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친구

소요유 : 2009. 2. 8. 21:04


친구 하나를 만나다.
일단(一團)의 사람들이 거칠게 산을 내려오고 있다.
오늘 하산 길에 거의 바닥을 다 내려와서 저들 무리를 만났다.
그 무리 중의 하나가 껌 껍질을 벗겨내어 막 먹으려는 찰나
나는 이미 그의 다음 행동을 예상한다.
짐짓 앞 서 가다 뒤를 돌아보니 왜 아니 그럴까?
껌 껍데기를 그냥 버리고 있다.

나는 순간 참지 못하고 그를 지적했다.
이미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는가?
이 땅에 변화가 있으리란
그 푸른 소망을,
나의 철없는 기대는 난망(難望)이라,
진작 찢어진 날갯죽지 접듯 접지 않았는가?

내 30년 전에 어른에게 듣던 희망의 메시지를,
지금 내가 그 위치에 서서,
다시 뱉어내며 부질없이 짖어댈 까닭이 없다.
이 땅엔 30년 전과 후에 한 톨인들 다름없이,
아무런 새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내 30년 전에도 어른들이 이리 타일렀다.
앞으로 세상은 변할 것이라고.
지금 이 땅엔 근 80% 이상이 대학교육을 받는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사불성인 사람이 차고 넘친다.
이제 와서 새삼 30년 전의 소박한 기대를,
다시 되풀이 할 까닭이 있는가?
80%의 열망으로도 변하지 않는 이 땅의 완고함을,
왜 지금도 변화하리라 기대하는가?

우완(愚頑)이란,
그래 그리,
우(愚)와 완(頑)이 함께 따라 다닌다.

아시는가?

이 말은 '어리석고 완고하다'란 뜻이 아니다.
양자는 그저 단순히 and 관계로 맺어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다.

아이큐, 지능이 떨어져 어리석고,
그 때문에 완고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뻔하디 뻔한 게으른 해석에 머물러서는 아니된다.

그게 무엇인가?

제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완(頑)하면 우(愚)하다.
완고하기에 어리석다고 부르는 것이다.
아시겠는가?
어리석기에 완고한 것이 아니라,
완고하기에 어리석다는 말씀의 본 뜻을.
그러한 것이다.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어리석다(愚)고 이르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 의미공간을 우리는 한 마디로 우완(愚頑)하다고 칭한다.
우(愚)와 완(頑)은 이리 제대로 순서껏 짝을 지어 짚어내야 바른 뜻이 살아오르는 게다.

그러하다면,
그 날의 소망이,
지금 역시 여전한 소망으로 남아 있다면,
그런 소망은 이미 부질없는 것 아닌가?
나는 이  조루(早漏), 조로(早老)에 대하여,  
이미 절망하여 바로 인용(認容), 아니 인용(忍容)하기로 했다.
진작부터.

그런데도 그를 지적함은 무엇인가?
아직도 한 가닥 남아 있음인가?
그 어줍지 않은 그리고 그 더러운 희망이 질기도록.

핑계와 욕설이 되돌아온다.

늘 그러하듯이,
저 염치없는 행렬.
나는 절망한다.
이 땅에 더 이상의 소망을 접는다.
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잣거리도 아닌,
내가 여기길 소도(蘇塗)와 같은 북한산,
명색이 국립공원 내에서의 저 파렴치한 행위,
그 한 실 터럭(端), 그 한 올의 안일, 더러움을
나는 이미 기정(旣定)의 현실 조건으로 치부했지 않은가?

마침 가까이 벤치에 앉아 사과를 먹던 이.
지켜보던 그,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다.
모처럼 등산길에 남과 말씀을 섞게 되다.

점잖다.
이치를 두고 함께 나누어 담론할 만 한 분.
찰나간, 친구가 되다.
하지만,
의기투합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무심코 고개 굽혀 내려다보니,
그 벤치 앞에 필경은 그가 버렸을 사과 껍질이 놔 뒹군다.

귤, 사과 껍질
그게 그리 사소한가?

산에 와서,
아니 국립공원 거기 그것을 함부로 버릴 수 있는가?
나는 늘 의문이다.
사람이라면,
다 큰 어른이라면,
새삼 이런 의문의 상대가 될 수 있을런가?

나만 그런가?
보통 모두 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혹여 버린다한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깊숙한 산숲에 버리리라.
등산로변, 사람들이 쉬는 벤치 앞에다 버리는 것은 도대체 납득할 수 없다.
그것이 종내 썩는다한들,
최소한 후래객(後來客),
다음에 쉴 사람들에게 폐가 되지 않겠는가?
꽃이라 한들,
시든 꽃을 반길 이 그 누가 있으랴?
이 마음보를 사려 챙겨 안다면,
차마,
꽃이라 한들 시들 것을 멋대로 버릴 수 없음이라.
항차 제 입에 들어가고 남긴 쓰레기를 그 누가 반기랴?

나는 이 삼가는 마음보의 존부(存否)를,
한 사람 인품의 청탁(淸濁)을 칭량할 첫 시금석이라 생각한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치, 말품을 팔아서가 아니라,
행(行)으로 입증하여야 한다.
누구나 입으로는, 글로는
그럴 듯이 꽃처럼 참하다.
TV에 나타난 연예인처럼.

하지만,
이리 했던가?
凡事 留人情 後來 好相見
정녕 그러한가?
인정을 풀어 남겨 두면 훗날 좋은 만남을 기약할 수 있음인가?

나는
그와 그저 담담히 헤어진다.
後來는 情이 아니라,
그저 인연에 의지하여야 함이라.

채근담에서 이르곤 하는,
저 人情이란 얼마나 더럽도록 끈끈한가 말이다.
다음을 늘 기약하고마는 채근담의 처세술은 내겐 늘 의문이다.

저 후고(後考)의 처세술,

그 계산된 문법(文法)을 나는 회의한다.
위선(僞善)의 현장,
저것은 막연코 고전(古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져서는 아닌 될 구석이 은폐되어 있다.
채근담의 한계다.
채근담(菜根譚)은 결코 마냥 고상한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제 주장처럼,
뿌리가 아니라, 가지에 머무르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한들,
간만에 이치가, 경우가 통할 만한 분을 만났다.
즐거운 하루였다.
그 하루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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