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소요유 : 2009. 6. 22. 17:04


고물할아버지네 고추 밭이 내 눈에 생경스레 비춘다.
(※ 참고 글 : 2009/03/05 - [소요유] - 사람들은 그릇을 닦거나, 혹은 닦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지지대를 세운 것을 보았는데,
어찌 된 것인지 이게 다 치워지고 북을 돋운 듯,
이랑을 정성들여 다듬은 모습이,
마치 이발을 새로 한 사내 녀석 머리통처럼 정갈하다.

빛과 어둠.
마당 뒷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는 강아지 두 마리.
저들은 고추보다 사뭇 더 못하다.

며칠 전 비가 온 뒤 끝이라,
시베리안 허스키는 털이 흙에 엉켜,
불로 지져 뽑은 흑인 여자 머리처럼 여기저기 배배 고인 채 뻣뻣이 일어서 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답답해지며 내 몸이 근질거린다.
얼추 다듬어 주려고 나섰으나 엉겨 붙는 통에 혼자서는 막감당이다.

또 한 마리,
자그마한 강아지.
그 녀석은 머리칼이 한껏 자라 눈을 가리고 있다.
가위로 대충 다듬어 주었는데,
자르는 내내 착하게도 내게 몸을 순순히 맡긴다.

저들은 매양 운다.
아마도 말을 시켜보면 필시 그리 울고 있다고 답할 것이다.
지켜보는 나는 저들에게 그저 나그네에 불과하다.
까짓 먹이를 준다한들 그게 저들의 고통을 얼마나 덜어줄 것인가?
차라리 그들은 이리 외치고 있지나 않을까?

“나를 이젠 그만 놔 주세요.”
“그만 세상을 떠나고 싶어요.”

원래 시베리안 허스키 주인은 고물할아버지 아들이다.
그는 주말마다 이리 와서 몸을 풀고는 떠난다.
제 개라 막 대하지는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올 때마다 다가가 꼴에 어르곤 하지만,
그 뿐인 것을 절대 물 한 그릇 떠 주는 일 없다.
그 자의 아들, 즉 고물 할아버지 손자라는 중학생 아이는 여기서 붙박이로 산다.
할아버지 내외, 아들, 손자.
그러하니 도합 4명이 이곳에 산다.

아니 기식(寄食)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으리라.
기식이란 남의 집에 빌붙어 사는 것을 말한다.
제 집에 산다면 제 집안에 사는 유정물을 저리 박정히 대할 수 없음이다.
남의 집에 일시 탁식(託食)하고 있으니, 남의 일인 양 저리 함부로 사는 것일지니,
기식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쨋건 4명이나 오종종 모여 살면서도,
그럼에도 저들은 모두 하나같이 강아지들에게 밥은커녕 물도 주지 않는다.
이런 형편인데 고추밭이 정갈하게 정리된 모습을 보니,
저게 무슨 도깨비 놀음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저들을 이끄는 동력은 도대체 뭣인가 싶은 것이다.

“밥”

그것은 “밥”인 게라.

저들도 먹어야 산다.
그러하니, 봄에 고추 묘를 심었을진대,
필경 가을 고추를 기대하였을 게라.
그러하기에 지지대도 세우기도,
이랑을 손질하기도 하였음이라.

이것은 탐욕이 아니다.
그저 “밥”이라고 불러야 한다.
먹어야 산다.
나 역시 “밥”을 먹지 않으면 버티어낼 재간이 없다.

그런데도 강아지들은 왜 돌보지 않는 것인가?
이들도 먹어야 산다.
시베리안 허스키는 아들이 임자니 팔 것은 아닐 것이며,
자그마한 강아지는 개소주집에 팔아보았자 돈 만원이나 받을 터이니,
도시(都是) 강아지들은 저들에게 “밥”이 되지 않는 것이다.

“밥”은 위대한 것이다.
뭇 생명은 “밥”에 의지하여 명(命)을 잇는다.

“밥”이 거룩한 것이라면,
그게 왜 내게만 그러하겠는가?
강아지, 고양이, 비둘기뿐이랴,
하루살이도 “밥”을 먹지 않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내가 강아지에게 “밥”을 주다보면,
떠돌이 고양이가 “야옹”하고 나타난다.
나도 곧바로 받아 “야옹”하며 그를 안심시켜 준다.
요 녀석이 이젠 낯이 익어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다가선다.
게다가 여남은 비둘기 떼들은 지붕 위에 열을 지어 앉아서는 내가 나타나길 기다린다.
저들 역시 “밥”에 매어 있다.

“밥”은 위대한 한편,
슬픈 것이다.

지붕마다,
박 매달리듯, 슬픔들이 여남은 마당가를 기웃거린다.
거기 마당에는 강아지라 불리우는 덩이 슬픔 둘이 이미 구르고 있다.

동물들만 그러한가,
고추 역시 물, 양분, 빛이란 “밥”이 필요하다.

내가 뱉어낸 말처럼,
“밥”이 정말 위대한 것이라면,
이러니저러니 제만사(除萬事)하고,
그 으뜸 까닭은 命을 이어주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저들 고물할아버지 가족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일색으로 강아지에겐 인색한가?
고추는 저리 정성을 들이고,
장독간 고추장 독은 햇빛을 맞추면서,
어이하여 강아지들에겐 물 한 그릇 떠주지 않는 것인가?
저들은 “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아닌가 말이다.

“밥”이 내 말대로 슬픈 것이라면,
저들은 슬픔을 아지 못하는 자들이다.
슬픔을 모르는 자들이란,
얼마나 끔찍한가?

예전 재래식 변소를 이용하자면,
떡하니 엉덩이를 까고 직사각형으로 뚫린 판자 위에 쪼그리고 앉아야 했다.
거기 아래쪽 똥구덩이 속에는 구더기가 득실 거렸고,
식은땀이 흐르는 머리께로는 파리, 하루살이 등속이 윙윙 날라 다니며,
시금털털한 땀 내음을 연신 탐했었다.

그러한 것을 이제는,
양변기를 타고 앉아 우아하니 신문지를 펼쳐 들고는 똥을 싼다.
S字형 싸이펀(siphon) 덕분이다.
물을 내리면(flushing) 내 쪽에 있던 똥이 저 아득한 피안(彼岸)으로,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그 이후는 나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siphon은 단순히 과학적 지식 分子가 아니다.
siphon은 똥구덩이 삶과 내 삶을 매정히 구획하여 가른다.

똥구덩이 밑에 구더기가 있음을 망각하게 만든다.
siphon은 세상을 단절(斷絶) 시키고 만다.

근데,
이게 어찌 siphon 책임인가?
flushing된 저쪽 세계에도 命이 있음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왜 siphon 책임인가?
피안의 세계에도 命이 있음을 왜 아니 모를 수 있음인가?
내가 命을 받아 숨 쉬고 있는 이상,
이를 모를 까닭은 없다.
다만 외면하고 있을 뿐인 것을,
그러하니 siphon에게 모든 것을 미루는 것은 무책임하다.

고추나무에 물주고, 김매고, 이랑 북돋고 하는 순간,
최소 이 순간만큼은 命을 자각할 수 있는 최후의 한 조각 기회가 아닌가?
차마 제 아무리 바삐, 비참하게, 어지럽게 산다고 한들 말이다.

이러할 수 있기에 우리는 命을 받은 존재라 이름 할 수 있음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그를 어찌 命 받은 자라 할 수 있음인가?

저들을 빗겨 부르길 금석(金石)이라 해도 과하다.
그저 더러운 똥인 게라.

예전이라면,
동네에서,
주리(周牢)를 틀던가,
멍석말이를 해서 동구 밖으로 내쫓아도 아무도 말릴 이가 없을,
천상(賤常)것들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 참고 글 : 2008/02/20 - [소요유] - 상인, 상것, 상놈, 쌍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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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9. 6. 22. 1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