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선물(膳物)

소요유 : 2008. 12. 29. 13:33


최근에 다음 기사를 읽었다.

미국인들의 '가정적인 크리스마스'가 항상 평화롭고 따뜻한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미국인들이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시기 가운데 하나다. 스트레스 원인 가운데 으뜸은 '선물'이다. 가족, 친척, 친구들을 위해 선물을 마련하기가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도 돈이지만, 매년 같은 사람에게 다른 선물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성탄이 다가오면 방송, 신문, 잡지는 자상하게 '크리스마스 스트레스(Christmas stresses) 피하는 법'을 가르쳐 주곤 한다.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들이 나서서 '초과지출을 피하라'든가 '가족과의 말다툼 예방을 위해 민감한 주제를 피하라'는 등의 조언을 하지만, 이들도 그 와중에 열심히 선물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출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37851)

이 기사 중 특히,
“돈도 돈이지만, 매년 같은 사람에게 다른 선물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부분에 주목하게 되면서,
나는 동시에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억해내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약간 철 지난 느낌이지만,
앞으로 설날도 다가오니 이런 글을 쓰는 게 그리 큰 결례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위 기억과 더불어 선물 일반에 대한 생각들의 파편들이
허공중에 분분히 날아오르니,
마침내, 되는대로 이들을 포집하여 기록으로 남겨 둘 생각이 들었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단편은 거의 대부분은 한번쯤 읽어 보았을 것이다.
내용은 짧고 단순하지만, 대개는 일순간 응축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잠깐 내용을 일별한다.

아주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두 부부는 고민에 빠지고 만다.
선물을 살 돈이 없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날,
남편은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물려 내려오던 금시계를 팔아,
부인에게 줄 고급 머리핀을 준비한다.
한편 부인은 자신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에게 선물할 시계 줄을 장만한다.

남편이 선사한 머리핀을 꼽을 부인의 머리칼은 이미 잘라져 없어진 상태,
부인이 선사한 시곗줄 역시 이미 시계가 팔아 없어졌기에 무용의 것이 되고 만다.
부인은 머리카락은 금방 자란다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런 부인을 남편은 꼭 안으며 사랑을 확인한다.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미국인은 전년도와 다른 선물로 무엇을 준비할까
고민하는 2차적인 의미의 스트레스가 문제가 된다.
하지만, 오 헨리의 단편소설에서는
당년도의 선물조차 장만할 수 없는 가난이 1차적인 고민의 원천이다.

소설은 퍽이나 감동적이다.
그런데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동을 제공한 저 소설의 설정이
다음 해에도 유효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뉴스 기사처럼 선물 선택에 임하는 고민이 매년 되풀이 된다면,
저 소설 속에서 감동을 생산한 주체들 역시,
내년엔 또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독자들 앞에서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양자는 독자들 앞에서 공평할 테니까.

소설 속에서의 두 부부는,
명년에는 그나마 팔 시계도 없다.
부인의 머리카락이 다 자란다한들,
매년 머리카락을 잘라서 애정을 확인하기 위한
소품으로 충당할 기력이 남아 있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것이다.

혹자는 이러리라,
내년에는 그 부부도 돈을 좀 벌었을 것이라고.
이런 설정은 문제를 비껴가는 것이지 지금 제기한 의문을 풀어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소설의 감동은 ‘가난과 사랑’이 한데 묶여 있기에 산출되었다.
그러하니 가난을 제거해버리면 아예 감동 생산의 근거가 와해되어 버린다.
따라서 가난의 탈피는 결국 소설의 구성조건, 효과장치를 허무는 짓이 되고 만다.
이는 곧 독자의 감동까지 부정해버릴 위험이 있는 것이다.

잊지 말자.
나는 지금 소설 독자들이 목격하고 있는 바로 그 한 칼로 절제된 ‘감동’에 집중하고 있다.
가난한 이가 열심히 일해서 부자 되는 따위의 도식은
이 현재적 감동 생산과는 일차적인 관련이 없다.

만약 저 감동이 누군가의 가슴을 진하게 강타하였다면,
미국 사람들이 매년 되풀이 되는 스트레스에 노출되듯이,
소설속의 부부들도 가난이란 일상의 조건 밑에서
독자들에게 매년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성실히 답해야 한다.
그러함으로서,
저 감동이 단지 당년도에 그친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효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미국 사람들이 비록 스트레스에 놓여 있다한들,
크리스마스 선물 주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듯이,
소설 속 주인공들도 독자들에게 그 감동의 지속성을 확인시켜주어야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작업에서 저들 부부가 실패한다면,
저 소설의 감동은 상당히 제약적인 것이 되고 만다.
당년도에만 유효한 감동이라면,
마치 길 위에 버려진 알사탕 껍질을 쳐다보는 어린 아이처럼,
제법 허전하고 아쉬워할 독자가 있다는 것을 저들 부부는 알아채려야 할 것이다.

단편소설이란 그래서 무책임하다.
단편이란 허울을 뒤집어쓰고,
압축된 감동의  폭탄을 선사하고는,
이내 뺑소니를 치고는 뒤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

하기사, 저들 부부가 독자에 대한 책무를 다하기 위해,
영원히 가난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일방 주문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그렇다고 작가 오 헨리에게 묻는다한들,
그는 아마 답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가 성실하지 않아서라기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그 역시 내놓을 책무는 없지 않은가?
그는 더욱이 책을 팔아먹고 이미 손을 털지 않았는가 말이다.
역시,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은 각자가 자신의 삶 안에서 입증해야 할 뿐이다.

그렇다한들,
내가 지금 제기한 감동의 시간제약성, 지속성 등의
유효성 일반에 대해 제기하는 의문들은 충분히 가치 있다.
한마디로 나는 ‘소비되고 마는 감동’에 제동을 걸어보았던 것이다.
감동이란 상품이 되어서는 아니된다는 나의 순결은 이런 의문을 유발한다.
오 헨리는 이런 상품을 팔고 나선 근 100년간 침묵하고 있다.
물론 이제껏 나 말고는 아무도 묻는 이도 없었다.

조금은 사선으로 비틀어버린 이런 이야기 프리즘을 통해,
오히려 감동의 진실성을 제대로 점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천편일률적인 소비형 감동, 공산품 같은 감동이 아니라,
나만의 주관적인 감동이 필요하다.
하긴 감동이란 것이 원래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감동까지 마트에 진열된 상품처럼 획일적으로 구매할 수는 없다.

나는 그래서 묻는 것이다.
저 오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유발하는 감동은 구조속에 갇힌 아름다움을 초월 할 수 있는가?
오 헨리라는 소설 구조 말이다.
그것도 그 짧은 단편이란 형식 속에서.

이 이야기는 문제 제기 수준인 이쯤에서 끊고,
다른 측면에서 선물 이야기를 마저 더 해보자.

선물은 받는 사람이 행복할까, 주는 사람이 행복할까?
오마이 뉴스 기사속의 미국인들이라면,
주는 사람보다는 분명히 받는 사람이 훨씬 행복할 것이다.
선물을 받을 때는 잠깐이라도 나는 미국 사람이고 싶어라.

선물을 주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것은 과연 불행의 단서일까?
물론 부분적인 부담이겠지만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성실하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선물이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한 진심의 것이 아니라,
모종의 획책하는 바, 숨은 뜻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선물이 아닌,
뇌물, 촌지, 거래 따위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 경우에 비춘다면,
저 미국사람들의 스트레스라면 차라리 즐거운 스트레스라 불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뇌물, 거래를 하는 이들은 도리어 심히 긴장된 압박감, 불안감에 놓일 것이다.
혹은 내심 야비한 웃음을 지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는 최근에 생각지도 않은 분으로부터 과분한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기대하지 않은 선물은 기쁨을 증폭시킨다.
이게 선물의 동역학(動力學)적 효과다.
심리학적인 게 아니다.
(※ 참고 글 : ☞ 2008/02/18 - [소요유/묵은 글] - 예측술(豫測術) - ①/②)

선물의 효과를 유발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선물의 가치와 급부주기(給付週期)가 그것이다.
(※ 급부는 사실 채무자의 의무부담행위로 해석될 위험이 있어 그리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러한 법률용어가 아닌 그저 '준다'는 단순한 의미로 사용하기로 한다.
사실은 선사(膳賜)라고 해야 할 터인데, '선사주기'라는 그리 익숙한 말이 아니라 이리 둘러간다.)
가치는 ‘뜻’과 ‘가격’의 균형이 중요하다.
나는 여기서는 주기(週期)에 대하여만 말하기로 한다.

주기(週期)란 선물을 주는 빈도라고 바꿔 말해도 좋겠다.
기사대로라면 미국 사람들이 일 년에 한번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선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지만, 뭣 그거 하나 때문에만 그러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만약 일 년에 한번인데도 스트레스가 유발된다면,
두 번이면 어떨까? 세 번, 네 번 .... 열두 번이면 스트레스가 더할까?

역설적이게도 선물 주는 빈도가 많아질수록 스트레스는 오히려 적어진다.
그렇지 않은가 일상적인 일인데 언제까지 긴장할 텐가?
선물 주는 기술도 나날이 발전할 테이고, 나름대로 요령을 부리지 않을까?

원래 선사(膳賜)란 남을 의식하는 행위이다.
요즘은 그저 가벼운 마음의 표시 정도가 대세이나,
본디 선물의 역사적 기원은 예물(禮物)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의를 차리기 위한 것이니 여기엔 일정한 의식이 따르고,
정성스런 뜻이 엄정히 드러나야 했다.

그런데 만약 빈도수가 많아지면 어떻게 될까?
당연 마음의 표시가 가벼워지고,
정성스런 뜻이 엷어지고 만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게 아니라 아예 물리학적인 결론이다.

받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다.
심드렁해지고 만다.
의당 그러려니 하고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게 된다.

김진홍이란 사람이 있다.
개신교와 수구보수의 견련성(牽聯性)을 더듬어 갈 때,
앞에 선 무리 중에서 처음에 만나게 되는 사람이다.
반대로 개신교의 현재를 고민하는 인사들에겐
늘 안타까움의 표본이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한 때 빈민구제 운동을 할 때의 이야기라고 들은 적이 있다.
빈민들에게 밀가루인가 구호품을 나눠주곤 했는데,
나중엔, 언제부터인가 왜 주지 않느냐고
도리어 따지듯 대드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그만이 겪은 유별난 사건이 아니다.
내가 지금 논하고 있는 급부주기(給付週期), 또는 보급주기(補給週期)가 밭아져
거의 일상적 수준에 이르게 되면,
이미 그것은 구호도, 선물도 아니요, 당연한 권리가 되고 만다.

이 때, 그들을 구태여 나무라는 수고를 지불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것을 짐작하지 못하고
급부주기를 조절하지 못한 '주는 사람'의 책임을 다스려야 한다.

그런데 여기 묘한 배면의 진실이 숨어 있다.
수급자(受給者)는 자신이 당연히 받아야 되는 것으로 알게 되고,
급부자(給付者)는 자신이 베푸는 자의 위치로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이런 지경에 이르르면,
본래 의미의 선물, 구호를 매개로 맺어진 아름다운 관계가 파괴됨과 동시에,
둘은 모두 시궁창 속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받는 이는 비굴해지고,
주는 이는 교만해지고 만다.


전락(轉落)의 공식은 이리 선명하다.
두려운 일이다.

만약 말이다.
이런 공식을 전제로,
무엇인가 꾀하는 뜻을 뱃속에 꾸겨넣고,
적극적으로 행함을 펴는 이가 있다면,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니겠는가?
실제 이런 이들은 생각보다 적지 않다.

주는 이가 교만해지는 만큼 상대는 비굴해지고,
상대가 비굴해지는 만큼 주는 이의 교만은 자란다.
이쯤 되면,
이것은 그저 거래로 전락하고 만다.
거래란 무엇인가 이(利)를 꾀함이 아닌가?
하나를 주고 둘을 취하고자 하는 셈법 산술이 아닌가 말이다.
선물을 주면서 이익을 꾀하고 있다면,
그것을 어찌 선물이라고 부를 수 있겠으며,
구호품을 전달하면서 도모하는 숨은 뜻이 있다면,
이를 어찌 자선이라 이를 수 있으랴.

하니까, 선물 또는 구호품을 매개로,
받는 이는 자신의 등을 상대에게 내주며 비굴함의 디딤돌이 되기를 자청하고,
주는 이는 제 코를 교만이란 갈고리에 꿰어 하늘에 매달아, 한껏 죄악을 기른다.
둘 다 상대에겐 치명적인 독이 되고 만다.

그러하기에 불교에서는 무상보시(無相布施)를 말하고,
(※ 참고 글 : ☞ 2008/09/02 - [소요유] - 시불망보(施不望報))
기독교에서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이리 말씀하고 있음이 아닌가?
물론 이 양자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는" 예정과 기대는 유상(有相)인 한에 있어서 불교와 근원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도 최소한 세속에서는 무상(無相)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하니, 내 이르노니,

받는 이는 받는 것을 즐기지 말 것이며,
주는 이는 주는 것을 즐기지 마라.

내가 말하고 있는 지점은 지금 ‘급부주기’에 미치고(及) 있다.
급부주기가 공연히 밭아 잦아지면,
바로 이런 허물에 빠지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하니 심히 경계하여야 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주어지는 선물에서는
급부주기가 무한대이다.
이 때 뜻은 최대로 드러나고,
받는 이의 기쁨은 종달새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이런 작용이 일어나는 현장엔
교만도 비굴함도 설 자리가 없다.

친구를 사귐도
 
'뜻'을 같이 하고,
'정'을 나눔에 있는 것이지,

거래를 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술로, 돈으로, 선물로 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
혹, 시쳇(時體)말로 인맥을 키워 이문을 남길 수는 있겠지만.

'선물'로 친구를 살 수는 없지만,
'덤'으로 손님은 만들 수 있다.
'선물'과 '덤'은 다르다.
그리고 친구(사귐)와 '거래 또는 장사'는 하나가 아니다.
자꾸 이야기가 가지를 치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끊고,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친구라는 뜻을 키우는 제법 운치 있는 중국말이 있다.

구우(舊雨),
신우(今雨).

오래된 친구,
새로 사귄 친구.

창밖에 비는 나리시고,
내 가슴엔 친구가 빗소리 타고 찾아든다.

다시 챙긴다.
지금 나는 물리학적인 급부주기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이다.
급주주기를 공연히 짧게 하면,
본래의 뜻이 어그러지고,
종내 죄가 잉태된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앞에서 미국인들의 스트레스는 성실성의 징표라고 말했다.
최소한 이들은 무엇을 줄까 고민이라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성실한 뜻이 영그는 시간이다.

급부주기가 짧으면,
덩달아 급부물의 가치가 떨어지고,
교만은 자라고, 비굴함이 잉태된다.

그러하니,
나는 차라리
선물을 주지도 않고,
선물을 받기도 사양하는
그저 담담한 사람이 되고 싶다.

받는 자리에서 상대의 교만을 키우는데 부조하는 이가 되고 싶지 않고,
주는 위치에서 상대의 비굴함을 구매하는 교활한 이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신불(神佛)이시여,
저로 하여금,
비굴하지도 않고,
교만하지도 않게 하소서.

그러하니,
누군가 내게 선물을 주지도 말고,
거꾸로, 나로부터 선물을 기대하는 사람도 없기를 바라노라.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어져야 할 내용을 잠깐 소개만 한다면 이러하다.

선물하면,
'덤' 그리고,
왕망(王莽)의 이야기를 더 보태야 완결된다.
그의 위선적 행동이라면,
그 철저함에 차라리 교만도, 비굴함도 부끄러워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땅속에 잠겨버리고 말리라.
위선으로 황제의 꿈을 지핀 사나이,
선물은 거대한 위선임을 입증한 왕망 그를 생각해본다.

각 지방 자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도 나오지만,
김주영의 ‘아라리 난장’에는 보다 더 자세히 나온다.

“순천 가서 인물자랑 말고, 여수 가서 돈자랑 말고, 벌교 가서 주먹자랑 말고,
진도 가서 글씨자랑 말고, 강진 가서 양반자랑 말고, 고흥 가서 노래자랑 말라는
야그 못 들었는가 보네이?”

선물 자랑은 왕망 앞에서 감히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그로서 나라 하나를 절취(竊取)한 사람이다.

돈 자랑, 계집 자랑, 좆 자랑은 말라.

라는 우리나라 속담도 있다.

나는 여기에,

선물 자랑 하지 말라.

하나를 더 보태련다.

아니, 그런데 요즘 왜 이리 내 글에 좆이 자꾸 등장하는가?
‘고자좆’ 같은 일이구먼.

아마도 '덤', '왕망'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번에 틈을 내어 자리 깔고 다시 제대로 이어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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