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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先生)과 후생(後生)

소요유 : 2009. 1. 1. 22:54


중국 고대의 제왕은 먼저 하(河)에 제사를 지내고, 이어 바다(海)에 제사를 지냈다.
(三王之祭川也,皆先河而後海,或源也,或委也,此之謂務本。- 禮記·學記)

여기서 하(河)는 황하(黃河)를 가리키는데,
중국 고서에 이와 더불어 강(江)이란 글자도 자주 등장한다.
강(江)은 곧 장강(長江)을 뜻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양자강(揚子江)은 실제로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양주(揚州) 근처에 있는 양자교(揚子橋)를 서양인들이 배를 타고 들어와서는
‘이 곳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이에 중국인이 무심코 ‘양자’라고 답한 것을
강 전체의 이름이 양자강이라고 오해를 한 것이다.
이래로 장강이 양자강으로 둔갑을 하여 외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거꾸로 저들 중국인들조차도 양주 근처의 강을 양자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각설하고,
하(河)에 먼저 제사를 지내고, 이어 바다(海)에 제사를 지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야 당연히 강이 바다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선하(先河)란 말도 생겨났는데,
이는 그 근원을 더듬어 맨 앞이란 뜻이니,
곧 시작, 효시란 의미를 갖는다.

이제, 선생(先生)이란 그럼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본다.
자의(字意)대로 새긴다면 먼저 생긴 사람이란 말이 된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니?
그럼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선생이 되는가?
그것은 아니다.
단지 나보다 먼저 태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은
장(長), 즉 연장자(年長者)라 이르지 선생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니, 선생이란 분명 단순히 몸이 먼저 태어난 사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하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정신이 나보다 앞 선 사람이다.”

이 때래서야, 선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새겨볼 염치가 생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선생이란 teacher 즉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란
의미가 중심 가치를 이룬다.
나아가, 소위 지식인 또는 전문가 등을 부르는 호칭으로 외연확대가 되어 있다.
이즈음엔 그도 넘어 그저 성인 남자에 대한 존칭으로까지 쓰임이 확장되어 버리고 말았다.

옛날 과거시험에서는 자기가 치룬 시험 답안(考卷)을 채점을 해 줄
시험관(試驗官)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 고려시대 지공거(知貢擧)의 例가 이에 해당된다.)
급제자(及第者) 즉 합격한 사람들은 그 시험관을 노사(老師)라 부르고,
평생 사제관계를 맺고 스스로 문생(門生)으로 자처했다.

이러한 풍토였기에 그저 시험에 붙고 아니 붙고가 문제가 아니라,
시험관이 자신의 일평생을 학문적으로, 인간적으로 이끌어줄 인격이 아니라면,
이건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일단 급제를 하면 그 시험관하고는 사제지간의 끈으로 강하게 묶여버리니,
이게 나중에 파벌을 조장하는 폐단도 생기게 되지만,
만약 시험관이 학문이 높고, 인격이 고매한 분이라면,
평생을 의탁하여, 믿고 따르며 배움을 돈독히 하는 바람직한 관계가 형성된다.

선생(先生)이란 바로 이런 관계 하에서 그 의미를 다시 뜯어 새겨볼 수 있다.
活到老, 學到老 (활도노, 학도노)란 말이 있다.
이는 늙어 죽을 때까지 학문 또는 배움을 계속한다는 뜻이다.
학문이라는 것이 학교 다닐 때만 하고 말 공부가 아니라,
평생을 두고 계속하여야 하는 것이라면,
선생이야말로 이런 분의 표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학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분야에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부여잡으면서,
평생을 탐구하고 배움을 지속하는 사람이라면 이 역시 곧 선생인 것이다.
그러하니 이는 곧 학자(學者) 즉 ‘공부를 하는 사람’이며,
工夫(공부,쿵푸)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길에 새로 든 사람은 후생(後生)으로서,
이미 그 길에 들어 훨씬 앞장을 서서 가고 계신,
그 분 선생(先生)을 우러러 믿고 따르며 본받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이르러서 어찌 나이의 앞서고 뒤섬이 문제가 되겠는가?

오늘날 한국에서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이르는
선생이란 그러하므로 영어에서 말하는 teacher란 의미의 교사(敎師)라 불러야 옳지,
본래의 의미인 선생(先生)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내가 말하는 선생(先生)이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외려 공부하는 사람인 것이니,
요즘의 교사를 무릇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폐(語弊) 즉 언어적 폐단이 사뭇 크다 하겠다.

선생(先生)이든 후생(後生)이든 모두 학생(學生)인 것이다.
즉 배움의 도상에 선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러하기에 活到老, 學到老 (활도노, 학도노)인 것이다.

만약, 배우기를 그친 사람이라면 이미 그는
선생(先生)도 아니요, 후생(後生)도 아니며, 학생(學生)도 아닌 것이다.
심하게 얘기하면 사람으로 부르기 심히 주저되는 것이다.

그러하니, 내가 후생(後生)으로서
존경할 선생(先生)을 만난다면 일생의 영광인 것이다.
이는 단지 가르침을 청할 분을 가까이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직접 가르쳐주시지 않는다한들, 내가 가고자 하는 길(분야)을
오로지 평생을 연구, 실천하며, 배움을 지속하고 분이 계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며 그저 존경스러운 게다.

나는 오늘 그런 분을 가만히 헤아려 본다.
버려진 동물에게 따뜻한 사랑을 나눠주시는 어떤 분을 기억한다.
이 땅에서는 그게 오히려 허물이 되기도 하며,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분은 동물에게만 머무르시지 않는다.

산, 강,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가진 분.
그리고 눈이 푸른 사람만이 간직하고 있는 올곧은 ‘항거(抗拒)’,
그렇다, 만주벌을 누비던 ‘독립정신’을 철지난지 오랜 지금도 지닌 분.
그가 벌이는 ‘항일독립전투’는 그래서 아름답게 빛난다.
불의에 저항하는 그가 그래서 존경스럽다.

나는 오늘,
그 분을 생각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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