할 수 있음이다.

즉 천문(天文), 천상(天象)을 연구하는 것이 천문관상대이지,
천리(天理)를 탐구하는 곳이 아닌 게다.
하기사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면 뜻을 거둘 수 있듯이,
천문(天文), 관상(觀象)도 사무치면 천리(天理)를 꿰뚫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성리학에서 理를 形而上者라 하고, 氣를 形而下者라 하는 까닭이 이에 있지 않을까 ?
즉 무늬와 같이 실증적인 인식을 넘어, 理는 이리 추상화, 관념화 되어간다.
 
심리(心理)는 마음결이니,
오욕칠정은 물론이요, 본성 즉 본래의 성품이 물결치며 빚어내는 마음밭의 이치를 말한다.

숨결이란 무엇인가 ?
들숨, 날숨 그 떨림의 가락이다.
숨결이란 우리 말은 呼吸, 氣息이라는 한자말 보다 한결 그윽하고 아름답다. 
일자(一者) 그 떨림이 영원을 가로질러 삿대 저어나가 그대 마음의 모래톱에 다다라,
촉촉이 그대의 영혼을 적신다.
들리는가 ?
듣는가 ?
문향(聞香) - 향을 듣고,
관음(觀音) - 소리를 보는
이 crossover하는 오감의 경지.
순결한 숨결은 귀가 코가 되고, 눈이 귀가 될 때라야 마음으로 만질(觸) 수 있다.

요리(料理)
음식을 만드는 것을 이른다.
하지만, 나는 이리도 풀고 싶다.
料란 게 헤아리다, 되질 하다란 뜻이다.
하니 사물의 결흐름, 이치를 헤아리는 것이라 풀어본다.
음식을 상대로 한다면 각 식재료의 미향(味香)에 좇아 조화롭게 아우러지게 하는 것일 터,
한즉 음식 요리, 역시 내 풀이에 의지한다면 더욱 간간이 간이 맞지 않는가 ?

목리(木理)는 또한 무엇인가 ?
춘하추동을 지나며 그려내는 나무의 딱딱하고 무른 성질이 그려내는 형상이니,
목수는 목리를 잘 살펴 톱으로 켜고, 자귀로 깎아내며, 대패로 다듬는다.

석리(石理) 또한 목리와 크게 다를 바 없으니,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배운 바,
화강암으로 치면 석영, 장석, 운모의 배합율에 따라 결이 지니,
석공(石工)은 이를 잘 가려 정과 망치로 석수(石手)질을 한다.

앞의 글에서(☞ 2008/02/15 - [소요유/묵은 글] - 문.무(文.武)의 진실과 그 화해를 위하여)
몇 번 거론한 화씨지벽(和氏之璧)의 고사 역시,
조옥(粗玉)에 숨은 옥리(玉理)를 보지 못하고,
초나라 이대에 걸쳐서도 이를 한낱 돌덩이로 취급하였으니,
애꿎은 화씨(和氏) 다리만 잘리고, 피눈물만 흘렸음이라.

수리(水理) 역시 단순한 수파(水波)나 파랑(波浪)보다 더욱 뜻이 그윽하니,
물의 본래 성품, 이치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말로 하자면 역시 ‘물결’이 된다.
잔잔한 호숫가에 바람이 인다.
이에 응하여 물 역시 함께 파랑을 일으킨다.
물결은 이 때라야, 자신의 감정을 우리들에게 살짝 보인다.
대양(大洋)에 비바람과 함께 일렁이는 파도 역시, 포효하며, 울부짖는다.

내가 주식을 한창 연구할 때 다.
Harvey A. Krow, 『Stock Market Behavior』, Random House, 1969
아마도 이 책이었을 것이다.
거기 파도를 보면 해안가 파도를 보면 큰 파도가 세 번째마다 밀려온다고 하였던가 ?
하여 그 출처를 찾아 자세히 검토해보고자 외국서적부처에 주문을 낸 적이 있다.
당시엔 아마존같은 것도 없어 서점에 별도로 교섭을 하여야 가능했다.
받아보니 수필이더니만, 달랑 몇줄에 불과하여 실망한 적이 있다.
그해 여름에 해안가에 앉아 나도 따라 파도 갯수를 헤아린 적이 있다.
내 딴에는 그리 파도를 연구하면,
주식파동의 묘리를 훔쳐볼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당시에 전공과도 별 상관없는 수역학(水力學) 책도 읽어보고,
파동이란 글자만 띄어도 샅샅이 살피던 시절이었다.
묵은 파동학 책도 다시 정독해보고 말이다.
아, 이 정열이라니,
무모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지난 시절 나의 ‘붉음’을 대견해하리라.
그런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당시 수리(水理)가 아닌 수문(水文)에만 집착하였음이며,
수리(水利)만 도모하고자 홀로 욕심 사납게 분주하였지 않은가 하는 자괴감을 가진다.

어제, 모시고 듣던 어느 농부님의 말씀.
“피트모스(peat moss) 보습 효과의 역리(逆理)”
- 보습하고자 피트모스를 사용하지만,
이게 가물 때는 역으로 식물에게서 습기를 외려 빼앗아 간다는 말씀이다. -
그 귀한 말씀 앞에 나는 지난 날 나의 ‘파도 숫자 헤아리기’가 문득 오버랩 되며,
다시금 그 기억을 상기해 보는 것이다.
하기사 요즘도 폭포 앞에 서서 가끔 다단(cascading) 밑으로 이어지는 물결을 좇아가 보기는 한다.
그 때에 비해서는 한결 담담해진 마음으로 나는 수리(水理)내지는 사리(事理)를 헤아려,
격물치지하며 부족한 나를 수양(修養)한다.

현실적으로는 ‘물결’이 물을 대하고 쓰일 때는 그저 단순한 외양적 표상 이상 쓰이질 않으나,
추상화 된 쓰임에 이르러서는 정신의 지향성내지는 추구하는 바 동적인 의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컨대, ‘도도한 개혁의 물결’이라든가, ‘유행의 물결’, ‘세계화의 물결’ 등등으로 추상화의 길을 걷게 된다.
‘결’ 본뜻인즉 理를 추구하였으면 좋으련만,
보듯이 뜻이 아니라 利를 탐하며 동원하는 쓰임이 사뭇 더하다.

그런데 수리공학(水利工學)이라 할 때는 水利라고 쓰니,
이는 水理에 비해서는 물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다. 
水利인즉, 물(水)을 그저 단순한 물적객체로 대하며 인간을 위한 요익(饒益)을
꾀하고자 하는 수단, 방편적인 인식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수리학(水理學, 水力學, hydraulics)이라야 비로소 순수한 물의 본성을 연구하려는 의지를 읽게 된다.

물리학(物理學)에서는 수리(水利)의 예에서처럼 물리(物利)라는 쓰임이 애초부터 없다.
이론물리학(理論物理學)이 아닌 응용물리학(應用物理學)일지라도
수리공학(水利工學)처럼 응용물리학(應用物利學)이라 하지 않는다.
이런 쓰임 말로 미루어 본시 물리학이 점잖은 학문임을 짐작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탁일까 ?

나름대로 짐작하건데 수리(水利)라는 말의 쓰임이
물리(物利)처럼 부자연스럽지 않고 널리 쓰이게 된 까닭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즉, 고대부터 치산치수는 삶의 중요한 과업(課業)이자 역사(役事)이었으니,
이는 곧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는 禹王의 9년 치수의 예에서 보듯이 물이란 다스리면,
인간에게 이로우나, 그렇지 못하면 홍수가 나서 모두 휩쓸려 가고 만다.
하니 물은 가장 중요한 이해(利害)의 대상으로 인간에게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오늘 이 땅에선,
아직도 수리(水利)를 앞장 세워 온 국토를 유린하고자 욕심이 등천하고 있다.
우왕 시절이야, 장강의 범람을 막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위협을 당했다.
당시엔 수방(水防)을 통해 수리(水利)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긴박한 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 천하가 모리(謀利)의 대상일 뿐이다.
자연이 파괴되든, 인간의 심성이 이지러지든 그저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차고 넘친다.
참으로 경박스런 세태다.

수리(水利)인즉 우왕의 홍익(弘益)이 아니라,
그저 온 나라 사람이 사리(私利) 도모하기에 급급, 사리(邪理)가 횡행하고 있음이다.
시랑(豺狼, 승냥이와 이리)인들 차마 이리 사나우랴.
사갈(蛇蝎, 뱀과 전갈)이란들 저리 독할손가 ?
하기사 시랑, 사갈이 본디 제 성품이 어찌 흉하리요,
이 모두 인간이 지어낸 말에 불과한즉,
정작은 인간의 본성이 그러한 것임이랴.

내가 주말마다 달려가는 전곡, 연천 지경은 지질조건이 불안정하여
지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지역이라고 한다.
거기 한탄강변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이 널려 있다.
이게 화산 활동의 흔적일 터이니, 역시 이 지역은 여늬 지역과는 다르게 예사롭지 않다.
길을 달리 다 보면 ‘주상절리’라하여 잘라놓은 듯한 산록이 그대로 노출되어 보인다.

주상절리(柱狀節理).
이 뜻을 풀이해보자.
柱狀은 즉 기둥 형상이란 뜻이겠고,
節은 마디절이니 바위 돌들이 마디마디 잘라놓은 모양을 잘 짚어내고 있다.
그런데 理란 무엇인가 ?
理를 그저 이치, 까닭 정도로 이해하는 수준이라면,
이 글자가 왜 쓰였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理’란 글자를 ‘결’로 새기면 바로 뜻이 오롯히 드러난다.
‘기둥 모양으로 마디져 잘라진 바위 결’
이리 새기고 보면 단 4자로 그 형상을 썩 잘 표현한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리석(大理石)이란 무엇인가 ?
대리석은 아름다운 문양으로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사랑을 받는다.
나는 광석학적 소견을 낼 처지는 아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풀이를 내놓을 수는 있다.
대리(大理)인즉 理는 理(결)이되 크다라고 즉각 새길 수 있지만,
원래 대(大)란 글자가 ‘크다’라는 뜻 외에도, ‘중요하다’, ‘세력이 강하다’란 뜻을 갖고 있으니,
대리(大理)란 결이 진 암석이되,
그 결이 여늬 것과는 다르게 두드러지게 대단하다, 아름답다라는 의미로
理 앞에 大로 수식하였음이다.
설혹 암석을 대하지 않았어도, 글자만 보고도,
이 암석은 무늬결이 제법 화려하겠구나 이리 짐작해볼 수 있다.
(※ 대리석은 운남 대리국에서 난 것이기에 그리 칭해진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대리국 역시 이 돌과 연관이 있는지는 미처 알지 못하겠다.)

수리(水理), 즉 물의 본성, 이치를 제대로 꿰뚫으면,
이내 수리(水利)를 얻어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리(地理) 역시 재대로 본질을 더듬어낼 수 있으면,
지리(地利)를 얻을 수 있다.

병법에 늘 등장하는 天時, 地利, 人和(천시, 지리, 인화)는
원래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이다.

"하늘의 때는 땅의 이득만 못하고, 땅의 이득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때와 지리적 유리함이 인간의 정신적 화합만 못하다는 말씀이다.

여기 지리(地理)가 아니라 지리(地利)로 기술되고 있다.
이는 외부의 구체적인 조건인 時, 利를 내적조건인 和와 견주고자 하는 의도이기에,
이리 직접적으로 표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화(人和)가 으뜸 가치라한들,
정작은 天時, 地利에 앞서 천리(天理), 지리(地理)에 대한 이해(理解)가 없으면
인리(人理)인들 제대로 밝힐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나의 앞 선 글(☞ 2008/02/29 - [소요유/묵은 글] - 무늬, reality, idea)에서 다룬
“文” -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을 형이하자(形而下者)라면,
지금 나는
“理” - 천리(天理), 지리(地理), 인리(人理)를 형이상자(形而上者)라 삼가 빗대어 보고 있는 바다.

그러하니 문(文)과 리(理)는 표리를 이루는 바,
문리(文理)는 곧 드러내는 바, 뜻이 이치에 닿았음을 나타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 이를 문장의 조리(調理)라든가 이치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문(文)과 리(理)의 조합으로 보고자 한다.)
경우에 맞다, 도리에 합당하다 ... 등등의 말 보다
나는 문리(文理)라는 말이 문향(文香)을 엿뵈이는 한편,
뜻도 보태 안팎을 아우르고 있는 고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전일 서툰 노동으로 심신이 달콤하니 나른하다.
이리 글나부랑이를 죽 멍석에 내널어 해바라기를 시켜놓고,
이불 호청 뜯어내어 빨래 하다 말고,
수다 떨러 앵두나무 우물가로 냅다 달아난 철없는 색시처럼,
나 역시 나는 나대로 주섬주섬 채비 차려 산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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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8. 4. 20. 1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