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농부 사장

농사 : 2009. 10. 1. 22:42


어느 날,
한 농부를 어떤 농부가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이게 내겐 왠지 어색하게 들렸다.
부르는 이와 불리우고 있는 이는 모두 가까운 사이인데도 이리 칭해지자,
나는 단박에 그들 양자 사이에 어설피 걸린 삽(揷)다리 하나를 흘깃 엿본다.

이웃 간,
한 농부가 또 다른 한 농부를 사장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면,
거죽으로 한 손에 호미가 들리고, 한 손에 쇠스랑이가 들려 있다한들,
이미 농부의 마음이 한 켠에서 허물어지고 있음이 아닌가?
그러하다면 거래의 상대, 혹 상인의 마음으로 만나고 있음일 터.

기실 밭 이웃에는 농부라고 부를 정도의 농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주말마다 들리는 형편이니 이웃이라야 몇몇 말고는 잘 알지도 못하지만,
시내와 가까운 이곳엔 농부라고 딱히 부를 만한 전업 농부도 귀하다.
그저 텃밭 일구듯 소일하시는 할머니들을 향해,
박 씨 할머니, 서 씨 할머니라고 지칭하는 게 고작이다.
이렇듯 밭 주위에 토박이 농부라고는 그저 할머니들만 대표로 떠오를 정도로,
농사라는 것이 이젠 제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설혹 거기 남자 농부가 계시다한들,
나는 ooo 아저씨로 부르지, 사장님으로 부르지는 않을 꺼다.
그가 비록 삽 한 자루밖에 가진 것이 없다한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거기 슬픔 한 줌도 퍼다 버리고 있는 한,
그는 내 마음 속에 내내 농부 아저씨로 남아 있으리.

그런데,
어느 날,
밭 이웃 분을,
어떤 이가 호칭하길 K사장님이라고 이르고 있음이 아닌가?

사장이라면 회사의 장(長)이다.
그렇다면 이 때 그 장이 맡고 있는 회사는 무엇인가?
공장이나 상점이 아닌 이곳 전장(田莊)이 회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는 농부를 사장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지만,
장토(莊土)를 회사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즈음엔 개인 농토를 농장(農場)이라 이르고,
거기 농부를 사장님이라고 부르곤 한다.
흔히 접하는 인터넷 상에서 농작물을 팔고 있는 대부분은,
ooo 농장, 그리고 ooo 사장이라고 내세운다.

농부는 쌀을 지어내지 물건을 만들어내지 않는 것으로 보았기에,
아저씨라고 부를지언정 사장님으로 부르지 않았다.
쌀은 생명줄을 이어주는 소중한 것인즉,
여느 상품을 만들어 파는 장인이나 장사꾼으로 대할 수는 없었음이다.
비록 아저씨란 말이 상대를 귀히 대접하는 호칭은 아니지만,
최소 이문을 취하고자 업을 꾸려가는 사람이란 지칭은 아니다.

‘ooo 아저씨’

이 부름 앞에 서 있으면,
골목길에서 만나는 ‘이웃’ 같이,
거기엔 신뢰와 친분의 따스한 정조가 흐르지 않는가 말이다.
상대의 ‘자존’을 지켜 주고자 하는 겸양의 덕성이 또한 거기엔 녹아 있다.
도대체가 농부를 사장이라고 부르는 것만치 모욕이 어디에 있는가?

아닐까?

요즘 농부는 사장이라고 불러주면 어깨를 으쓱,
내심 달가와 할 이도 적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하고 있음이니,
이 또한 굳이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저으기 안타깝다.

하기사, 나 역시도 못나기는 그리 다를 바 없다.
나는 이웃인 그 밭주인을 ‘ooo 선생님’이라 부른다.
이미 여느 농부로 보고 있지 않다는 말이렷다.
이는 정작은 그 분이 아니라,
내가 아직 농부가 아니란 소리에 다름 아니다.
이게 부끄러움이었으면 좋겠다.
그런데도 나는 이를 부끄러움으로 충분히 느끼지 않고 있다.
나는 이를 또한 부끄러워 한다.
내가 밭 위에 서 있는 한,
밭을 모욕할 수는 없음인지라.

하지만, 앞으로도 사정이 어찌 변하게 되든,
나는 다만 그 분을 ‘ooo 사장님’ 이라고는 부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밭이 이웃하고 있는 농부 간에,
‘사장님’하고 부르는 순간,
거기 밭은 없다.
다만, 여느 공산품과 마찬가지로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공장이 있을 뿐이고,
그 상품을 파는 상점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밭이 깨져 나가고 있는데,
어찌 농부 아저씨가 거기 남아 있을런가?

중세의 장원(莊園)엔 귀족 나으리가 있고,
거기 예속된 농노가 있다.

우리네 시골 마을에 양반이 있고,
그 주위엔 딸린 소작들이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죽 늘어서 있었다.

세상이 바뀌어, 이제 이들 농민들이 모두 제 밭을 갖게 되자,
개개(箇箇)는 자기 목소리로 제 노래를 부르는 자존의 존재가 되었다.
최소 내가 너에게, 그리고 네가 나에게 이(利)를 다투는 상인으로 이웃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게,
비록 남루한 옷을 걸치고,
누추한 집에 살아도,
저들이 가진 최후의 자존심이었으리라.
하기에 대처 도시 것들과 다르게,
촌 것, 들 것, 갯 것들은 사장님이 아니고 아저씨로 부르거나 불리었다.
나 역시 농부들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사장이 아니라 아저씨로 부르길 원한다.

하지만, 이들 농부들은 이젠 모두 파편화되었다.
도시 것들에 갈가리 찢겨,
이대로는 목구멍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자본이 농토를 침탈해오자,
‘밭’은 없어지고 그 자리엔 이름도 깨끔한 ‘농장’이 들어섰다.
밀짚모자 쓰고 베잠방이 걷어 올린 농부 아저씨는 하모 사라진 자취도 남아있지 않고,
‘사장님~’하고 부르면
뒤돌아볼 농부 아닌 농부들이 논두렁 마다 그득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한들,
이리 세상이 변하고 있음이니,
이를 탓하는 것이 어찌 능사리.
농장 사장이 아니라면,
명을 부지(扶持)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고 말았음이니,
무상한 시절인연이라 할 뿐.

저들 농장 사장님들의 건승을 빈다.
다만, 예전 농부 아저씨들의 마음을 잊지 말고,
장원(莊園)을 지켜주시길 소망한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언제 다시 읊조려도 아련하니 슬프디 아름답다.

“돌아가련다. 전원이 장차 거칠어지려고 한다.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

저들 역시 버려져 풀로 무성해질 전원(田園)을 사랑하여,
돌아온 분들이 아니겠는가?
어찌 농부의 아름다운 마음 한 조각인들 없으랴,
감히 앞길을 축원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다만, 그마저 어려워,
그늘에 져서 쓸려 나갈 우리들의 가난한 농부 아저씨들은,
어찌 할 사?
삼가 저 세상에서나 제대로 차리고 만나 뵐 수 있으려나?

강이 저물고 있다.
그래도 달은 떠오르고 있더이다.

저믄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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