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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문법은 외돌아 가지 않는다.

소요유 : 2008. 10. 17. 19:05


일전에 이야기한 고물 할아버지 집에 새로운 강아지 한 마리가 또 보인다.
(※ 참고 글 : ☞ 2008/04/29 - [소요유] - 낮달)
또 다시 하나의 불행한 운명이 예고되고 있다.
가슴이 철렁이는 것도 잠깐, 이내 속에서 불끈 불덩어리가 솟는다.

일전에 강아지 세 마리를 그냥 저 세상으로 보낸 그,
당시, 길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우정 편히 대하며, 그를 어르며 달랬다.

“다음부터는 강아지를 절대 받아들이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리하면, 교인들이 나름 별도의 대책을 세우지 않겠습니까?
그 가여운 것을 데려다 결국은 죽이고 말 것을
어찌하여 년년세세 그 험한 일을 스스로 짓습니까?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만,
귀한 생명 함부로 꺾는 것이야말로 죄를 짓는 것 아닙니까?

    (※ 꺾는다 : 우리는 장미꽃을 꺽는다.
    무심코, 아무 의식없이 그리 분질러 나의 화병에 꽂고 즐긴다.
    꽃의 아픔을 딛고 우리는 썩이나 고상해진 척한다.
    가여운 동물도 꽃을 꺾듯이 그저 그렇게 꺽는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활개짓 치며 제 길을 돌아간다.
    그가 떠난 그 자리,
    어두운 뒷골목 바닥엔 밤새도록 점점(點點) 피가 듣는다(滴).
    그대, 저 피의 소리를 듣는가?)


당장 저지르지 않아도 될 죄를 그치는 그 자리에서부터
기도의 출발처를 삼아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는 면전이라 그랬을 터이지만,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리 하겠다고 했다.

사정은 몰라도, 온전히 고물만 주어서 생활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다 큰 아들이 정기적으로 그 집을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강아지 받아들이며 필경 그러할 푼돈 몇 푼 쥐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대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뵙기로 한다.
그러나 3번이나 찾아 갔지만, 때마다 출타중이다.
4번 만에 드디어 기회를 얻었다.

하도 시절이 괴이쩍은 세태라 혹여 예기치 않은 마찰이 생길까 염려가 된다.
다행히 목사님은 사리가 소명(昭明)하니 밝으시고, 이해심이 깊으셨다.
나는 하나로 꿰엮어 그동안의 소종래(所從來)를 발겼다.

신자들이 고물 할아버지의 형편을 충분히 알고 있는 상황 하에서,
그에게 기르던 강아지를 넘긴다는 것은,
결국 ‘부담(負擔)의 전이(轉移)’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에겐 위장된 평화와 안식이요,
동물에겐 유예된 단 몇 개월의 생존에 불과한 것.

결과가 뻔히 예정된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넘기고 손을 떼는 것은,
자기 책임을 방기(放棄)하는 것이다.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

이 얼마나 허무한 문법이란 말인가?
약삭빠른 게 아니다,
내겐 그저 허무하게 보일 뿐이다.
아무리 손이 천만번 바뀌어 건너뛰어도,
피의 문법은 외돌아 가지 않는다.
기어이 그 빠알간 손을 찾아내,
처음을 묻고 만다.

天網恢恢 疎而不失(천망회회 소이불실)
하늘 그물은 넓고 넓어 성긴 것 같지만, 놓치는 바 없다.

그 고물 할아버지가 강아지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있음은,
동네 사람들이 그 집을 드나들며,
대신 그 강아지들을 돌보고 있는 것을 보아도 명명백백하다.

형편이 이러하다면,
필경은 강아지를 넘기면서 사례금 몇 푼 집어주었을 테고,
기껏 이것만으로 자신의 부담을 털어버린 것이다.

집안에서 사랑으로 키우던 그 조그마한 어린 생명을,
내 안일과 편의를 위해,
무참히 사지로 내몬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들이 고물 할아버지의 실정을 뻔히 알고 있는 한,
이런 처사는 거짓된 것이다.
참으로 흉한 행사(行詐 or 行使)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님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야기 고비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를 한다.

나는 목사님이 기회를 내서,
이런 사정들을 제대로 신자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주시길 바란다고 청했다.

하회(下回)가 어찌 될런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이젠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다.
아무리 불덩이가 끓어올라도,
그 허울 좋은 ‘인간’이란 족속을 상대하는 한,
나는 그저 죽음보다 더 깊숙이 잠거(潛居)하여야 한다.

이럴 땐,
사무라이가 되는 꿈을 꾼다.
차라리 수음(手淫)보다 더 허망한 허화(虛華).
내 욕망은 오늘도 이리 백골가루로 허공중에 산화(散華)한다.
가여운 나의 분신, 그 욕망을 조상(弔喪)하자.
그래야 오욕(汚辱)의 오늘이 지난다.

***

고물 할아버지가 그 강아지를 바로 처분한 것일까?
며칠 새 그 강아지가 벌써 보이질 않는다.
(추신 : 오늘 찾아가 보니, 아주 께저분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시 제대로 보지 못했는가 보다.)
도대체, 왜 저 짓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

나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동물을 아끼느라고 한 인간을 미워하게 된다면,
이는 또 얼마나 어처구니없음이며,
괴로운 노릇인가 말이다.

아, 중생의 삶은 참으로 애닲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모두 사는 게,
난사(難事) 중에 난사다.
이 가운데 과연 나부터 제대로 살기나 하는 것일까?

길은 늘 그러하듯이 사뭇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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