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0.1%

소요유 : 2008. 11. 22. 18:54


김대중 정권 시절 벤처기업 광풍이 불었었다.
당시 IMF경제신탁 상황을 극복하고자
김대중 정권이 취한 경제 정책 중 가장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카드남발, 벤처기업, 신지식인 제도를 들 수 있다.

동지섣달 철 문고리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경제를 일으켜 세우려는 고육지계(苦肉之計)였으니,
좌고우면(左顧右眄) 가리지 않고 우선은 불씨를 지펴보자는 다급함이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후유증을 초래했다.
신불자, 먹튀, 사기꾼 등의 어두컴컴한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언필칭 ‘언 발에 오줌 누기’ 짝이 나고 말았다.

2004년 당시 신용불량자만 3백80여만 명을 헤아렸다.
가히 이 정도면 한 집 건너마다 식구 중 하나는 신불자란 소리다.
듣건대, 내가 아는 어느 벤처기업인 중 하나는 60억을 대출 받고는
고의 부도를 내고 호주로 튀어 달아났다.
벤처붐을 일으키는데 이런 수준의 허실낭비는
그저 불쏘시개 정도로 보아주어야 할까?

그 뿐인가?
정부는 몇몇 선수들에게 신지식인이라는 완장을 채워 앞세우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술, 지식만이 최고라는 듯 온 국민을 몰아 독려했다.
하지만, 모름지기 기술, 지식이라는 것이
사람 ‘살림살이’중 최고이냐 하는 당연한 의문이 있다.

작금의 미국발 금융혼란도 첨단의 금융지식, 기술로 무장한 이들의
탐욕과 모럴해저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국민의 정부라 칭하는 김대중 정권에서 배태된 신지식인 따위의 선전, 동원술과
지금의 이명박 정권에서 앞장서서 부르짖는 경제지상주의와
그리 큰 차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2000년 벤처붐이 한참 불 때,
당시 김동렬이라는 논객은 ‘새롬’의 다이얼패드 기술에
갖은 예찬을 늘어놓으며 경천동지(驚天動地) 세상을 바꿀 것이라 예언했다.
물론 그만이 아니라 거국적으로 놀아들 났으나,
특히 두드러지게 앞장 섰던 이 사람의 이름을 나는 기억한다.

- 세상에 앞장서 큰 소리를 치는 이들은 그 누가 되었든 경계하여야 한다.
김동렬이든, 시골의사든, 미네르바든 ...
그러하기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한다.
살불살조(殺佛殺祖) ! -

하지만, 한 때 시가총액이 3조원이 넘던 이 회사는 부도가 나서 쫄딱 망했다.
삼성의 이재용은 이 회사에 투자를 했다가 엄청난 손해를 입었으며,
필경에 새롬 CEO는 감옥에 잡혀 들어갔다.

다이얼패드란 상품에 적용된 기술은 독점적인 것도 아니요,
이미 수많은 회사가 유사한 기술을 확보하고 있을뿐더러,
시장에 나온 제품도 그리 성공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며칠 전 링크를 따라,
우연히 ‘시골의사’ 박경철이란 사람의 동영상 하나를 보았다.
나는 이 사람의 이름을 진작부터 듣고는 있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접해보았다.

인류 중 0.1%의 창의적 인간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제안을 하고 망망대해에서 새로운 땅을 찾으면, 0.9%의 직관 있고 안목 있는 인간이 그들을 따라가고 후원하고 건설해 온 게 오늘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러프킨은 나머지 99%를 잉여인간이라고 불렀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그는 0.1%는 아니더라도 0.9%에 속하여
거래가 아닌 투자를 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중인(衆人)에게 묻는다.
당신은 잉여인간인가? 아닌가?

내가 묻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은 당연 저 분류에 따르면 잉여인간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대다수인 99%는 1%에 속할 수 없다.
아무리 용을 쓴들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런즉 저 분류법이 유효하다고 인정하는 한,
그대가 잉여인간이 아닐 확률은 대단히 작다.

문제는 이 분류법을 따른다면,
이제 "그대의 과제는 무엇이 되는가?"하는 것이다.
99%->0.1% 또는 0.9%로 진입하여야 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그대에게서?

에디슨은 이리 말했다.
“Genius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cent perspiration.”

1%도 가진 것이 없는 99% 짜리 잉여인간들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과연 그대들에게 나머지 99%의 땀은 준비되었는가?

반면, 시골의사는 말한다.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기 위한 목적만으로 싸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사 비싸게 팔려고 시도하는 게 거래다. 거래는 기본적으로 나보다 좀 더 바보에게 조금 더 비싼 값으로 팔아넘기는 것일 뿐이다. 반면 투자란 통찰력과 직관의 요소가 들어가는 것이다.”

에디슨은 땀을 말하고 있지만,
시골의사는 통찰력을 말하고 있다.

에디슨이 나머지 잉여인간을 위로하기 위하여
말을 짐짓 꾸며 점잖게 던져본 것일까?
시골의사는 잉여인간을 놀리느라고
그들이 갖지 못한 것을 부러 강조한 것일까?

여불위(呂不韋)의 기화가거(奇貨可居)는
(※ 참고 글 : ☞ 2008/02/11 - [소요유/묵은 글] - 여불위(呂不韋) - 기화가거(奇貨可居))
시골의사의 명명법에 따르면 ‘투자’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분명 ‘거래’는 아니다.
그가 일개 상인에서 도약하여 일국의 재상이 되고,
실제 진시황의 아비가 되는 음모를 획책한 것을 과연 '투자'라고 불러도 좋은가?

“실패한 투자는 투기요,
성공한 투기는 투자“라고 한다면,

여불위는 반은 '투자'에 성공하였고,
말년에 결국 자살로 마감하였으니 반은 '투기'로 실패하였다 할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현재 한나라당의 소속 국회의원이며,
‘전, 노’의 내란 사건 담당 검사였던 장윤석의 말은 또 무엇인가?

모두들 하나같이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현실추수형(現實追隨形)
결과론적인 판단내지는 평가에 불과하다.

세상인심이란 게,
성공은 기려도 실패는 탓하기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성공하면 놀라운 '투자'라 칭송되고,
실패하면 용서가 아니 되는 '투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반역'이 된다.

만약 그대가 투자가(投資家) 또는 투기자(投機者)가 될 그릇이 아니라거나,
혁명가(革命家) 또는 반역자(叛逆者)가 될 인물이 못되고,
그저 그런 장삼이사(張三李四) 잉여인간에 불과하다면 말이다.

도대체 시골의사가 말하고 있는 통찰력 또는 직관을 가진 1%가
에디슨이 말한 99%의 땀으로 보충이 될 것인가?
나는 회의(懷疑)한다.

시골의사가 말하는 저 동영상에 감격하여,
입을 헤 벌리고 감격씩이나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저들은 아마도 내심 꿈꾸리라.

“나도 열심히 노력하여 1%가 되어야지.”

나는 단언하거니와,
99%가 1% 될 확률은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보다 만 만 배는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바윗돌 갈아서 어느 명년에 거울을 만들까?
차라리 열심히 로또를 사는 폭이 수월하니, 훨씬 남는 장사일 것이다.

엊그저께는 다음 아고라에서 활동하는 ‘미네르바’의 정체를 안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글에도 1%, 0.1% 이야기가 등장한다.

“...는 이 정권의 존립 이유와 권력 유지의 동인으로 삼았던
1% 상위층 중의 상위에 속하는 0.1% 극상위층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도대체 1%와 99%, 또는 천재와 잉여인간으로 이분되는
세상이란 얼마나 허황된가?

노자(老子)는 원래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 사관(史官)이었다.
주가 허약해져 허물어져 갈 때, 노자는 길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에 이른다.
관령(關領) 윤희(尹喜)의 청에 따라 글을 남기니,
그게 곧 오천언(五千言)에 이르는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이다.

노자가 언필칭 1% 아니 0.1%의 인물이라 한들,
행여, 그가 0.1%의 인간이 되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썼던가?

노자가 잉여인간들처럼,
가사(假使), 시골의사의 강연을 듣고는 
입을 헤벌리고 감격하여 그리 되리라 작정을 한다든가,
미네르바의 이야기를 듣고는 할배 할배하며
무릎 밑에 엎드려 경배라도 드리려고 하였을 터인가?
 
만약 1%가 별도로 있다면,
반사적으로 나머지 99%가 자동 생성된다.
(원래부터 1%, 99%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빨간 색연필로 1%, 99%로 나누어 금을 긋는 순간,
1%가 생기고, 99%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도대체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으며,
금생에 무슨 복이 많기에
홀연 99%짜리가 1%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거의 대개는 땀을 말(斗)로 흘리지도 않으면서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 말이다.

언감생심(焉敢生心) 고소원(固所願)이라,
어찌 푼수 넘어 단꿈을 그리 야무지게 꾼단 말인가?

월(越)나라 미녀 서시(西施) 이야기가 여기 있다.
그녀가 가벼운 가슴 통증에 시달려 고향인 저라산으로 돌아가 휴양을 취하게 되었다.
서시는 고향에 돌아와 가슴에 통증이 올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미간을 찌푸리곤 하였다.
이럴 때마다 이 미녀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으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게 되었다.
서시의 찡그린 상이 아름다움을 더하니,
그 마을의 가장 추한 계집도 상만 찡그리면 아름답게 보이는 줄 알고
자기도 서시의 흉내를 내며 돌아다녔다.
그러자 이 추녀가 보기기 싫어 마을 사람들이 나돌아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서시빈척(西施嚬蹙), 서시빈목(西施嚬目), 서시효빈(西施效嚬) 혹은
서시봉심(西施捧心) 따위의 고사가 생겨났다.
(※ 참고 글 : ☞ 2008/02/11 - [소요유/묵은 글] - 범려(范蠡))

본래 서시(西施)는 성이 시(施)이고 이름은 이광(夷光)이며 별명은 서자(西子)이다.
그런 것을 '저라산(苧蘿山) 서쪽에 살던 시씨'쯤 되는 말로 줄여,
그저 간단히 서시(西施)라 일컫는 것이다.

자 이러자,
이에 빗대어 東施效矉(동시효빈)이란 말도 생겨났다.
이 역시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남을 모방하다가 낭패를 당하고 마는 것을 의미한다.

東鄰醜女本醜效西施嚬戚而轉醜也

(※ 참고
嚬, 颦, 矉 : 모두 발음은 빈이며 ‘찡그린다’라는 뜻을 갖기에 통용된다.
效 : 본받다라는 뜻이니 곧 흉내 내다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의 출전은 장자(莊子)인데,
실인즉, 공자의 주나라를 향한 상고주의(尙古主義)를 은근히 비꼬고 있는 것이다.
핵심 부분을 다시 추려 역(譯)하면 이러하다.

“저 추한 여자들은 서시의 찡그림의 아름다움만 알았지,
그 눈살 찌푸림이 왜 아름다운지 그 까닭은 모른다.
애석하지만, 당신 선생(공자)도 (이와 같이) 곤란을 당할 것이다.”

故西施病心而矉其里,其里之醜人見而美之,歸亦捧心而矉其里。其里之富人見之,堅閉門而不出, 貧人見之,絜妻子而去之走。彼知矉美而不知矉之所以美。惜乎! 而夫子其窮哉。

이 고사를 나는 문득 생각하는 것이다.
뭇 사람들 역시 1%를 사모하는 즉시 99%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며,
그러한즉 자청하여 떨어진 그 구렁텅이에서 1%를 더욱 기려 그를 꿈꾸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추녀(醜女) 동시(東施)가 천년 묵은 여우라도 된다든가?
골백번 재주를 넘은들, 어찌 미녀(美女) 서시(西施)가 될 수 있음인가?

정녕코 효빈(效嚬)은 스스로 초래한 비극이자, 제 홀로 맞이하는 위험인 게다.
노자의 말대로, 공자가 상고(尙古)하는 주나라 예법이란,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 현재 그리고 지금(Here & Now)의 현실이 아닌 것이다.
1%에게 99%는 당전(當前)하는 역사현실이 아니듯,
99%에게도 1%는 역시 당면(當面)하는 실존이 아닌 것이다.
어설피 귀동냥하다 외려 봉욕을 당할 수도 있다.
예로부터 이를 경계하여 가르쳐 말하길,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 또는
"뱁새가 황새를 좇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라고 하는 것이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나?"
이 시체(時體) 말의 함의는 무엇인가?
그저 호박을 비웃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예서 그치면, 진짜 물호박이 되고 만다.

호박은 호박나름의 뜻이 있고 제 길이 있는 것,
자신을 돌보고 제 품성을 닦아 올바로 발양(發揚)하는데 대의(大義)가 있는 것이다.
하니, 애시당초 호박에 줄을 긋고자 하는 일이야말로 부질없고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여기 넘어가면 바로 스스로 판 함정이 되고 만다.
부처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함의(含意)가 여기 있음이다.

황벽(黃檗) 선사는 말하길 "팔만사천법문은 우는 아이 달래는 딱지 돈"이라고 말했다.
제 아무리 그럴듯한 것이라도 남의 말은 그자의 것이다. 
그것은 '듣는 이의 것'이 결단코 아니다.
미네르바 아냐 부처가 와서 떠들어도 그것은 당신의 진실이 아니다.

이 때라서야,
미네르바가 혹여 제법 훌륭하다든가, 혹은 그저 떠벌이에 불과하다라는 것을,
또한 부처가 혹여 위대하다든가, 혹은 혓바닥만 팔만사천 장(丈) 길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자리라야,
비로소 그들을 내가 만난다.

***

세칭 강태공(姜太公)이라 불리는 여상(呂尙)이
위수(渭水)가에서 곧은 낚시를 하다 서백창(西伯昌) 문왕(文王)을 만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고기를 낚고자 낚시질을 한다.
하지만 여상만큼은 빈 낚시질을 했다.
왕이 그를 기다린 것만이 아니다.
그 역시 문왕을 기다린 것이다.
왕과 신하가 아니라,
사나이 對 사나이.
인물 對 인물.
이리 대등한 관계로 만나고자 한 것이다.
당당(堂堂)함!

이게 아니라면 그리 죽치며 세월 낚을 것이 뭣인가?
천금을 풀어 요로에 줄을 대고 환로(宦路)를 뚫든가,
직접 왕과 만나 담판을 짓지 왜 그리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곧은 낚시질의 함의가 바로 살피어지는가?
그러하기에 '미네르바, 미네르바' 이리 엎드려 경배하듯 졸렬하게 처신하고서는,
정작 진짜배기 미네르바를 만날 수 없음이다.
물론 이리 나대는 이들이 대부분은 어린아해들이겠지만,
내 노파심에서 우정 이들이 걱정되어 별도로 이리 지적하는 바이다.

문왕은 그를 얻고 돌아가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른다.
이는 선왕(先王)인 태공(太公)이 바라고 기대하던 이란 의미이다.

어쨌건 여상이 80살(혹 72살)에야 등용이 되는 것인데,
이 때 가난에 찌들어 진작 친정으로 돌아가 버린 아내 마씨(馬氏)를 다시 만났다.
마씨는 이전의 잘못을 빌며 복연(復緣)을 구하였다.
이에 여상은 대야에 물을 가득 떠다가 그것을 마당에 엎지른 다음,
“이 물을 대야에 퍼 담아 보시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물은 이미 땅에 스며들고 말았으니,
마씨가 아무리 퍼 담는다 한들 기껏 흙탕물이나 몇 줌 주어 담을 뿐이다.

이에 여상은 이리 말한다.
"엎지른 물은 퍼 담을 수 없소.
마찬가지로 한번 헤어진 사람은 다시 결합할 수 없소."

太公初取馬氏,讀書不事産,馬求去。太公封齊,馬求再合,太公取水一盆傾于地,令婦取水,惟得其泥。太公曰 若能離更合,覆水定不收。

태공망(太公望)이 제(齊)나라에 봉하여 지니,
그 때 다시 돌아와 매달리는 아내 마씨에게 이리 연출을 한다.
이에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또는 복수난수(覆水難收) 고사가 생겼다.

여담이지만, 이와 유사한 고사가 전한(前漢) 때의 주매신(朱買臣)의 경우에도 따른다.
삼년불비우불명(三年不飛又不鳴)의 고사 또한 초장왕(楚莊王), 제위왕(齊威王)에 걸쳐 있다.
(※ 참고 글 : ☞ 2008/03/01 - [소요유] - 이명박, 촉무, 초장왕)
이렇듯 유사한 고사가 다른 인물을 중심으로 겹쳐 전해지곤 하는데,
이게 후세의 가탁(假託) 때문인지, 또는 실제 그러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폐일언하고,
이렇듯 언필칭 0.1%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여상(呂尙)은 나이 80세를 넘어 세상에 나아갔으며,
진목공(秦穆公)에게 발탁된 백리해(百里奚)는 70세,
함께 등용된 그의 의형(義兄)인 건숙(蹇叔)은 그보다 한 살 위이니,
모두 인생 말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재상으로 쓰임을 받았다.

항차 그러한데,
잉여인간 99%가 에디슨의 꾐처럼 99%의 땀으로 1%를 넘볼 수 있음인가?

그러하니, 나는 생각한다.
세상을 1%, 99%로 분절(分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리 분절하는 순간 멀쩡하던 그대가 이내 99% 짜리가 되고 만다.
사뭇 경계하여야 할 일이다.

노자처럼,
궁정 한구석에서 퀴퀴한 냄새나는 책이나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길을 예비하며, 꿋꿋이 그만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뿐인 것을.
그러면서도 꽃다운 방명(芳名)을 수천 년 전하고 있음이다.

그는 밖의 세상을 상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상대로 한 것이다.
이게 꼭 100% 온전히 충만한 삶인 것이다.
그러하니, 세상에서 1%, 99%로 나누며 넣고 빼며 분주함이 다 부질없는 것이다.

- 가령, 100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나는 1%가 되고, 1000인이 있다면 그중 나는 0.1%가 된다.
이런걸 뒤집어 내가 자청하여, 99%가 되고 나아가 99.9%가 된다는
저 가당치 않은 문법이란 게 나는 도시(都是) 비열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내가 1%, 0.1%라는 자존(自尊)의 회복, 각성.
이러할 때라야, 내가 곧 온전히 100% 충만한 내가 된다.
모든 이가 이리 생각하며 사는 세상이 바로 정토(淨土) 또는 각원(覺苑)이리라. -

다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뿐인 것을.

안분지족(安分知足)임이니,
못나고 잘남을 떠나 자신만의 나뉘어 받은 품성을 지켜,
족함을 앎이니 이게 곧 지도(知道), 즉 길을 아는 바라 할 것이다.

도대체가 사람이 1%가 따로 있고 99%가 따로 있음인가?
모쪼록 자중자애(自重自愛) 자존심(自尊心)을 지켰으면 하는 것이다.

요즘 매체에 등장하는 1% 운운(云云) 따위의 기사를 접하고는 사뭇 마뜩치 않을 새,
덩달아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이들을 보자니
이 또한 효빈(效嚬), 봉심(捧心)을 시나브로 떠올리게 되었다.
하여 파적(破寂) 삼아 이리 몇 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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