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삽족배(揷足輩)

소요유 : 2008.10.21 10:00


우연히 글 하나를 읽었다.
(※ 참고 글 : ☞ 이럴때 일본은 참 숨 막히는 나라)
그 글의 필자는 일본에 유학 중이다.
그의 표현을 따르거니와,
그는 “자신을 절대로 이해시키지 못하는 일본인들의 행동 세 가지”를 나열했다.

1. 더운데도 버스 창문을 열지 않는 승객들.
그가 유(留)하는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창문을 열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뒷사람에게 피해를 줄까봐 그럴 수 있다는 대답.

2. 1분 지각--->어쨌든 지각
‘수업 전’에 숙제를 제출 하여야 하는데 1분 지각하여 이를 못 지켰다.
선생은 이를 엄격히 적용하여 10점 만점에 2점이 깎였다.

3. 3시간 20분 수업---->마지막 1분까지
수업 종료시간 마지막까지 철저히 지키는 일본 선생.

이상의 생활 사례를 열거하며, 그 필자는 이리 푸념하고 있다.

"아,,난 이곳이랑 너무 맞지 않아,,내가 살수있는 곳이 아니야 이곳은.,"

"칼 자르듯 반듯반듯 철저하게"
"한 줄로 서서 버스 기다리는 일본인"

그는 이런 일본인들의 철저함에 가끔 숨이 막힌단다.
...
...

***

이 글을 읽다가 나는 불현듯 늘 겪고 있는 한국에서의 일상이 떠올랐다.

국립공원에서 라디오를 크게 틀고 오르는 등산객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그곳은 유원지나 놀이터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조용히 숲길을 거닐고 싶은 사람도 있을 터이고,
명상하는 사람도, 책을 읽는 사람도, ...
잎새에 이는 바람, 낙엽 구르는 소리, 불붙는 단풍빛에 젖어,
한껏 가을 분위속으로 침잠(沈潛)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견디기 어려운 경우, 가끔 주의를 준다.
이들의 반응들을 보자.

“이어폰을 끼고 들으면 귀가 아프다.”
 - 사정이 그러니, 당연히 외부로 틀고 다닌다. 왜 그게 문제냐는 표정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행의 준칙이 공중도덕이 아니라, 자신의 형편이 그저 중(重)할 뿐이다.

“네놈이 무엇인데 참견이냐”
 - 이런 노인을 만나면 그냥 참아야 한다.
   한발 더 나가면 욕을 퍼붓기 십상이다.
   주로 우르르 몰려 있기에 제 무리를 믿고 기가 뻗쳐 안하무인이다.

이들은 나이가 어찌 되었든 하나같이 한낱 어린아해들에 불과하다.
도대체 자신외에는 의식이 밖으로 미치어(及) 연장되지 않는다.
성장이 멈춘 이들이다.

북한산 입구(정릉) 점포들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에 보이는 인도(人道)는 그 너비가 보도블록(단위 문양 기준) 9개 반 정도의 크기다.
그런데 점포 앞에 달아낸 좌판이 보도블록 6개나 차지하고 있다.
근 2/3나 인도를 점거한 것이다.
게다가 바로 곁에는 가로수가 심어져 있어,
여기를 지나려면 몸을 좌우로 한 번씩 비틀면서 지나가야 할 판이다.
거기다 차도에도 테이블을 내놓았다.

길 건너, 바로 맞은 편 인도 위에는 오토바이가 일렬로 주차되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 블로그의 필자가 그리 그리는 한국에 돌아왔다 한들,
이런 환경이 ‘살만한 곳’이라고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 이리 어울렁더울렁 적당히 비비적거리며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곳이야 하고 만족할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처음엔 이리 난잡한 곳을 통과하여 국립공원을 드나들었다.
점포에 의해 인도가 거의 점령당했기에 그리 다니려면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해서 나는 그 맞은 편쪽 인도를 이용했다.
그러나 거기엔 오토바이가 일렬로 인도를 점령하였기에 그 역시 고역이긴 마찬가지다.
해서 담당 관청에 고정을 수차 하였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점포 쪽은 장사하는 사람이라 형편을 봐주어 신고를 하지 않고 그냥 놔뒀다.

“그런데, 내가 왜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그 하나의 사실 앞에 이리 형편을 봐주어야 하는가?”

한국사회에 불법비리가 안개처럼 뿌옇게 흩뿌리는 그 거역할 수 없는 암묵적 권위 때문일까?
아니면 맞설 경우 매정한 인간으로 배척 당하고 마는 두려움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먹고 사는 일’에 관대하기 때문인가?

도로를 자동차로 달려보라.
택시 기사의 묘기와 늘 맞부닥뜨린다.
차 하나 길이의 여유도 없는 틈새로,
슬쩍 앞바퀴 하나를 옆 차선에다 물린 후,
방향 지시등도 켜지 않고, 재빠르게 새치기를 하고 들어오는 그들,
가히 신기(神技)에 가깝다.

36計에 보면 승극삽족 거기주기(乘隙揷足 拒其主氣)란 말이 있다.
 - 틈을 타서 발을 넣고, 그 주기(主氣)를 눌러라. -

택시 기사들이 하나 같이 모두 36계를 배운 것은 아닐 테지만,
그들은 인접 차선에서 이미 흐름을 타고 있는(主氣) 행렬들의 조그만 틈을 노려,
재빠르게 제 차의 바퀴를 밀어 넣고(揷足) 다른 이들의 흐름을 끊어 버린다.
이 때 침탈(侵奪)을 당한 사람은 만부득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주기(主氣)가 순간 끊기고 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저들은 불한당(不汗黨)이다.
저리 한 평생 살면 어찌 되겠는가?
뭣이든지 숙달되어 익으면,
의식에 틀로 자리 잡는다.
만약 운전 뿐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저런 기술을 발휘하게 되면,
어찌 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뭇 가여운 노릇이기도 하다.

그래, 이것은 신기(神技)라고 부를 것도 없다.
누구라도 독한 마음먹으면 이리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이러지 않는 것은,
그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짓거리이기 때문에 삼가는 것이다.

저들은 ‘먹고 사는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종일 저리 거리를 횡행한다.
나는 저들을 삽족배(揷足輩)라고 부른다.
팔난봉이 유공즉출(有孔則出) - 구멍만 보면 나가 들이미는 것이
그 잘난 육봉(肉棒) - 고기방망이이라지만,
이 삽족배(揷足輩) 무리들은 대신 족발을 들이민다.
제 것 남의 것 가리지 않고, 틈만 보이면 무조건 발을 꽂고 본다.
팔난봉 무색한 노릇이다.

이 거룩하기 짝이 없는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치러야 하는 불편부당,
그 사회적 비용은 나머지 사람들이 부담해주어야 한다.

저 블로그의 필자가 보기엔,
이런 세상이 정이 넘치고 포근하니 관대한 세상으로 보일런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해서 우선은 맞은 편, 오토바이나 치워 달라고 신고를 했다.
그런데, 관청 직원의 대답은 사뭇 놀랍다.
오토바이는 규정이 없어 도리가 없다한다.
(... 답하여 가로되, 현행 도로교통법시행령에 과태료 부과 규정이 없어 云云)

이제껏 딱 한번 목격한 확성기를 단, 거리질서 단속 차량은
‘인도에 물건을 내놓지 말라’고 소리를 치고는 휭하니 사라지고 만다.
어디 물레방앗간에 숨겨 논 엉덩이 펑퍼짐한 과부댁이라도 있단 말인가?
저들이 저리 확성기 달고 팔랑개비 돌리듯 내달려가버린 자리 뒤에는
수십 년 동안 하나도 변함이 없는 점포들의 횡포가 찢어진 돛폭처럼 휘날린다.

나는 도리 없이 차도로 내려 길을 걷는다.
이것은 그냥 이 시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업보다.
우리 집 식구는 국립공원까지 이르는 이 길을 지나기 싫다며,
공원 가기를 꺼리기까지 한다.

나는 마침내 어느 날, 그 길을 벗어나 산기슭을 빙 돌아가는 길을 개척한다.
한 동안은 그 산길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여기도 그리 편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솔길은 수년 동안 버려진 쓰레기가 흡사 콩사발 엎어지듯 흩어져 있다.
차마 목불인견이다.
게다가 버려지는 강아지, 학대 받는 동물들이 간단없이 나타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

이 말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언명하는, 선언명령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의식을 가진 동물로서, 인간이란 이름을 드디어 갖게 되는
그 사태가 일어나는 현장에 최초로 떨구어진 말의 씨앗이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주저 없이 꼽아 강조하는 것이다.

삼가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다 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사양지심 예지단(辭讓之心 禮之端).
그러하기에 사양하는 마음을 예의 단초라 이르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조수불가여동군(鳥獸不可與同群)이라는 공자의 말의 핵심도
결국은 예의염치를 갖춰야 한다는데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 참고 글 : ☞ 2008/08/22 - [소요유] - 조수불가여동군(鳥獸不可與同羣))

저 블로그의 필자는 말한다.

“날씨가 더운데 왜 창문을 열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머리카락 날리는 것을 꺼리는 이가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어 바람 맞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이가 다수이든, 소수이든 누군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있다면,
나의 필요성, 욕구에 대한 무작정의 충족을 구하는 행위에 앞서,
문득 멈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반성적 성찰이 일어나야 한다.

이 때 나를 둘러 싼 그 공간은 공적영역임이 둥두런히 부각된다.
이 공적영역에 내가 들어가 있음이 자각되면,
그 때, 내 개인적 불편함을 참아 낼 수 있는 인내심이 절로 생겨난다.
이 긴장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을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라고 부른다.
공자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에 이르지 않더라도,
이리 익숙해지면, 애써 긴장할 것도 없이,
도리어 이리 하지 않으면, 편치 않는 상태에 이른다.
이런 상태에 이른 사람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내 욕구를 주저 없이 바로 충족시키는 사람을 우리는 아해라고 이른다.
그리고 이런 철부지 아해들의 행동을 우리는 ‘어리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보면, 점포 상인의 인도 무단 점거, 오토바이 무단 주차,
택시 기사의 끼어들기 등등은 모두 어리광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문제는 어리광은 제집 부모에게나 통할까,
외부 다른 사람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식당에 들어와, 어린아이 뛰어놀게 하는 짓거리는 그 부모 눈에는 어리광이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그를 어리광으로 보아달라고 주문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어른이면서 어른답지 못하다면, 그저 한마디로 미친놈인 것이다.
그러나 더욱 문제인 것은 이를 통제할 아무런 사회적 장치가 없다거나,
있어도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무작정 먼저 저지르고 보는 놈이 장땡이다.
큰 소리 지르고, 먼저 불법, 비행을 저지르며 제 사익을 취하는 놈이 최고인 것이다.
이리 하여도 아무런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으니 꺼릴 것이 없다.
후과(後果)도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위인(偉人)은 한껏 우러러본다.
예컨대 단재 신채호를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존경한다.
일제에 굽힐 수 없다며, 옷 한 벌을 다 적시도록 꼿꼿이 서서 세수를 하였다는
그를 늘 우러러 보며 칭송한다.
하지만, 한편 자신은 비루하게 굽히고, 기어가며 한 세상을 요령껏 살아간다.

존경심의 대상화(對象化).
구체적 삶과 해리(解離)된 장식화 된 삶.
이중 구조의 삶이 여기에 있다.

내가 하지는 않고,
다만 남이 하도록 하고,
자신은 멀리 떨어져서 그 행동을 향해 박수만 쳐댄다.
이 위선의 모습을 겉으로 내보이면서,
남에게 보이길, 짐짓 그럴듯이 착한 사람씩이나 되고 만다.
하지만, 뒷전에선 내가 취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악착같이 염치불구하고 이(利)를 탐한다.

그 블로그의 필자는 이리 말한다.

“물론 그들의 이런 칼 같은 행동들이 일본을 세계 두 번째 경제대국으로 일으켜 세운 원동력 중 하나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따져봐야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이리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일본에 가서 배우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만약 그가 자신의 이 진술을 진정 믿는다면,
일본인들의 행태에 대한 그의 푸념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동한다면,
훌륭한 결과에 도달하지 못할 것을 그는 예상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의 대안은 무엇일까?

정작 배워야 할 것은 정신이 아닐까?
슬쩍 기술만 배워가지고,
빨리 한국에 돌아와서
제 마음껏 살고지고?

양손에 떡을 쥔 그의 욕심 사나운 모습이 정녕 희화(戱畵)보다 더 우습다.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천하난사 필작어이 천하대사 필작어세)

易.細에 멈추어 서서,
마음을 기우려 삼감과 정성을 다하는 자세.

조그마한 일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든가,
소수자일지라도 그들의 불편을 살펴, 내 행동을 삼가는 마음이 없다면,
큰일(大事)을 이룰 수 없다.

***

누구라도 말하기 쉽듯이,
이를 단순히 일본인과 한국인의 민족성, 문화의 차이로 해석하면,
더 이상 재론할 건덕지도 없다.
제각기 장단점이 있는 것이니까 견강부회(牽强附會)로 해석하기 나름이다.

차이를 들어 이쪽의 단점을 가려(遮蔽) 자위하고,
저쪽의 장점을 적당히 왜곡된 시선으로 폄하할 수도 있다.

예컨대, 이쪽의 단점은 융통성 또는 화통함으로 짐짓 꾸며 자랑하고,
저쪽의 장점은 결벽증(潔癖症)내지는 편벽(偏僻)됨으로 치부하고 만다.
이런 자세로는 아무런 배움도, 깨달음도 없다.

나는 이는 문화의 차이도 아니오,
그렇다고 민족성의 차이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 개개인의 품성, 자질의 문제라 생각한다.
이게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를 반성하고, 남을 배울 준비가 마련된다.

이 이외에 하나 더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사회적 시스템의 채비 또는 그 정상적인 작동이다.

예컨대,
인도를 점거하는 저들 파렴치한 행위를 처벌하는 법규의 존재와,
그 법규에 따라 위법행위를 징벌하는 체계의 정상적 작동이 요긴하다.

법규는 있어도 구체적인 제재가 없는 사회,
나는 이게 우리나라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 개개인 자질의 고양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제3의 조정자가 나서는 게 현실적으로 시급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단 하루에도 10명 이상의 도토리 줍는 이를 보는데,
저들 공원 당국은 수개월간 고작 9명 적발했다고 하며,
헬기씩이나 타고 공중 쇼를 벌이고 있다.
(※ 참고 글 : ☞ 2008/10/02 - [산] - 도토리 쇼)

이쯤이면, 법을 지키는 사람만 바보다.
그러니까, 온 나라 사람들을 전부 ‘어리광쟁이’로 만드는데,
나라가 앞장서고 있는 셈이다.

저 블로그의 필자는,
일본에 가서 답답함을 느끼기보다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정신, 단 하나 이것만 제대로 배우고 와도,
큰 성취를 이루리라.

물론 일본이 모두 본받을 만하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그가 지적한 3가지 사례를 돌려서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투정 부리며, 답답해 못 살겠다고 토로만 할 것이 아니라,
회향(回向)하여, 배우고 돌아오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대, 어린 아해는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더우기 배움의 도상에 있지 않은가?

회향(回向)!

그의 건학(健學)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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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강진규 2008.10.22 14:50 PERM. MOD/DEL REPLY

    안녕하세요-엮인글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읽어보니 제 글 많은 부분에 동의하시지 않으셨나 봅니다. 아니 제 글이 bongta 님을 좀 어이없게 만들었나 보군요. 와서 글을 읽어보니, 제가 말한 점들 제가 말한 몇가지 예들을 한국사회에 적용시키시면서 "한국 이 모양 이 꼴이다, 불평하지 말고 그런 것들 배워와라'(물론 사자성어/한자를 섞으시며 높은 지적수준을 보여주시면서)는 식으로 쓰셨군요. 머 님께세 쓰셨듯이 분명 '일본'에게 배울 점들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불편을 자신의 편의보다 먼저 생각하는 마음 등등 이요. 하지만 그런 '고려'가 가끔은 전혀 융통성없이 한치의 오차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 에서,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답답함'(bongta님께서는 이름만 있는유명무실 '법/규칙/질서'를 가진 우리가 이런 '답답함'을 느낄 자격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요)을 느끼는 듯 합니다. 남을 위해 철저한 일본 사회이지만 아이들이 있는 식당이나 카페에서 당당히 담배를 피거나 온천 휴양지 곳에서도 당당히 포로느 프로를 틀어주는 곳이 일본이기도 하죠. bongta님이 3가지 사례를 돌려서 생각해보라고 하셨는데, 이 3가지는 배울 것 많은 일본이지만 '융통성 없는 일본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네요.

  2. 사용자 bongta 2008.10.25 15:14 신고 PERM. MOD/DEL REPLY

    안녕하세요.

    나의 답답함 건너편 강변에 다른 이의 아픔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이 마음을 점검하자는 것입니다.
    나의 답답함과 다른 이의 답답함이 한 자리에 만나,
    같은 지향(志向)이라면 결과적으로 다행이겠지만,
    만에 하나일지언정, 서로 다르다면 안타까운 사태가 벌어집니다.

    나의 답답함을 모든 사람이 함께 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양심이 생깁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의(禮義)라고 하는 게 아닙니까?
    예의(禮義)라고 할 때,
    이는 그저 단순히 예(禮)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의(義), 즉 ‘마땅히 옮음’이라는 말을 반드시 덧새겨야 합니다.

    그러하기기에 뜻을 더 적실(的實)히 밝혀,
    예의(禮誼)라고도 하는 것이지요.
    이는 곧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옳은) 도리’란 말입니다.

    제 아무리 그렇지만,
    종국엔, 각자는 자신의 길을 갈 뿐인 것을 압니다.
    다만, 그 길을 온전히 걷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있어야겠지요.
    어차피 그 물음은 남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한테 하는 자문(自問)의 형식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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