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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懷疑)의 적(的)

소요유 : 2010.08.29 11:00


나보다 약간 앞서 귀농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연배도 나 보다 조금 앞서고 농사도 일찍 지었으니 여러 모로 선배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그와 술자리에서 마주 했다.
그가 이러저러한 이야기 가운데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느닷없이 협동을 강조한다.
농사하는 이야말로 예로부터 품앗이니, 두레니 하며 협동하지 않았던가?
그러하니 그의 말은 일견 외양상 하나도 그릇됨이 없다.

하지만 나는 순간 그의 길을 막고 이런 식으로 말 운을 떼었다.
협동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목적이 되는 것은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개개인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성심성의껏 일을 처리한 결과 협동이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협동하자고 사람들을 견인하여 한 데 이끌 것은 없다.
자각의 당체인 개인이 제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킨다면,
굳이 남으로부터 협동이란 견인의 객체가 될 것도 없이,
나중에 협동이라고 불리우는 결과를 자연 내놓게 된다.

나는 내심 조금 더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선배 대접을 하여 참았다.
최근세사 속에서 협동을 강조하는 것,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었던가?
새마을 운동이 아니던가?
소위 그들의 3대 정신이라는 것이 근면, 자조, 협동 아니던가?
협동이란 너울 쓰고 적당히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견인한 혐의는 없는가?

나는 협동이란 말 속에,
늘 이런 정치적인 견인, 협잡 따위의 음습한 암계(暗計)가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한다.
저 구호를 외치는 자의 가슴 속에 숨은 은밀한 기도, 불순한 의도를 경계한다.
협동이란 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저 말을 깃발 들어 외치는 자의 마음보를 의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기업체에선 직원들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이게 설혹 애초엔 순수한 의도로 그리할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서 직원들을 쥐어짜기 위한 장치로 전락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하기에 나는 차라리 직원이란 그저 담백한 말이 정직하다고 본다.

나라면 협동이니, 자조니 떠들 것이 없이,
각자가 양심껏, 성실하니 제 주어진 위치에서 걸맞는 역할을 다 할 때,
결과적으로 협동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에게 협동을 구하는 것 자체가 상대를 얕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상대를 자각 있는 존재로 인식하다면 굳이 협동하라고 부추길 까닭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고 염려가 되기 때문에 협동하자고 꾀는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제 사욕을 채우기 위해 상대를 동원하고자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유인하는 것은 아닐까?
협동은 남에게 함부로 꺼내놓기 사뭇 위태스런 말이다.

君君臣臣父父子子(군군신신부부자자)
임금은 임금 노릇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하며, 아비는 아비 노릇하며, 자식은 자식 노릇
제대로 하면 사회질서는 제대로 잡힌다.
공연히 다 잘난 사람들을 협동이니 자조니 하며 이끌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제 욕심,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교묘히 사람들을 동원하고 있는 수가 많다.

하니 본말이 전도되어 ‘협동’을 앞세우는 사람은 나는 조심스럽게 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침 내 처도 이 자리에 있었는데,
그 선배라는 분과 나의 의견이 관점의 차이이지,
누가 옳고 누가 그른 시비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가 싶다.

하지만 실제 최근래 나는 이런 사례속에 본의 아니게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예를 들며,

“보아라, 내 생각이 그릇 되었는가 말이다.
어림없는 소리다 무릇 세상에 나서서,
협동, 사랑, 공감 따위의 이런 뻔하디 뻔한 가치를 선양(煽揚)하는 자는 먼저 경계하여야 한다.”

나는 이리 일러주었다.

그 예라는 것이 무엇인가?

언젠가도 얘기 하였지만,
농원 우물을 팔 때 면식을 튼 이에게 도움을 청하였다가 낭패를 당했던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언필칭 새마을지도자이다.
새마을 운동의 3대 정신 중에 협동이란 것이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는 협동은커녕 외려 이리저리 시간을 끌고,
마지 못해 들인, 그가 잘안다는 업자는 거의 사기꾼에 다름없었다.

대명천지 개명한 세상에 아직도 새마을운동 운운하는 것이 남우세스럽다.
이게 나에겐 욕으로 들리는데, 여기 한 다리 걸치고 있는 것을 상기도 감투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참으로 세상사, 인간사는 제 각각 나름대로이다.
때문에 요지경(瑤池鏡), 재미나게 우리네 일상은 울퉁불퉁 어울려 굴러간다.
일편, 삶은 그러하기에 누추하니 쓸쓸한 것이어라.

만약 내 의론을 좇아,
그가 도움을 청한대로 성심성의껏 일을 처리해주었더라면,
원하는 좋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우리는 이를 나중에 비로소 ‘협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일도 되기 전에 협동이 중요하다고 제 아무리 부르짖어야,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협동이 먼저가 아니고 성실함의 결과를 나중에 그리 부를 수 있을 따름이다.

물론 별로 겪지도 않은 그 선배라는 분을 직접 겨냥하고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논의 구조에서 이런 함의를 나는 이끌어내고 있을 뿐이다.
아주 건조하니 무색투명하게 추상적으로 추압(推壓)해내고 있는 것이다.
행여라도 이 글이 그 분을 향한 직접적인 비난으로 독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더우기 아직까지는 그를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그를 비난이든 칭찬이든 하려면 우선은 무엇인가 충분히 거래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물리적으로도 그럴 시간이 없었은즉 그는 차한(此限)에 부재(不在)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남의 앞에서 사랑, 소통, 공감, 협동, 애국 따위의 그럴듯한 가치를
깃발 흔들며 높이 부르짖는 자를 사뭇 경계하여야 한다.
이런 가치들은 구체적 실천행으로서 입증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제 이름을 찾는 것임이라.
그것은 이름이 먼저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나중에 태어나는 것이다.
부름(call)은 늘 나중에 확인의 형식으로 제 존재를 득(得)하는 것이다.
소명(召命)이란 사전적으로 예정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여기에 성실하게 살았다는 증표로서 사후에 이름 지어지는 것일 뿐,
먼저 소명을 받았네 하며 설치며 가불하여 앞당겨 쓰는 게 아니란 생각을 하곤 한다.

그가 나를 진정 사랑하였는지 그가 떠난 나중에 확인 되곤 한다.
처음엔 사랑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후에 그 자리에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진정한 사랑이란 이름은 이렇듯 후에 깨닫게 되는 것임이라.
사랑합네 하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남발하는 자는,
나를 진정 사랑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라.
왜냐하면 사랑이란 오늘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일 일깨어질 뿐인 것을,

이승만은 육이오 그 때 국민 보고 안심하라고 일렀다.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해주를 탈환하였다고 선전해대었다.
하지만 06.27 그는 이미 대전으로 떠났고,
이튿날인 06.28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이승만의 말을 순진하게 믿고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피난도 못가고,
고스란히 서울에 갇혀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그는 멋지게 폼을 잡고 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이 말처럼 그럴듯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앞선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천행으로서 그 말이 입증되는 것일 뿐인 것을.
이승만의 국민 사랑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그 날 그 때 그 현장에서가 아니라,
나중에 확인이 되었을 뿐이다.

하기에,
‘애국, 공감, 멸사봉공, 협동, 사랑, 자선’ 이런 말들이 공중에 뿌려질 때는,
그런 말을 하는 자를 구시월 독사를 보듯 의심해야 한다.
수사와 거짓으로 핑크빛 희망을 무지개처럼 허공중에 뿌려대지만,
언젠가 그것은 검은 먹장구름으로 두텁게 우리들 가슴을 짓누르기 십상이다.

- 獨白 壹
하기사 사는 것이 모두 가식(假飾)이라며,
차라리 드러내놓고 커밍아웃한 어느 이웃 하나가 한결 더 정직할런지 모른다.
이런 작자는 협동이란 거창한 가치를 팔지는 않는다.
다만 얄팍하니 제 잇속 밝혀 쥐새끼처럼 시궁을 타고 넘나든다.
스케일이 작은만큼 조금 깍아 용서가 될까나?
아니면 혹여(或如) 더 야비하고 천한 것일까나? -

이명박 정권하에서 녹색이란 수식어가 붙은 말들이 난무한다.
녹색성장, 녹색경제, 그린코리아 ...
그런데 멀쩡한 강을 파내고 콘크리트 퍼부어 댐을 만들고 유람선을 띠우는 것이
과연 녹색성장인가?
전도(顚倒)된 가치, 모순된 형용(形容), 오도된 선동(煽動)이 가차없이,
일점 부끄러움도 없이, 터진 배창자처럼 흘러나오고 있다.
사뭇 어지럽다.
난세(亂世)라 아니 부를 여지가 없음이다.

시작도 없이 결과를 서둘러 차용하는 자들을 조심하여야 한다.
하기에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여 우짖는 자들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다.

혹간 그 자가 흉계를 품은 악인이 아니고, 열정을 지닌 순진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순진하다고 하여 어리석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슴만 있고 머리가 없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까.
작정없는 뜨거움만 있고, 준비된 차가움은 없을 때,
마냥 비난만 할 수는 없어도 적지 아니 안타까운 노릇일 터.

악(惡)을 대하기도 힘들지만,
우(愚)도 역시 마주하기 만만치 않은 것임이라.

한즉,
목울대 부르르 떨며 남을 향해 가치를 외장(獨場)치는 자는 회의(懷疑)의 적(的)인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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