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不汗黨)
어제 밭에 갔다.
밭 곁을 지나는데 두둑 위에 아기 고양이 하나가 누워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추운 겨울에 미동도 않고 누워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죽어 있는 것이리라.
두둑 맞은편에는 판자로 지은 집이 있다.
그 집에 올 여름에 강아지 두 마리가 줄에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
마당도 없는 그 집 대문께에 묶여 있는 모습을 보자하니,
저 녀석들의 명운도 과시 가엽게 되었구나 싶었다.
도대체 왜들 강아지를 키우는가 말이다.
필경은 다 키운 후 개장수한테 팔아먹으려고 하는 짓이겠거니와,
몇 푼이나 벌겠다고 가여운 강아지에게 죄를 짓고 있는가?
(도로 앞 판자집엔 강아지 하나가 남아 마른 잎처럼 바르르 떨며 남은 생을 건너고 있다.
나는 그가 늘 볼 수 있는 밭두둑 위에 그의 친구를 묻어주었다.)
그러한 것인데, 얼마 전부터 강아지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마침 어제 만난 이웃 할머니는 그 강아지가 차에 치어 죽었다고 한다.
나는 삽을 챙겨 고양이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갔다.
역시 그는 죽어 있었다.
병으로 죽었는가 싶었는데,
이제와 짐작하니 녀석 역시 차에 치었지 않았는가 싶다.
그러한 것을 어떤 이가 그저 밭으로 던져버렸으리라.
나는 묻어주기 적당한 곳을 물색하느라 근처 밭가를 이리저리 찾아 다녔다.
그런데 조금 아래에 죽은 강아지가 버려진 것이 또 보이질 않는가.
이웃이 말한 차에 치어 죽었다는 그 강아지임이 틀림없었다.
창자가 다 드러난 그의 몸에선 시즙(屍汁)이 흐르고 구더기가 수백 마리 들끓고 있었다.
이런 고약한 노릇이 있는가 말이다.
속에서 열불이 확 솟구치는데,
때마침 문제의 집 주인이 차를 문 앞에 대고는 내리고 있다.
여자 하나가 물건을 내리는데 보아하니 어디 장에라도 다녀온 모양이다.
그의 얼굴엔 뽀얀 화장기가 덧칠해져 있었다.
나는 순간 욕지기가 일고 만다.
“남의 밭이라한들 죽은 강아지 예다 묻는 것까지는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지만,
물건 버리듯 휙 던져 버릴 수 있는가?”
“우리 개가 죽은 것은 알지만, 내가 치우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아주머니가 버리지 않았다한들, 집 식구 중 누군가는 버리지 않았겠는가?
단 하루를 같이 지내도 내 집안에 들어온 동물과의 인연이 그리 가볍다 할 수 있겠는가?
죽었다한들 수습하지도 않고 이리 찬 바닥에 그냥 내동댕이칠 수 있는가?”
“집식구에게 말하여 처리하겠다.”
“됐다. 내가 묻겠다.”
이리 모진 족속들에게 맡겼다가는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차라리 내가 묻어야 안심이다.
나는 적당한 곳을 찾아 정갈하니 구덩이 두 개를 팠다.
주변엔 내가 지난가을에 예초하였던 풀들이 말라 뒹굴고 있다.
나는 마른 풀을 모아 구덩이 안에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고양이는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형체가 그대로이나,
강아지는 구더기가 들끓고 몸체가 많이 이지러져 옮기기가 만만치 않다.
나는 가만히 네 다리를 집어 올려 보았다.
아직은 육탈(肉脫)까진 이르지 않았으니 행이나 몸뚱이가 모두가 추슬러진다.
그 녀석 묻은 곳 바로 아래엔 함께 했던 강아지 친구 하나가 아직도 남아,
이 풍진 세상을 건너고 있다.
그는 나를 몇 번 보아 나를 보면 꼬리를 치며 반긴다.
그의 하얀 미소가 마치 하회탈처럼 허허로워 내 마음은 짠하니 슬픔이 흐른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쩌자고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바로 느끼기도 남을 아픔을 모르는가?
이다지도 죄의식 없이, 끊이지 않고 악행을 짓고 있음인가?
저들 강아지들은 생사간 갈라서 있지만,
밭두둑을 두고 가까이에서 서로 쳐다볼 수 있으려니 서로 위로가 될런가?
아, 삶이란 정녕 아스라하니 아프고나.
녀석에게 아침에도 간식을 가져다주었으나,
죽은 친구를 묻어주고 나니 남아 있는 녀석이 더욱 불쌍하다.
처는 자기가 먹을 것마저 가져다주란다.
녀석은 먹이를 허겁지겁 빼앗다시피 받아먹는다.
보아하니 평소도 허기를 면치 못하고 있는 양 싶다.
살펴보니 그가 묶여 있는 어두운 집구석엔 물그릇 하나 없다.
경험한 바에 의하면,
강아지 옆에 사료 그릇은 아무런 의미있는 사육 정보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물그릇이 없다든가 물이 채워있지 않은 경우는,
필경은 주인이 개를 막 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중에 개장수에 팔아먹으려고 한들 우선은 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밥을 주지 않으면 죽는다.
이리 되면 주인에게 손해다.
저들의 셈법은 지극히 간단하다.
가슴엔 기름집 댓박처럼 반지르 닳고 닳은 셈판만이 남아 있을 뿐,
미풍에도 바르르 떨며 우는 심적(心笛)일랑 아예 없다.
하기에 밥그릇은 깨진 사기그릇일지언정 어디엔간 뒹굴고 있다.
하지만 물그릇까지 챙기기에는 그 품이 아까운 것이다.
하니 물그릇까지 챙기고 있다면,
최소 그 주인은 그 크기만큼 은정(恩情)이 남아 있음이다.
도대체가 저 불한당 같은 인간들을 감히 인간이란 이름으로 불러도 좋은가?
단 몇 푼을 위해 살아 있는 동물들을 유린하는 저들에게 영혼이 있다고 할 수 있음인가?
구덩이를 파는 동안 연신 쓰레기가 나온다.
수십 년간 저들이 온갖 쓰레기를 우리 밭에 버려왔음이다.
폐건전지, 치약, 부러진 숟갈 따위가 연신 나온다.
이를 피해 자리를 골라 터를 잡을 수밖에 없다.
천하디 천한 치들이다.
도무지 바른 의식이라고는 없다.
그래도 한 푼을 위해선 이악스럽게 모진 삶을 이어갈 것이다.
옛 욕설 중에 이러한 것이 있다.
“염병에 땀을 못 낼 놈”
염병에 걸리면 땀을 내야 살 수 있는데,
땀을 내지 말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으니 오죽이나 미웠을 터인가 말이다.
불한당(不汗黨)이란 남을 괴롭히는 파렴치한 무리를 뜻한다.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땀은 양심의 징표다.
무엇인가 부끄러운 짓을 할 때는 진땀이 흐른다.
욕심이 발하여져 나쁜 짓을 할지언정 양심이 살아 있다면,
땀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데 땀조차 나지 않는다면 이미 양심이 실종된 상태이며,
부끄러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비록 염병에 걸렸을지언정 땀을 내면 살아남는다.
부끄러운 짓을 하였다한들 겨드랑이를 타고 옆구리로 땀이 비적비적 흐르고 있다면,
그는 아직은 사람의 자취가 남아 있음이다.
하지만 땀조차 나지 않는다면,
그는 살아 있다한들 어찌 살아있다 할 수 있음이겠는가?
살아있다고 모두 살아있다고 할 수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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