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책임을 져라.

소요유 : 2009. 1. 25. 18:59


권리와 의무는 외짝으로 작동되는 것도 있지만 짝으로 묶여져 있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친권(親權)은 권리이기도 하지만, 의무를 지기도 한다.
즉 친권의 대상인 자기 아이에게 상시로 밥을 주지 않는다면 친권 박탈 사유가 된다.
권리에는 이처럼 의무가 따르곤 한다.

반면 권리도 없으면서 의무만 지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국방의 의무는 권리는 없고,
보통의 한국의 남자들은 일방 병역(兵役)을 져야 한다.

고물할아버지가 그날 큰소리로 외치기를
‘내 개 내가 마음대로 하겠다.’라는 외침은 얼마나 대단한가 말이다.
(※ 참고 글 : ☞ 2009/01/22 - [소요유] - 진퇴유곡(進退維谷))
그는 권리를 주장했지만, 개에게 밥을 주어야 한다는 의무를 부담하지 않겠단 말인데,
우리나라 현행 동물보호법에 따르면 미흡하나마 의무 사항이 규정되어 있다.

제6조 (적정한 사육·관리) ①소유자등은 동물에게 적합한 사료의 급여와 급수·운동·휴식 및 수면이 보장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작년에 개정된 법이지만,
현실에선,
이미 푸석푸석해진 화석인 양, 후르르 불면 흩어질 듯,
풀 먹인지 오래된 이불호청처럼 흐늘흐늘 맥이 없는 검은 글자들에 불과하다.

오늘 고물할아버지네 집에 드나들며 먹이를 주시던 동네 아주머니를 만났다.
역시 짐작대로 손을 끊고 계셨음이니, 저들 강아지들의 처지가 사뭇 딱하게 되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헤어지면서 그 아주머니가 말씀하시길, 나 보고 책임을 지란다.
권리는 없고 의무만 지게 될 이런 도식관계란 도대체 얼마나 안타까운가?

사이비 종교에 몸과 재산을 바치는 이들이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기가 뻔히 보이는 데도 저들 열혈신자들은,
어이하여 저리 신명을 다 바쳐 교주에게 엎어지고 마는 것인가?

여러 이유가 있을 터이지만 나는 우선 두 가지 요인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두려움과 대안부재.

교주가 ‘신’이라면 그를 거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을 일으킨다.
이 두려움을 떨칠 수 없는 한, 빚을 내서라도 교주의 지시에 응하여 재물을 바쳐야 한다.

종말론이 한참 세상을 휩쓸고 있던 1990년 초반 이야기다.
종말의 그날,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갔다.
세상이 끝장난다는 교주의 거짓에 속아 온 재산을 바쳤던 저들 신자들 가운데는
교주를 상대로 소송을 건 자도 있지만,
후에, 교주가 형기를 다 마치고 나오자 다시 그 교단에 들어가
예전처럼 신명(身命)을 다 하여, 교주를 신처럼 떠받드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다.
종말, 휴거에 대한 믿음이 현실에서 깨져버렸지만,
그들은 그 이후를 견디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하기에 그 믿음을 지속시킬 대안을 다시 구해야 했다.
공허한 현실을 거짓일지라도 당겨서 채워야 안심이 되는 것이다.
이를 인지부조화라고 하는 게 아닌가.
사실과 인식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거짓일지라도
무엇인가 당겨 써서 메꾸어야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되는 것이다.
이 때 거짓은 거짓이 아니라 그들에겐 진실로 둔갑을 한다.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것.

어쨌건 멈추면 죽는다.
거짓이나마, 믿음의 자전거는 이리 쓰러지지 않고 굴러간다.
신(神)이라 불리우는 이름으로.

교주는 이런 메커니즘을 잘 알기에
자신을 신(神)이라 주장하는 한편,
적당히 엄포도 넣어가며, 어르고 뺨치면서,
신도들 재산을 앗는 것이다.

기존의 어엿한 이름의 종교 앞에서도,
혹여 자신의 신앙이 '두려움과 욕망'에 의해 인도되는 구석이 있지 않은가 하는
솔직한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저들 사이비라고 불리우는 따위들과 기성의 종교가 멀리 떨어진 협곡을 사이에 두고,
그만큼 확연히 벌어져 있다고 나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에 의한 폐불(廢佛)도 외양상 정치적 기도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실 당시 중들의 타락상들이 그 구실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인즉 그럴듯이 성직자라고 하지만 그들 역시 한낱 인간임이라,
범부와 다를 바 없이 두려움, 욕망을 온전히 여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때로는 남에게 휘두르고, 혹은 자신이 스스로 그에 빠져,
기망(欺罔)으로써 온 세상을 알딸딸하니 건넌다.

네다바이 사기를 잘 당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이들은 따지고 보면 욕심도 많은 사람들이다.
자신만은 신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휴거되리란 믿음의 욕심 말이다.
천당에 가겠다는 욕망,
미리 보험들듯이 현실을 저당잡히고야 비로서 안심하고 마는 것.
그게 미망이겠으나, 기실 욕망의 변주(變奏)가 아니겠는가?
음욕처럼 비릿한 그것.

여기, 전도서에 적힌 구절을 읊조려 본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교주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며,
신도들의 두려움, 욕망, 불안을 재료로
하늘만큼 leveraging하여 재물을 빼앗고,
한 인생을 뿌리째 유린하고 만다.

인생은 이리 나약한 존재들이다.
두려움과 욕망.
마융(馬融)이 말한,
겁자무공 탐자견망(怯者無功 貪者見亡)
이게 어디 바둑뿐이겠는가 마는,
대개는 ‘두려움과 욕망의 존재’라는 사실,
이 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늘 그러하듯이, 결코.

자신의 등이 따스하면,
설혹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한들, 
그냥 지나쳐 가게 되는 것.

그러면서도 한참 주제넘은 짓이지만,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을 생각한다.
저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때로는 시리도록 아팠을 것이리라.
도중에 훼절(毁節)한 동지 하나가 떠나면서,

“이젠 혼자 책임져! 안녕.”

차라리 배반의 기억보다 더 씁쓸한 그 날,
만주벌판에도 오늘처럼 눈발이 휘날렸을까나? 

‘포근하게 보이지만 결코 포근하지 않은’

그 차디찬 백색 위선의 눈발을 맞으며,
저들은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그저 애꿎은 백주(白酒)만이 저들 식은 가슴을 우둥불처럼 벌겋게 불질렀을까?
아니, 그냥 말 달려, 벌판을 질러 나가셨으리라.

나 자신을 돌아보면,
저들이 한없이 존경스럽다.
하지만, 아직도 셋방을 전전하는 후손들이 있다면,
저들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한가롭디 한가로운 가증스러운 노릇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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