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아피즘(priapism)
10여 년 전 IMF가 나라 경제를 접수하는 지경에 처하자,
온 나라는 그야말로 난리통이 되었다.
이 때, 북한산에서 일어났던 이야기 하나를 꺼내들며 글을 시작해본다.
칼바위능선이라고 제법 날카롭고 험한 능선이 있다.
이곳으로 오르는 길목은 내가 사는 곳과 가까워,
나는 자주 이 경로를 따라 등산도 하고,
때로는 시간이 없을 때는 기슭까지 산책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장비가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돌계단을 설치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바퀴가 고무로 된 캐터필러(caterpillar)형 운반기가 돌들을 실어 산으로 날랐다.
저들은 맨 아래 입구부터 사뭇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철도 폐침목 또는 돌로 계단을 쌓았다.
구간을 나누어서 작업을 하는 것이지만,
통상 댓명 정도 되는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무거운 돌을 나르며 일을 했다.
아주머니 일꾼도 둘 정도 섞여 있었는데,
그 곁을 지나다니는 것이 공연히 폐가 될까 싶어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 칼바위 능선 경로는 집에 가깝고, 당시 사람도 적어 나는 이곳을 주로 이용했다.
그런데, 저들이 계단 공사를 끝내고 나서부터 나는 그곳을 거의 찾지 않는다.
왜 그럴까?
저들이 돌계단을 쌓고 나서부터,
오르내리는 것이 오히려 힘이 더 드는 것이라면
차라리 운동이 더 잘되겠거니 하고 참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계단 길을 오르내리는 것이 무릎에 부담이 많이 되어,
저것은 운동이 아니라 외려 건강을 해칠 위험이 있게 된 것이다.
실제 아주머니들은 무릎이 아프다고 투덜대곤 한다.
계단 오르막길은 주로 무릎 관절을 혹사시킨다.
보통의 등산길에서는 무릎, 발목, 고관절, 허리 등의 관절, 근육을 고루 쓰게 되나,
계단은 무릎이 대부분의 체중을 부담한 채, 중력을 버텨 올리는 운동을 하게 되므로,
당연 무리가 따르고 때로 통증까지 수반하게 된다.
게다가 그 긴 길을 무료하게 계단을 타고 오를 일이 있겠는가 말이다.
이것은 등산이 아니라 차리리 노역에 가까운 일이 되고 만 것이다.
때로는 흥이 나서 주르르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고,
뒤꿈치를 들고 발끝을 세워 끙끙대며 오르막길을 오르다,
꼭대기에서 이마를 스치는 산바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얼마나 행복하였단 말인가?
산길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
노래 곡조를 즐기듯 자연스런 산길 따라 오르내리고,
때로는 쉬며 산과 더불어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이것은 그저 ‘오르는 것’ 하나,
이 기능적인 ‘일’로 환치돼버리고 만 것이다.
이를 기획한 저들 관리를 나는 지금도 혐오한다.
앞으로도 저들 패악질을 잊지 못할 것이다.
멀쩡한 산 하나를 버려버린 것이다.
그렇듯, 계단을 쌓고 나서부터는 고개를 숙이고
그저 무작정 위로만 올라야 했던 것이다.
상하 자연스러운 굴곡이 모두 없어지고 그저 오르기 일편으로 바빠지고 말았던 것이니,
이게 무슨 심술 사나운 폐단이란 말인가?
필경은 돈을 풀기는 풀어야겠는데,
머리가 굳은 행정관리가 착안한 것이,
그저 단순히 삽질하는 것이었으리라.
그즈음엔 산기슭을 사람을 동원하여 풀을 깎기도 하였는데,
그것도 아주 쓸데없는 짓이었다.
산에 풀이 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농작물을 심을 것도 아닌 국립공원 주변 산을 깎아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단 말인가?
경관만 해치고 말텐데도, 사람들을 풀어 풀베기를 할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모름지기, 그리고 마땅히, 산은 산다워야 한다.
산은 될 수 있는 한 사람의 손때가 묻으면 아니 된다.
그냥 산 자연 모습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최선이다.
혹간 산사태가 난다든가, 위험한 곳은 미리 조치를 하여야겠지만,
그 외의 곳은 그냥 산 본래의 모습대로 놔두는 게 원칙이어야 한다.
만약 계단이 없어 산에 사람들이 근접하기 어렵다면,
그냥 그대로 놔두면 된다.
왜 사람들이 계단 없으면 못 오를 곳을 굳이 올라야 하는가 말이다.
그런 곳은 그것대로 산의 본 모습인 것이지,
모든 사람이 아귀처럼 취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여력이 되는 사람이라면 제 손으로 덩굴을 그러잡던,
손톱을 갈퀴처럼 오그려 바위를 긁으며, 오를 테면 오르는 것이지,
턱도 없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긁어 모아, 떠밀듯 산에 오르게 할 이치가 뭣이 있는가?
지리산에도 아스팔트로 길을 낼 까닭이 어디에 있기에,
그 천하의 명산을 자동차로 타고 오르내리며,
시커먼 가스를 내뿜어야 하는가 말이다.
도대체가 그저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 통곡을 하고 말 일인 게다.
저 신령스런 산을 능욕하는 자들을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음이다.
그런데 말이다.
처음에 칼바위 능선에 계단을 쫙 깔고나서는 이게 얼핏 그럴듯하더란 말이다.
외양상 말끔하니 정비된 모습이니 그럴 상도 싶다.
돈을 처발랐는데 거죽이라도 보기 좋았으면 되었는가?
정작 실속은 하나도 없게 되어버렸다면,
도대체 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저 공사에서 이문을 챙긴 것은 공사업자 뿐인 것이다.
동원된 인부들이 돈을 벌었다지만,
만약 저 엉뚱한 공사를 보다 생산적인 곳으로 돌렸다면,
거기서 돈을 벌 다른 사람이 왜 아니 생기지 않겠는가?
만약 거죽이라도 좋게 하였으면 되지 않았는가 한다면,
그럼 거기다 보도블록을 깔아 치장이라도 하지 그러는가?
기왕이면 카펫이라도 깔 태세런가?
실제 북한산 국립공원 정릉 출입구변은 보도블록을 죽 깔았다.
물론 보도블록을 깔면 말끔해지고 다니기 편하다.
편한 것이 좋은 것이라면 왜 아니 정상까지 쭉 깔지 않는가?
차라리 에스칼레이터, 무빙워커를, 종내엔 케이블카를 설치하지 그러는가?
그러다간 산악 영상물, 집 안에서 편하게 구경하는 것으로 끝내고 말지,
힘들게 밖으로 나오길 왜 나올까나?
산에 들어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냥 산을 대하기 아닌가?
본연의 산, 순수한 산을 만나려고 드는 것 아닌가?
보도블록이 깔린 산을 그 누가 산이라 할 것이며,
부러 돌계단을 깔아놓은 산을 산이라 할 수 있음인가?
우리가 연말만 되면 늘 일상으로 목격하는 멀쩡한 보도블록 새로 깔기는 또 어떠한가?
이것을 보며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지만,
다해놓고 보면 깨끗해지고 한결 산뜻해진다.
당연히 돈 처발라 새로 단장하면 보기에 좋아진다.
하지만, 걷어낸 저 보도블록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저것이 흩뿌리는 공해는 누가 감당하여야 하는가?
멀쩡한 세금이 새는 낭비보다도
이 은폐된 부(負)의 경제, 환경공해를 생각하면 저것은 더도 덜도 말고 그저 악인 것이다.
마치, 칼바위 능선 길에 깔린 돌계단이 얼핏 그럴듯한 것처럼 보이지만,
저게 다 공해고, 산의 정기를 허무는 패악질인 것이다.
사대강 정비라는 것도,
시멘트 발라 그럴 듯이 해놓으면 처음엔 사람들이 입을 헤벌리며 말할 것이다.
“아, 강이 깨끗해졌어, 보기에도 사뭇 좋은데.”
“일이란 저렇게 하는 것이야, 역시 OOO야 대단해!”
“그렇게들 반대했지만, 나는 보기만 좋구먼.”
한철 놀라고 말뿐인 것을.
그뿐인 것.
그 후는 어찌 될 것인가?
콘크리트 물이 강에 녹아나 독이 다 빠질 때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이며,
그동안 물고기들은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물이 흙을 만나 자연스럽게 정화되던 것이,
이제는 매끄러운 시멘트 수로를 통과하며 썩어날 것이다.
시멘트 위에 수초가 자랄 수 있겠으며,
뚝방에 높게 자란 풀밭에 마주 앉아 순이 하고 속삭이던
그날의 추억은 어디에 가서 다시 찾을 것인가?
금빛 모래의 반짝임은 꿈에라야 다시 볼 수 있을런가?
우리나라 욕설 속담을 살펴 보면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많이 있다.
“얼굴에 생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놈이다.”
(※ 꾀가 많고 약삭빠른 이를 이르는 말)
“코 크다고 얻은 서방이 고자더라.”
이런 속담을 대하면,
마치 작금의 우리나라 형편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실소가 다 난다.
경제 경제하며 울부짖듯,
허겁지겁 엎어지듯 달려들어 내세운 결과,
고자 맞은 새색시 짝이 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
고자라면 차라리 얼마든지 참겠는데 말이다.
“자지 못된 것이 뒷동산에 가서 일어선다고”
밖에 나가서는,
“베잠방이에 좆 나오듯”
시도 때도 없이 삽질하자고 금수강산 온 산하를 찢어발기자고 하고 있질 않는가 말이다.
“물장사 십 년에 엉덩이짓만 남았다.”고,
하던 푼수가 어련할려고.
“열두 살부터 서방질을 했어도 배꼽에 좆 박는 놈은 처음이다.”라고
나 역시 짧다고 할 나이가 아니지만, 생전 처음 겪는다.
어지간히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씹질, 삽질에 여념이 없질 않은가 말이다.
부처의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중에
마음장상(馬陰藏相)이라는 것이 있다.
부처의 신체적 특징 중 하나인데,
음부(陰部)가 번데기처럼 졸아 들어,
말의 그것처럼 감추어졌음을 이르는 말이다.
애욕을 다 여윈 이가 그것이 무엇이 귀하랴.
하니 스님도 확철대오 제대로 깨우친 이는 벗겨놓아야 확인이 된다.
목욕탕에 가서 보되, 그것이 번데기처럼 줄어들어 안으로 감추어져 있으면,
그는 진짜배기이다.
허우대는 멀쩡하고, 그럴 듯이 큰스님 큰스님 하고 신도들이 떠받들어지는 이가,
당나귀 양물(陽物)처럼 큰 것 달고 왔다 갔다 하면 이것은 필시 가짜배기다.
아주 흉측한 놈인 게다.
절밥만 훔쳐먹는 가승(假僧)인 게다.
저 땡중 부자지를 쑥 잡아 빼내버려야 한다.
그 때라서야 비로소 천하가 태평하리.
여승도 마찬가지로,
월경이 끊겨야 진짜배기 스님이라 할 수 있다.
월사(月事)가 달마다 치루어지고 있는 이상, 아직 여인인 것이다.
마음으로 짓는 음심(淫心)뿐이 아니라, 몸으로 구하는 육욕(肉慾)도 여의어야 한다.
음욕(淫慾)이 남겨져 있는 이상 부처의 길에 들어갈 수 없다.
내 속세에 기탁하고 있는 이들이 모두 하나같이 마음장상(馬陰藏相)이 되라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발기하여 있는 소위 프리아피즘(priapism) 증상을 보이는 이들을 보면,
나는 ‘달래나보지’ 전설을 떠올리며
그 아슴프레 깔리는 애상(哀傷)에 젖어
잠깐 시름을 잊을 뿐,
허나, 그도 이내 잦히어, 그저 이 흉악한 현실이 막막하니 안타까운 게다.
(※ 프리아피즘 : 남성의 거기가 항상 서 있는 병, 발기 지속)
떳떳함이, 부끄러움이 없는 소치다.
저들, 프리아피즘(priapism) 도배(徒輩)들을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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