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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貴人)과 중고기

소요유 : 2008. 11. 13. 12:45


귀인(貴人)은 말 그대로 귀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런데, 귀인에는 두 가지 종별이 있다.

피에 의해 귀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의 특칭으로서의 귀인이 있다.

전자는 앞의 글 ‘富와 貴’에 이미 다루었듯이,
태생적으로 부와 귀를 함께 가진다.
(※ 참고 글 : ☞ 2008/06/27 - [소요유] - 富와 貴)
그렇지 않고, 이를 벗어난 사람은 대체로 빈천(貧賤)한 삶을 대물림 받는다.

고대에는 貴가 富를 이끌어내는 원천이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거꾸로 富가 貴를 규정하곤 한다.

신문기사를 보면 예하건대,

“이번에 적발된 사람들 중에는
의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의 지도층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 云云”

의사, 변호사, 교수 등은 직업을 드러내는 바를 벗어나,
기자에 의해 불현듯 지도층 인사로 예단(豫斷) 또는 규정되고 만다.
지도층이 있으면 피지도층이 있는 법,
도대체, 그 나머지가 언제 그들에게 지도 받기를 원하기라도 하였단 말인가?

아마도 짐작컨대,
저 쓸개 빠진 기자들은 지배층(支配層)이라 차마 기술하지는 못하고,
슬쩍 외로 틀어 지도층(指導層)이라고 돌려 말한 것은 아닐까?

저들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노예(奴隸) 근성에 찌든 결과다.
세상을 양분하고, 스스로 아랫 동네에 거하며,
자신을 한껏 낮춤으로서 얻는 안전은 퍽이나 달콤한 것이다.
왜냐?
안전은 주인이 던져 주는 것이며,
행복은 지도층이 베푸는 것이니까.
노예는 이리 주인을 필요로 한다.

분명한 것은,
언필칭(言必稱) 지도층이라는 이들이 통상 남보다 돈을 많이 벌기는 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남을 지도할만한 인격, 식견을 가졌다고,
함부로 예단할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이들을 지도층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는 富가 貴, 즉 신분까지 거머쥐고 만다는 것일까?

예전에 피가름에 의해 신분이 규정되는 사회 시스템이 옳다 그르다라는 가치판단을 떠나,
만약, 그러한 사회라면 ‘貴한즉 富’하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니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역으로 ‘富한즉 貴’하다라는 것은 사뭇 억지스럽다.
예컨대, 富하다고 이내 인격이 고매(高邁)하다든가, 높은 식견을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다.
모름지기 貴하다라고 할 때는 신분 또는 자격을 떠나,
이런 고상한 가치를 함께 하리란 자연스런 기대를 갖는다.
그러하기에 이들을 무작정 지도층 인사라고 규정하는
저런 따위의 기사는 대단히 비겁하고 졸렬(拙劣)하다 하겠다.

***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
정작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 글의 주제로 되돌아온다.

귀인(貴人)을 위에서 말한 것 중에서 후자로 한정하자.
즉,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말이다.

어느 날 곤경에 빠진 사람에게 누군가 나타나
크게 도와, 종국엔 그를 구한다.
그 후, 그는 크게 입신(立身) 양명(揚名)한다.

사람이 살면서 이런 귀인을 만날 수 있다면 대단히 행운일 것이다.
경계하거니와, 물론 실력 갖추는 것을 게을리 하고,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그저 운을 기다리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여기 제목에 문득 달아놓은 ‘중고기’란 또 무엇인가?

소싯적 ‘여벌(女閥)’이란 일본 소설책을 읽은 적이 있다.
여벌이란 여자재벌을 뜻하는 것이리라.

소설의 줄거리는 다분히 통속적이다.
촌에 사는 주인공 여자가 남편의 방탕과 무능을 뒤로 하고,
자기 자식과 함께 도시로 탈출하게 된다.
그녀는 후에 남다른 노력과 성실함으로 술집 호스티스로 대성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도시로 탈출하기 전에,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오늘 귀인(貴人) 이야기를 쓰면서,
마침 이 장면이 기억의 저편에서 떠올랐던 것이다.

얘기인즉슨 이러하다.
그녀의 어머니 말씀이 강 속에 중고기라는 물고기가 산다.
이 물고기는 미끼에 눈이 멀고, 욕심이 등천하여,
주저하지 않고 덥석 물어버리고는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니 너는 중고기가 결코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당시 그녀가 바로 중고기 신세가 아닌가 말이다.
남편이란 미끼를 덥석 물고는 그리 신산고초(辛酸苦楚)를 겪고 있는 게다.
하여 어린 애들을 들쳐 업고는 도시로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미끼는 늘 화려하고 대단히 유혹적이다.
본시 미끼의 본령은 속임에 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도 보면,
제일의적(第一義的)인 표제어가
兵者, 詭道也(병자 궤도야)인 것이다.

詭, 즉 속임이 병가(兵家)의 으뜸 가치인 게다.

속임을 당하는 측에서 보면,
무엇인가 그 거짓 속임이 이익이 되리란 오인(誤認) 때문에
걸려들고 종국에 망신(亡身)을 당하고 만다.

속임의 내용이 사물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그 순간 그를 옳다구나 귀인(貴人)이라고 여기지나 않을까?

부나방이 타오르는 불속으로 달려드는 것은 무엇인가?
불꽃의 아름다움에 취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경각간(頃刻間)에 이내 살이 타고 명을 다한다.

비록 똑똑하다한들,
아차, 한 순간 경계를 등한히 하면 크게 실수를 하기도 한다.

올빼미는, 밤에는 비록 실오라기 하나라도 밝히 보지만,
낮에는 설혹 태산(泰山)이라도 보지 못한다.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살피지 않으면,
제 아무리 능력이 있다한들 일을 크게 그르칠 수 있음이다.

그날 그 사태의 현장에서,
그가 귀인(貴人)인지 흉인(凶人)인지 도대체 어찌 알 수 있음인가?

明槍易躲, 暗箭難防(명창이타 암전난방)
“보이는 곳에서 날아오는 창은 피하기 쉽지만,
몰래 쏘는 화살은 막기 어렵다.”

본시 미끼는 그리 화려하고,
거짓은 그리 그럴싸하게 위장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라, 이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을런가?

그러하니,
세상의 모든 미끼는 그저 미끼가 아니라,
독이 묻은 미끼이니 즉, 독이(毒餌)인 게라.
민짜로 새겨 그냥 미끼(餌)라 할 것이 아니라,
거죽에 독(毒)을 발라 독이(毒餌)라,
이리 시퍼렇게 파새겨,
마음 속 깊이 경계하여야 하리라.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빈(孫臏)도 명색의 병법가이지만,
크게 배신당하고 무릎 밑을 절단 당하고 만다.
이로서 그는 빈(臏)이란 이름에 걸맞는 처지로 전락한다.
빈(臏)은 종지뼈를 잘리는 형벌의 이름이기도 하다.

손빈은 동문수학한 사이인 방연(龐涓)의 초대로 위(魏)나라로 갔지만,
재주를 시기하는 방연의 꾐에 빠져 빈(臏)이란 형벌을 받고 만다.
기왕에 출세하여, 위나라 정승으로 있는 방연의 천거로 위나라에 와서,
출세를 꿈꾸던 손빈이야말로 애초에 방연을 귀인이라 여기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방연을 신뢰하였으리라.
하지만 그는 ‘중고기’가 되고 말았다.

방연은 손빈의 위인 됨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남을 알고,
그를 끌어들여 애저녁에 절단내버리고자 계획한 것이다.

고금(古今)을 통해 가장 위대한 병법가로 추앙받는 손빈이지만,
소리장도(笑裏藏刀)라,
방연의 웃음 속에 숨겨진 칼날을 미처 경계하지 못했다.

후에, 손빈은 방연을 마릉(馬陵)전투에서 거꾸러뜨리고 치욕을 갚는다.

"龐涓死于此樹之下"

손빈은 나무껍질을 벗겨 이 글을 적어놓았다.
방연이 밤에 불밝혀 이를 읽자 하니,
이를 신호로 좌우에서 화살이 빗발처럼 날았다.
이에 방연은 일설에는 죽었다 하고, 일설에는 사로잡혔다고 한다.

이러하듯이,
미끼란 늘 꿀처럼 달콤하고,
사내 앞에 선, 꾸민 계집인 양, 자르르 혼을 앗아가고 만다.
아, 끝내 절혼(絶魂)코 귀명(歸冥)의 길에 이르곤 한다.

그러하기에 그날 그 현장에서 내게 이르른 이가,
귀인(貴人)인지, 흉인(凶人)인지 앎은 심히 지난(至難)한 일이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이를 깨닫게 됨이니,
그 때에 이르러서야 행(幸)과 불행(不幸)을 겨우 알 수 있을 뿐인 것을.

나는 앞의 글 '배반의 장미'(☞ 2008/02/15 - [소요유/묵은 글] - 배반의 장미)에서,
마지막 순간이라야 밝혀지고마는,
장미빛 피가 낭자한 배반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러한즉,
귀(貴)해 보인다고, 지나치게 흥감(興感)할 것도 아니요,
천(賤)해 보인다고, 사무치게 멸시(蔑視)할 노릇도 아니다.

다만 범사(凡事)에, 냉수 마시듯 담담(淡淡)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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