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를 버려내기 위해
- 자기인용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code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code라는 것이 내뿜어내는 의미가 고정된 것만도 아닙니다.
글 예에서 든 주역의 괘상을 풀이하는 과정 역시 고정된 의미를 향해 달려가지 않습니다.
복자(卜者), 또는 문복자(問卜者)에 따라 동일한 괘상이라도 解卦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정된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 code의 세계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진실입니다.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장주의 호접몽처럼 꿈속에 나타난 지시기호의 애매성이
현실세계에서도 여지없이 펼쳐집니다.
저 여자가 싱긋 웃는 모습이 과연 나에게 가진 호감의 징표인가 ?
아니면 비웃음의 code인가 ?
지난 밤 헤어질 때 눈웃음치며 마중하던 “안녕”이란 목소리가
오늘 밤의 “안녕”이란 sign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
기호가 뿜어내 펼쳐내는 의미들은 실로 부유하는 먼지처럼 석연치 않습니다.
하여, 내 의미망에 명확히 포집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습, 경험, 지식, 환경, 신념.....
내가 가입한 단체, 까페, 정당, 모임....
이런 것들이 얼기설기 쳐진 구조망 속에 놓인 인간들.
우리들은 이들을 포집망 삼아 허공중에 떠도는 의미들을 그럴듯이 잡아채어
일용할 양식으로 삼습니다.
어렸을 적, 동무들과 잠자리채 들고 뚝방에 내려섭니다.
허공중에 날고 있는 잠자리들을 내달리며 어렵사리 잡습니다.
한참 놀이에 빠져 있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면
어둠의 자락이 서서히 내려 개천바닥벌이 가뭇가뭇 떠오르고,
이미 동무들은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혼자만 남아 있습니다.
종이상자 안에 잡은 잠자리가 전리품처럼 파드득 떨고 있습니다.
하루종일 애썼지만 이미 태반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허무가 외롭게 버려진 동심을 잠깐 스쳐지나갔겠습니다만,
다음 날도 여전히 잠자리채 들고 동무들과 함께 다시 뚝방을 내려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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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無常한 의미를 애써 잡아 고정시키지만,
때 되면, 그 의미는 움켜쥔 손가락 사이를 물처럼 빠져나가버립니다.
곧 허무하게 사라질 의미들을 고정시키려는 의지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
그렇게라도 동여맨 의미들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짝을 지으며, 사랑을 노래하고, 때로는 분노합니다.
단 100년 남짓이면 모두 허물어지고 말 것들이지만,
대개는 그 뒤엔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지만...
이리 하지 않으면 당장, 풍랑 심한 이 바다 위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리하기에 그것이 영원하리란 욕망을 푯대 세워 이 밤을 지새웁니다.
이를 누군가는 미망이라고 했습니다만, 그게 욕심이 되었든 어리석음이 되었든
대개는 그리 이 한 세상을 버티어냅니다.
하지만,
그 의미들이 파닥거리는 잠자리처럼 죽어가고 있을 때,
우리는 갈퀴쥔 손을 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 날 다시 새 것을 움켜질 것을 예정하고 있듯이,
우리는 그렇게 어제를 버려내곤 합니다.
***
***
이상의 글은 내가 언젠가 여기 블로그에 썼던 것 중 일부이다.
(※ 참고 글 : ☞ 2008/02/17 - [소요유/묵은 글] - code - ⑤)
내가 이 글을 다시 상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저께 밭에서 선배 귀농인을 만나 뵈었다.
그는 ‘공동선’을 강조하는 말씀을 여러 번 드러내셨다.
협동이라든가, 남에게 도움을 베푸는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얼핏, 이 말씀의 내용을 부정할 사람이 과연 천하에 그 누가 있을 터인가?
하지만 나는 여기에 약간의 이견이 있음을 밝혔다.
공동선을 말로서 드러내는 것에 나는 다소 부정적이다.
천하인이 모두 다 아는 뻔한 이 말을 되풀이해서 드러낼 까닭이 없다.
(※ 그 분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로 말을 잇는다.
말씀도 잘하시고, 차근차근 가르쳐 주시는 정겨움이 도타우신 분으로,
내가 귀농하면 사뭇 모시고 가르침을 청할 분으로 내심 꼽은 분 중이 하나이시다.
이제부터는 이를 그날 자리 마당 그 개별적인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주제만을 뚝 떼어내 일반화하여 취급한다.
나로서는 이 주제에 대하여 얼추 내 의견을 다 드러낸 폭이지만,
미처 다하지 못한 미진한 구석이 있었음이니,
여기 내 마음밭에 떨구어진 낙수(落穗)를 줍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잇는다.)
대개는 정치인들은 거죽으로는 늘 여러 사람의 행복을 위해 일신을 바칠 듯
나대지만 기실 그들만큼 이 사회에서 질타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 없다.
이 시대 그들의 말처럼 불신을 자아내는 것이 또 있을까?
기득권자들이, 또는 지배층이 그들의 상대인 서민 또는 피지배층들에게,
이런 말들을 민들레 홑씨처럼 허공중에 뿌려대지만,
실인즉 이는 저들을 ‘동원’하기 위한 선전, 구호에 불과할 때가 많지 않았던가?
해서 나는 저런 말 자체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실천 현실의 부재 때문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러하니 정작 필요한 것은 구호, 선동이라던가,
혹은 믿음, 신념, 각오 따위가 아니다.
조용한 실천 외에 또 다른 무엇을 말하리.
저마다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고, 자신의 양심에 충실할 때,
비로소 공동선이 그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거꾸로 공동선을 말로서 주장하고, 이를 의식하여 행동하자고 이른다고,
그것이 곧 아름다운 결과로 귀착된다고 기대할 노릇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선후가 바뀌었다고 나는 보는 것이다.
저마다 각자의 성실성, 창조적 자기표현, 양심들의 총화(總和)가
나중에 결과적으로 곧 공동선으로 나타나면 나타나는 것이고,
아니 나타나면 아니 그러한 것일 뿐인 것을.
공동선을 의식하고, 생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외치며,
살아가는 것이 꼭이나 그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기에 나는 저런 말씀에 은근히 불순한 마음을 일으킨다.
그 때쯤 반감(半酣)에 이른 소이도 있겠지만.
굳이 저런 말씀으로 사람들을 경계(警戒)하거나 여기(勵起)할 이유가 없다.
다 큰 어른 사이에 이런 말들이 주석(酒席)에서 화제로 떠오를 까닭이 없다.
하기에 나는 주제넘게 맹자를 들고, 원효의 화쟁론을 거론하며,
개인의 ‘자존의식’에 입각한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새삼 ‘남을 위하여 도움을 주고 협동하여야 한다며’
이를 외부에 드러내는 방식이 나에겐 적이 불편하다.
시비를 떠나 이것이 지금의 솔직한 내 삶의 태도이다.
그러하였던 것인데,
그분은 맹자, 원효 등을 거론한 것이 내심 탐탁치 않으셨는가 보다.
하기사, 나보다 년배도 높으시고, 기껏 두 번째의 만남인데,
역시나 설은 짓이었다.
맹자는 양심에 대하여 전거를 짚어보고 싶었기에,
그리고 원효의 화쟁론은 그가 말로서 징표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 현장에서 몸으로 구현하였음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하였던 것인데, 이런 나의 작태가 생경스러우셨던 것이리라.
대화 도중,
가끔씩 모두(冒頭)에 인용한 나의 글들이,
연지(
蓮池
) 밑바닥으로부터 물방울 떠오르듯 단속적으로 떠올랐었다.
아마도 나 혼자 조금 외로왔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 의미들이 파닥거리는 잠자리처럼 죽어가고 있을 때,
우리는 갈퀴쥔 손을 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 날 다시 새 것을 움켜질 것을 예정하고 있듯이,
우리는 그렇게 어제를 버려내곤 합니다.”
어제를 버려내기 위해,
이글을 여기 이리 간단히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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