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소요유 : 2008.12.30 19:03


예전에 쌀가게에 가면 쌀을 계량하는 도구로 되(升)와 말(斗)이 있었다.
이들은 그릇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각기 계량 단위 명칭이 되기도 한다.

사람 이름자에 두(斗)자가 들어 간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는 그처럼 넉넉히 살라는 기원이 담겨있음이다.
이름을 지어놓고는 절로 배가 불렀을까?
쌀이 말들이 통에 그득 담긴 모습이라니,
생각만 해도 퍽이나 흐뭇했으리라.

'되'는 대개는 육면체, 말은 원기둥 형상이되 모두 나무로 만든다.
둥그런 것보다는 사각형의 것이 제작이 수월했을 텐데,
'말'은 원기둥으로 만든 것을 보니 무엇인가 숨은 뜻이라도 있었을까 싶다.
아마도 천원지방(天圓地方), 음양(陰陽)을 고르기(調和) 위함이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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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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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흔히 말하는 됫박이란 정확히 말하면 사각형의 본디 '되'와는 구별된다.
이는 '되'가 없을 때 박(바가지)으로, 그를 대신하곤 했는데, 이를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게 요즘은 본디 '되'를 지칭하는 쓰임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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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됫박)

‘되’보다는 ‘됫박’이 어세가 강하기 때문에 속되게 자주 표현다보니,
이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
그에 비해 ‘쪽박’은 작은 바가지를 뜻한다.
‘박’이라는 게 그 쓰임이 무엇을 담는 그릇에 적합하니,
이리 우리네 생활, 그것도 먹는 것에 관계되는 말에 가까이 밀착해 있는가 보다.

예전에, 쌀집 또는 싸전이라고도 부르는 점포를 가보면,
둥구미에다 갖은 곡식별로 넣고는 바닥에 죽 늘어놓고 팔았다.
한쪽 켠에는 쌀가마니가 높이 켜로 쌓여져 있기도 한데,
집안 살림이 넉넉한 사람은 가마니 째 사들이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한 되, 두 되 이런 식으로 사먹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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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구미)

이리 말하면 혹여 나를 아주 나이 많이 먹은 노인네로 오해하겠지만,
결코, 이게 그리 먼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그저 종달음질 쳐서 정신없이 앞으로만 달려들 가느라고,
불과 20-30년 전 일상들을 역사의 어둠속으로 밀어 넣기 바빴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꾸로 역사의 미아가 되고 말은 것이다.

세대 간 역사를 공유하지 못하고,
당대의 현실을 벼랑처럼 깎아 과거와 분절(分節)하는 우리 네 삶이란,
각박하다기보다는 내겐 차라리 싱겁게 느껴진다.
너무 싱거워 맥이 다 풀린단 말이다.
머리만 발달되고,
잇속만 밝히는데 이골이 났지,
실제론 정이 다 헤져버렸다.
도대체 인간미가 남아 있지 않아,
가슴에 간간한 맛이 깃들여져 있지 않다.
그러하니 그저 싱건지들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모두들 그리 시끄럽게 악을 쓰는가 싶다.
예컨대 요즘 대중음악들은 절규하듯 소리가 그악스럽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저들이 저게 신나서 그런 게 아니고,
어디 마음을 걸쳐 의지할 곳이 없어져, 너무 허전하고 막막해서 저런가?
이게 역사가 분절돼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끄럽다기보다 외려 안쓰럽고 가여운 것들이 아닌가?
이런 생각들을 굴려보곤 한다.

어렸을 때 거기 쌀집에 가서 구경하면 제법 재미가 있었다.
힘이 좋아 보이는 쌀집 주인은 커다란 말(통)을 능숙하게 좌우로 기우리며
쌀을 퍼 담는데, 이 때 반쯤 벗은 어깨께로 허연 김이 뭉글 솟아오르곤 했다.

'되'든, ‘말’이든 매한가지지만,
여기 퍼 담은 맨 위를 평미레 또는 평목이라 부르는 밀대로 깎아내게 된다.
이는 퍼 담은 쌀이 '되', 또는 ‘말’ 위로 소복이 싸인 것을 맨 위 ‘전’을 기준으로
평평히 밀어내 계량을 맞추기 위함이다.
(※ 전 : 물건의 위쪽 가장자리가 조금 넓적하게 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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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미레)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퍼 담을 때는 고봉(高捧)으로 양껏 높이 솟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손님이 지켜볼 때, 일단은 넉넉히 인심을 써서, 퍼 담는 인상을 주는 것이
나중이야 어떻든 일단 연출 목적상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봉으로 넘치게 퍼주면 주인은 이문을 남길 수 없다.
그래서 재주를 부리게 되는데,
평미레로 쓱하니 고봉을 벗겨가며 밀어내다 끄트머리쯤에 이르러서는
손길을 탁 멈추면서 조금 남겨두게 된다.
야박하게 끝까지 싹 밀어버리면 계량이야 제대로 된 것이지만,
지켜보는 손님에겐 참으로 인정머리 없게 느껴질 것이 자명한 노릇이다.

평미레가 '되' 위로 죽 미끄러지는 내내,
주인과 손님은 서로 무심한 듯 의뭉을 떨지만,
은근히 곁눈질로는 저 평미레가 딱 멈추는 지점을 두고는
재미있는 심리게임을 즐긴다.

노련한 주인은 게임에서 진 듯이 보이되,
실인즉 별로 손해날 것이 없는 연출을 훌륭히 해낸다.
그게 무엇일까?
평미레로 가만히 밀어가다,
마지막 부근에 가서는 약간 사선으로 비틀어 마치는 것이다.
그러면 한쪽 편은 적게, 다른 편은 많이 남게 된다.
서툰 이는 이것을 ‘전’의 한 변과 나란히 되게 마감하고 만다.
하지만 이리 사선으로 두게 되면 주객을 동시에 만족 시키게 된다.
객은 많은 쪽을 눈여겨 두고 많다고 느끼고,
주인 쪽은 적은 쪽을 맘에 두고 조금 주었다고 느끼게 된다.
어차피 사람들은 다 알면서도,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그에 기대어 만족을 느끼는 동물이니까.

설혹 손해가 났다한들,
주인은 이미 다른 곳에서 이(利)를 챙겼다.
말에다 쌀을 퍼 담을 때, 휙 빙그르르 돌리면서 쌀을 모로 세웠기 때문이다.
익숙한 이는 말통을 교묘히 회전시키면서 그 안에 들어갈
쌀들을 곧추세우며 정렬시키는데,
이러면 공간 구조상 쌀알이 서로 최대한 버티고 자리 잡기 때문에
빈 공간이 많아지고, 이는 결과적으로 쌀들이 통 안에 적게 들어가는 셈이 된다.
반대로 쌀을 사들일 때는 통을 바닥에 탁탁 치면서 담게 되면,
쌀이 눕혀지면서, 빈 공간 없이 차곡차곡 겹쳐 조금이라도 더 담기게 되는 것이다.
뭐, 내가 쌀가게를 운영해 본 것이 아니고,
예전에 어른들로부터 많이 듣던 얘기라,
재미있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제법 기술적인 것이지만 말이 나온 김에 번거롭지만 하나 더 덧붙인다.

평미레로 밀 때 상인이 유의하여야 할 태도.

1. 평미레는 내 앞쪽이 아닌 상대 쪽으로 밀어라,
   그래야 손님 쪽으로 최종 남겨진 부분이 위치하게 된다.
2. 사선으로 남길 때 됫박을 모로 틀어 많이 남겨진 부분을 손님 시선 쪽으로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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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정작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정확한 계량을 넘어선 평미레 끝에 남겨진 저 한 움큼의 쌀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남겨진 것을 부르는 말이 뭐라 별도로 있을 듯싶은데,
나는 아직 확인을 하지 못하겠다.
우선은 ‘덤’이라고 부른다.
원래 덤이란 원본과 분리된 독립체라야 제대로 어울리는 표현법인데,
예로 든 '말' 통에 든 쌀 같은 경우엔 가분성이 명확치 않아 조금 어색하다.
하지만, 뜻이야 어긋날 바 없으니 이 자리에서는 그냥 빌려 쓰기로 한다.

정작은 용어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앞에서 허공중에 풍선처럼 띄어 올린,

“정확한 계량을 넘어선 평미레 끝에 남겨진 저 한 움큼의 쌀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명칭이 무엇인가 물은 게 아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이리 묻고 있음이다.

한 되, 한 말에, 얼마 이리 정해졌건만,
평미레 끝에 남겨진 ‘덤’이
싸전 안의 주객 사이에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객은 조금 더 받았다는 ‘공짜심리’가 짭짜르하니 혀끝을 타고 흐르니 흐뭇하고,
주인은 인심을 썼으니, 다음번에도 잊지 않고 나를 기억하며 다시 찾아오겠지,
하는 달콤한 ‘기대심리’가 책상 위에 놔둔 때 묻은 주판알처럼 떼구루루 머릿속에서 구른다.

결국 저 몇 푼도 되지 않을 한 움큼의 ‘덤’은 주객을 끈끈하게 맺어주는 매파(媒婆)다.

내가 예전에 목동아파트에서 살 때, 가까이 재래시장 하나가 있었다.
거길 가면 오래된 연립 처맛기슭 밑 한 뼘 남짓 공간을 이용하여,
줄행랑처럼 주르르 잇대어 무허가 점포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점포 하나가 유독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이다.
주인 할머니가 야채를 팔고 계셨는데,
이 분이 ‘덤’을 꼭 챙겨 주셨다.
봉투 안으로 듬뿍 한 움큼 더 집어 넣어주시되,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조금 더 집어서는 한 번 더 넣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꼭 덤을 두 번씩 주시는데,
그게 음양 박자가 잘 맞아 떨어졌던 게 인상 깊었다.
그런데, 덤을 하나가 아니라 짝으로 맞추어주라는 것은,
내가 진작에 어느 일본 소설에서 읽었던 것이었기에,
당시 자못 놀랐던 기억이 나는 것이다.

이웃 상인들과 견주며,
유심히 관찰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그 할머니 외에는 그런 상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그 당시 부러 처를 졸라 시장을 함께 가서는
그 점포를 들러 푸근한 그 할머니의 지혜를 보며 즐겼었다.
늘 손님들로 북적이던 거기, 그 할머니가 아직도 계실런가?

장구도 유심히 보면, 좌우의 크기가 각기 다르게 만들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작은 것은 양(陽), 큰 것은 음(陰)을 상징하는데,
소리 역시 그에 따라 달리 난다.
좌우의 음양을 함께 가지고 있는 장구는
그래서 단순한 북하고는 사뭇 격이 다르다.

“덤도 하나로 그치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이게 아주 중요한 소식이다.
정작 내가 이 글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요체가 바로 이것이다.

그것 역시 장구처럼 음양을 고루 갖춰야 효과가 난다.
하나는 큰 것, 하나는 작은 것
이리 음률을 고르게 되면,
‘덤’은 이제 그저 단순한 '인심쓰기', '선심공세'가 아닌 게다.

"기어히 소리가 난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다."

딸랑 딸랑 하는 은방울 소리가 난단 말이다.
하나는 손님 가슴에서,
하나는 주인 손에서
소리가 난다.

됫박에 담긴 쌀의 경우에는 성질상 덤을 하나 더 추가하기 어렵지만,
나는 이런 상인을 본 적이 있다.
평미레로 밀고 남은 ‘덤’은 보통의 상인이면 다하는 것이지만,
봉투에 담고 나서는 손으로 한 움큼 더 집어넣는다.
그 손아귀에 얼마만큼 더 들어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2차적 재현’이란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내가 지금 애기하는 “덤은 쌍이어야 한다.”라는 이론에 걸맞다. 

덤 하나로 불러 일으킨,
상대의 조그마한 만족감을,
재우쳐 틀어잡고 한번 더 흔드는 저 오묘한 기술이라니.
이 이치를 터득하면 천하의 재상(才商)이 되리라.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

이 이론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stock과 flow의 개념을 이끌어 보아도 그럴 듯하다.
즉 됫박에 든 원물(元物)이 아니라, ‘덤’이
‘재방문’, ‘재구매’ 등의 재현력 크기를 결정하게 된다.

전번 글에서 다룬
(※ 참고 글 : ☞ 2008/12/28 - [소요유] - 선물(膳物))
‘선물’을 ‘loving’에 비견한다면,
뇌물은 ‘leveraging’ 또는 ‘hedging’을 꾀하는 장치라 하겠다.
이에 반해 '덤'은 순수한 ‘leveraging’을 일으킨다.

고 조그마한 덤이 수배의 효과를 유발하는 것인데,
지렛대 치고 가히 천하에 이보다 더 야무지고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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