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인과율에 대한 단상

소요유 : 2008. 3. 14. 17:30


인과율이란 논쟁 유발적인 주제가 앞에 올라와 있군요.
내노라하는 이들이 치고 받았지만, 결론은 없는 주제.

하이젠베르그가 인과율을 부정한 예를 든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불확정성원리가 인과율 부정의 증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한편 고전역학과 같은 결정론적 인과율 긍정을 확정적으로 부담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인과율에 관련된 화두 두가지를 먼저 소개합니다.

종용록, 무문관, 선문염송등에 두루 등장하는
백장야호(百丈野狐)라는 화두입니다.

(무문관편)

백장 회해 선사가 설법할 때마다 한 노인이 와서
늘 대중들 뒤에서 열심히 듣고 있다가 대중이 물러가면 함께 물러가곤 하더니
어느 날은 설법이 끝나 대중이 다 물러갔는데도 그 노인만은 남아 서 있었다.

백장 선사가 이상히 여겨 물었다.

“앞에 있는 자는 어찌된 사람이냐?”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 가섭불 당시에 이 절의 주지였습니다.
그 때 어느 학인이 ‘대수행인은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하고 묻기에
제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이 되었으니 선사께서 한 말씀으로
이 여우의 몸을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는 노인이 물었다.

“대수행인은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백장 선사가 대답하였다.

“인과에 매(昧)하지 않느니라.”

노인이 그 말에 크게 깨달아 인사하며 말하였다.

“제가 이미 벗어버린 여우의 몸이 뒷산에 있을 것입니다.
스님께서 죽은 스님에게 하듯 장례를 치러 주시기 바랍니다.”

백장 선사가 유나를 시켜 ‘식후에 죽은 스님의 장례가 있다’고 대중에게 고하게 하니
‘모두 평안하여 열반당에 한 사람의 병자도 없었는데
어째서 죽은 스님의 장례가 있다고 하는가’ 하고
대중이 수근대었다.
식후 백장 선사가 대중을 데리고 뒷산 바위 밑에 이르러
지팡이로 죽은 여우를 끄집어내어 화장을 하였다.

백장 선사가 저녁에 법당에 나와 앞의 인연을 이야기하였다.
이 때 황벽이 일어나서 말하였다.

“고인(古人)이 잘못 대답하여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이 되었는데
만약 잘못 대답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백장 선사가 말하였다.

“앞으로 가까이 오라. 그대를 위해 가르쳐 주리라.”

황벽은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백장 선사의 뺨을 한 대 후려쳤다.
백장 선사가 박수를 치고 웃으시며 말하였다.

“과연 그렇구나. 오랑캐의 수염은 붉다더니 붉은 수염 오랑캐가 있구나.”

다음은 남전참묘(南泉斬猫)란 공안입니다.

어느 날 동당과 서당간에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놓고 시비가 벌어지자
남전 보원 선사가 고양이 새끼를 치켜들고 말하였다.

“대중들이여, 도득하면(對句가 맞으면) 살리고
도부득하면(對句가 맞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대중 가운데 한 사람도 대꾸가 없자 남전 선사가 드디어 고양이 목을 베어버렸다.
밤 늦게 조주 스님이 외출했다가 돌아오자 남전 선사가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하니
조주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짚신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나갔다.
남전 선사가 말하였다.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를 구했을 것을.......”

(이상의 두 인용문은 본인이 일일이 적기 어려워 인터넷 어디선가에서 취한 것이나,
오래되어 현재 취재처를 잊었습니다. 해량 바랍니다.)

***

백장야호(百丈野狐)의 주제어 不落因果, 不昧因果.
남전참요(南泉斬猫)에서 불살생이란 으뜸 계율을 어긴 남전스님은 인과율에 구속되는가 ?

선은 언어도단, 직지인심의 세계인즉, 각자에게 맡깁니다.
다만 자귀에 얽매이는 한, 공안은 절대 관을 파할 수 없는 것.

***

인과율에 관련된 제 얘기를 한번 해보지요.

인드라망(因陀羅網)이라고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불교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수미산 남쪽 남섬부주에 속합니다.
사실 불교의 우주관은 인도 고유의 종교 힌두교를 차용한 것이 많습니다.
여기서 얘기 할 제석천(帝釋天)은 힌두교의 인드라의 습합(襲合) 결과입니다.
(* 오늘 인드라망을 설명하자면 도리없이 수미산을 얘기하여야겠기에 불교를 듭니다만,
혹 종교를 달리하시는 분이 계시더라도 종교적 편견을 드러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니,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특정 종교의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그냥 인도 문화, 철학 일반이라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실제로도 제가 앞으로 얘기 하려는 내용은 불교 자체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영혼의 땅 인도대륙에서 피어난 저 아득 웅혼(雄渾)한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입니다.)

수미산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고 그곳에는 궁궐 격인 선견성(善見城)이 있습니다.
이곳의 주인(임금)인 제석천(帝釋天)이 그 궁궐에 사십니다.
이 제석천은 사방(四方)에 있는  三十二天과 수미산 중턱에 사는 사천왕을 거느리고
불(佛)과 불법(佛法)을 수호합니다.
인드라망은 본디 이 제석천이 사용하는 무기로서, 수많은 보배 구슬이 그물코마다 달려 있습니다.
이 보배 그물을 흔들면 서로 빛을 발하게 되고 이것으로 아수라 군사를 정벌합니다.

그런데 그 그물 코에 달려 있는 보주(寶珠)의 하나 하나 마다에
각각 다른 낱낱 보주의 영상(影像)을 나타내고,
그 한 보주 안에 나타나는 일체 보주의 영상마다 또 다른  일체 보주의 영상이 나타나서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됩니다.
(* 중중무진(重重無盡) - 거듭 비추길 다 함이 없다. 즉 한없이 되 비춘다란 뜻.)

화엄(경)에서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논하며
이것을 一과 多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였다고 말할 때,
전례로서 들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의 상대성이론내지는 양자역학과 이 인드라망 사이의 상사(相似, analogy)를 들어
불교인들이 자존을 건져 올리기도 합니다만,
불교적 우주관이 온존히 과학을 포용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는 철저히 마음자리를 참구하며 진여(眞如)의 세계를 탐험(explorer)합니다만,
물리 또는 과학이란 철저히 경험의 세계를 가설, 실험을 통해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소승(小乘) 소의(所衣) 경전인 구사론(俱舍論)의 정치(精緻)한 원자론은
희랍의 원자론보다 몇배 더 훌륭하며,
현대 물리학의 보어의 원자구조 못지 않게 지극정밀합니다.
그외 유식(唯識), 화엄(華嚴)등의 세계도 실제 현대 물리학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가설체계로 차용되기 하는 등 충분히 놀랍고도 재미있습니다.
칼융의 무의식 연구도 이에 기(基)하고 있음이니 마냥 경계하는 것도 능사는 아닙니다.

internet에서 url의 앞에 붙여 쓰는 www(world wide web)에 web이 거미집 아닙니까.
그 거미집 실이 교차하는 하나 하나마다 개별 site 내지는
이를 이용하는 사용자가 처(處)하여 있는 셈이니,
이들은 곧 인드라망의 보주(寶珠)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개별 사용자들이 LINK로 중중무진 서로 상하종횡(上下縱橫)으로 연결되어
가상공간(cyber space)이란 소통(疏通)의 장(場, field)을 창출하는 것이지요.

물리학은 (고전)역학, 파동학, 전자기학, 양자역학, 통계역학 등의 카테고리가 있는데,
현대 물리학의 두가지 중요 주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며
통일장 이론을 구축하려 하였지만, 완결하지 못합니다.
결국 양자역학의 전개를 보면서 그도 서서히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양자역학(量子力學)은 플랑크, 슈뢰딩거, 디락 등에 의해서 구축된 이론입니다만,
1927년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하여 확립됩니다.
양자 역학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측정하는 데에는 필연적인 오차가 수반되며,
각 물리량 측정의 불확정성의 곱이 h(플랑크 상수)보다 작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풀어 설명하면 어느 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는 순간, 그 속도를 그 만큼 제대로 알 수 없고,
반대로 입자의 속도를 정확히 알려는 순간, 그 위치를 그 정도만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간이 전자의 움직임을 파악하려고 한다고 합시다.
전자의 움직임을 빛을 통해서 파악하게 되는데,
관찰하는 순간 빛 입자가 전자에 부딪혀 전자의 위치를 교란하게 됩니다.
즉 관찰자의 개입을 수반한 전자의 움직임밖에 확보할 수 없는 게지요.
전자 고유의 움직임은 관찰자가 관찰을 하지 않아야 얻을 수 있는데,
관찰을 하지 않고는 정보를 얻을 수 없는즉
필연적으로 측정에는 측정오차가 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 파악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 세상이 확률적이라기 보다도, 양자역학적으로 확률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지요.
환언하면 양자역학적 진리체계의 선언이 아니라 현 수준에서의 한계로 보고 싶습니다.
또는 확률적인 것 이외의 수단이 현재로선 없다 이리 새기고 싶습니다.
하지만 양자역학적 세계관은 감탄할 정도로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이런 확률의 세계인즉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물이 100도뿐이 아니라 0도에서도 끓을 수 있는 확률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다만 0도에서 끓을 수 있는 확률이 지극히 적을 뿐인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존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태(可能態)에 놓여 있으나, 현실태(現實態)로 고정될 때,
그 가능태 중 하나로 발현되는 것이지요.

인드라망의 각 보주(寶珠)들은 만상(萬象 또는 萬相)을 다 보지(保持)하나
각자는 개별적인 개성을 갖는 존재인 것이지요.
이 때 만상으로서의 그것이 가능태, 개별적 존재가 현실태로 배대(配對)되는 것입니다.

자 이러니, 그 무엇을 주(主)와 객(客)으로 나누어 본다는 것이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게 하는 원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즉 이런 이분(二分)의 조건하에선 주(主)가 객(客)을 인식할 때,
필연적으로 양자역학적 인식교란이 발생하고 이는 정확한 인식을 근원적으로 차단합니다.
그러니 주(主)와 객(客)이 하나가 되기 전에는 온전한 인식(認識)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심(一心)을 유일의 실재로 보는 대승기신론의 입장과도 맥을 닿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연기론(緣起論)의 묘한 물리학적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인 김춘수는 이리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내가 이름을 부여하기 전까지는 가능태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는 현실태로서 내 앞에 현전하는 실존이 됩니다.
김춘수로 인해 양자역학적 세계가 시로 나투어 그려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이름을 얻어 참 존재가 되는가 ?
양자역학은 가능태와 실현태(현실태)를 분별지어 말한다.
꽃은 이름을 얻어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 때 꽃은 인간에 구속된다.
인간에겐 가치일런지 몰라도 순간 꽃은 곧 육화되어 죽음이란 달갑지 않는 질곡에 갇힌다.
마치 선악과를 먹은 태초인처럼 영원에서 멀어진다.

현실태가 되는 순간 존재는 한계상황에 놓여지게 되는 것.
그 때이후 생.노.병.사 억겁의 윤회 그 잔인한 수레바퀴에 치이게 된다.
그러한즉 무엇이 되려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

어린왕자와 사막의 여우는 이리 대화한다.

"길들여진다는게 어떤거냐고...
여우가 말했어..
그건..
사이가 좋아진다는 뜻이야"

이것은 무엇인가 ?
관계망속에 서로를 묶는다는 것과 다름없다.
외로운 이는 이리 서로의 손발을 꽃팔찌로 묶는다.
힘든 세상 이리 서로 아끼며 걷는 것.
그럼으로 서로
"세상의 단 하나 뿐인...
그런 사람.." 이 된다.
이게 중생의 삶이다.

그대가 사막의 여우라면,
남에게 길들여 지지 마라.

그대가 꽃이라면
꽃 이전의 순수태로서의 꽃이어야 한다.
이름을 구하지 마라.

이를 일러 본성 또는 불교에서는 진면목이라 한다.
누구의 부름을 받는 순간 그대는 에덴으로부터 추방될 것이다.
하니 누구의 call(부름, 소명)을 의욕하지 마라.
(* 이상은 제 예전 글을 부분 인용함.)

이제 이쯤에서 제가 정작 하고자 하는 이야기로 좁혀갑니다.

DNA의 발현체가 현존재로 되는가 ?
DNA를 인(因)으로 하여 과(果)인 생명체가 나온다고 현대생물학에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과 인간의 DNA차이는 주목할 정도로 유사하다고 하지요.

티벳 “사자의 서”에선 중음신(中陰身)의 여행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래전에 읽은 것이라 자세하게 말씀은 못드리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 기억납니다.
즉 망자가 환생하기 전에 중음(中陰) 단계에서 겪는 여러 상황이 7일차에 걸쳐 안내됩니다.
각종 색의 빛이 쏟아 지는데, 이 때 어떤 빛을 좇아 가면 좋은 곳에 태어나고,
아니면 동물 등에 포태되어 축생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식의 얘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무엇입니까 ?
망자는 환생시 사람으로도 동물로도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보지하는데,
그의 선택적 행동에 따라 특정 결과로 갚음을 구현하는 것이지요.
(물론 인연 닿아 "사자의 서"를 먼저 익힌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겠지만)
앞에서 말한 가능태-현실태의 역학구조와 일응 맥이 닿고 있습니다.
一對多, 多對一, 一卽多, 多卽一의 상즉상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실험적인 생각입니다만, 여기서 문득 이런 궁리를 해봅니다.
DNA라는 것도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또는 동물로 태어났기에 그 종의 DNA를 갖는 것이지.
실인즉, 포태단계이전부터 결정된 것이 아니다.
환언하면 결과를 들어 원인을 내삽(內揷-interpolation)하였을 뿐,
그로 미루어 직접 원인을 확증할 근거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어떤 우연이든, 인과율에 따르든, 아니면 자유의지이든 간에
결과를 빚을 process에 진입하는 순간 미망처럼 DNA가 결정화(結晶化)될 뿐,
이 그이전엔 유동적인 가능태의 세계인 것.
원숭이, 개, 닭, 국화꽃, 인간... dartboard에 새겨진 명판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근원적으로 하나인 것.
차별은 이름을 갖는 순간 차꼬처럼 채워지는 것.
그러한즉, 이름을 짓지 마라. 이름을 갖지 마라.
명명(命名)되는 순간 죽음이 가을서리처럼 다가온다.
인과란 이름지어짐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

유명한 석존의 독전(毒箭)의 비유라는 것도
poison dart를 우선 뽑자는 것 아닙니까 ?
어떤 자가 쏘았는지, 어디로부터 날라오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주식투자하시는 분은 다 아실 터이지만,
주식투자에 기술적분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봉도표
(※. 이것을 한국에선 현재 캔들스틱 또는 줄여 캔들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봉도표라고 불렀습니다.
현재 여기 연재중)
에 절입선이라고 있습니다.
음봉에 이어 나타난 양봉이 아래에서 전일 음봉의 몸통 중앙부분 이상을
치고 올라오는 형태를 이르는 것인데,
상승반전 패턴의 전형을 이루지요.
실전에서 절입선의 출현에 임하여 향후 상승반전이 예상된다고 예측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무엇입니까 ?
이제까지의 경험적 결과들,
통계 모집단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외삽(外揷-extrapolation)추정하였을 뿐이지,
미래의 확정적 현실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요.
사정이 이러한데, 절입선을 보고 무조건 내일은 주가가 오른다고 희희낙락한다면,
이런 난센스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

통계학에서 흔히 리그레션을 돌린다고 할 때,
그 결과가 마치 과학적인 진리인 양 주장할 수 있을까요 ?
아무리 통계학적 유의미한 통계치라 하더라도
그것이 곧 여기서 다루는 주제인 인과율의 증거로 삼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통계학적인 효율성은 충분히 현실적인 가치로 평가될 수 있지만,
그것이 진리를 담지할 수는 없겠지요.

인과율 부정의 대표적인 철학자 흄의 극단적(?) 명언
“미래는 과거와 유사하다는 가정은 어떤 종류의 논증으로부터도 기초해 있지 않으며
완전히 습관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안내자는 이성이 아니라 습관이다.”
이처럼 인과율에 있어서의 제일원인(第一原因)은 여전히 이성으로는 파악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인연설을 주장하는 불교입니다만,
선의 세계에서는 깨달음의 인과율을 철두철미하게 부정한다는 사실입니다.
깨달음이 결과로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여기에 오롯히 홀로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과학은 인과율을 부정하면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쉼없이 나아가지만, 인과율의 최고봉 제일원인에 대하여는 무지합니다.
아니 무력하기 때문에 외면하며, 시지프스처럼 외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요 ?

반면 선(禪)은 전체를 뭉쳐 하나를 봅니다.
때문에 그들에겐 원인-결과의 선후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과율에 매일 까닭이 없습니다.
매인 바가 없기에 깨달음도 돌발적으로 옵니다.(頓悟)
물론 하나로 뭉친 것을 나중엔 개별화하여야 합니다.
이게 흔히 말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구극의 경로입니다.

향엄은 돌자갈이 대에 부딪히는 소리에 깨쳤고,
동산은 물 건너다 자기 그림자를 보고 깨쳤다고 합니다만,
이게 깨달음이 방편, 방법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향엄이 돌자갈이 대에 부딪혀서서 깨우쳤다고,
깨달음을 돌자갈이나 대에서 구하고자 똑같이 시도한들 한 소식이라도 얻을 수 있겠습니까 ?
금선탈각(金蟬脫殼)한 후 남긴 빈껍데기 잡고 용쓰며,
몽당 비짜루 들고 도깨비놀음하는 격이지요.

앞의 ooo님 몸글에서 접한 bbb님의 댓글 말씀,

“불확정성의 원리가 가지는 의미는 앞으로 10분후 공의 위치가
'거기'일 확률이 몇 % 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가지 의미의 차이는 인과율과 인과율의 부정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무슨 의미를 지니냐는 물음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이는 모든게 예정되어 있다는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에게는 두가지가 중요한 차이이지만,
그런 신의 섭리라는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하기도 하고,
별로 의미없는 차이이기도 합니다.”

상큼한, 지적하신대로 당연한 그러나 의미있는 말씀을 보고
제 글을 주섬주섬 엮어 볼 생각이 났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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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8. 3. 14. 1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