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뱀, 그리고 꼬리를 무는 단상.

소요유 : 2010. 9. 26. 18:10


지난 3년 동안 주말농사를 지을 때는 개구리를 몇 마리 다치거나 죽게 하였었다.
풀을 베자고 예초기를 돌리다보니 본의 아니게 칼날에 치어 이들을 해하게 되었다.
이게 농사를 지으면서 도리 없이 짓게 되는 업(業)이다.
농사라는 것이 마냥 그럴 듯한 것만이 아니다.
농장기라는 것이 유사시 병장기(兵仗器)로 쓰이듯,
농기구라는 것이 거의 살생무기에 준한다.
농사라는 것이 벌레 잡고, 조수(鳥獸) 피해 예방하고, 풀 잡고 ...
이러한 것이 일상이니 부득불 생명을 다치게 된다.
이 또한 삶의 현장인 게니 내겐 좋은 공부 터자리인 셈이다.

금년엔 개구리를 한 마리도 다치지 않게 되어 용하다 싶었으나,
대신 뱀을 죽이게 되었다.
금년엔 뱀을 도합 4마리 보았다.

하나는 하우스 묘판 위에 떡하니 올라온 것을 보고는 처가 나를 급히 불러대었다.
나는 끝이 갈라진 파이프로 머리를 슬쩍 누르고는,
다른 파이프를 그 머리가 들어가도록 씌었다.
그리고는 파이프를 타고 기어들도록 유도하였는데,
반대편 파이프 끝에는 자루를 씌어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파이프를 타고 기어들은 뱀은 도리 없이 자루 안으로 떨어져 들어왔다.
나는 그 녀석을 안전한 곳에다 데려다 놓아주었다.

“다음부터는 이곳에 나타나지 말고 저리 가서 지내거라!”

지난여름엔 두둑 위를 예초기로 훑고 지나는데,
이미 여기저기 상처가 난 뱀이 죽은 것이 설핏 뒷자리에서 목격되었다.
아마도 예초기 날에 방금 다쳤는가 보다.
뱀은 진동에 예민하다고 하였는데,
풀 위로 스치는 예초기 진동은 미쳐 땅에 잘 전해지지 않는지,
뱀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있다가 변을 당한 모양이다.

타초경사(打草驚蛇)라,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한다’ 고 하였으나,
예초기 소리가 제법 크고, 칼날이 풀을 스치는 충격도 강한데,
어찌 하여 뱀들이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가?
(※ 참고 글 : ☞ 2008/12/23 - [소요유] - 삼십육계(三十六計))

사실 장화를 신었다지만 허리까지 자란 풀을 베려고,
고랑을 지날 때는 혹여나 뱀을 밟지나 않을까 신경이 쓰이곤 한다.
하지만 이도 처음 몇 발자국뿐이지 일에 열중하다 보면 거의 의식도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리 악연으로 만나게 된 뱀들은 모두 고랑이 아니라 두둑 위에서 변을 당했다.

(※ 두둑 : 논이나 밭을 갈아 골을 탈 때 두둑하니 흙을 높이 쌓아 만든 곳. 畝背
      고랑 : 논이나 밭을 갈아 골을 탈 때 좁고 낮게 들어간 곳. 畝溝
      이랑 : 두둑과 고랑을 한데 아우르는 말. 또는 두둑만을 이르기도 한다.
)

추석 전날엔 역시나 또 다른 두둑에서 뱀을 죽이게 되었다.
예초기를 휘두르는데 바로 밑에서 뱀이 고통에 차서 몸부림 치고 있다.
몸엔 두어군데 상처가 났는데 목불인견이다.
저것을 어찌 한다.
그냥 지나치자니 몹시도 아플 것 같고 살 것 같지도 않다.
필경은 채 몇 각(刻)을 버티지 못하고는 죽을 것이다.
나는 찰나간 고민에 든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이자니 이 또한 겁살(劫煞)을 일으키는 것이니 영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저 녀석을 그냥 놔두자니 그 단말마(斷末摩)의 고통을 외면하게 된다.
나는 이 양날의 칼날 위에 서서 둘 중 어느 것도 피해 갈 수 없다.
전자는 나를 위한 위로내지는 변명에 불과하지만,
후자는 녀석을 위한 것이 아닌가?
나는 일각이라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나는 그의 급소를 겨냥하고 무정검(無情劍) 이어든 혹 자비검(慈悲劍)을 휘둘렀다.

마치 사무라이가 하라키리할 때 옆에서 목을 쳐주는 보조처럼,
나는 그리 그를 보냈다.

여담이지만,
하라키리가 변질되길 배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곁에 놓아둔 부채를 만지려는 찰나,
보조인이 목을 쳐주는 편법도 있는 모양이다.
불가(佛家)의 연비(燃臂)도 요즘엔 그저 향불로 따끔할 정도로 살짝 대는 것만으로 대신하고 있다.
행여나 단지(斷指)는 고사하고 연비조차 이리 타락하고 있는 것이다.
혜가(慧可)의 단비(斷臂)라면 이 시대엔 결코 있어날 수 없는 전설, 신화라 할 터라.

이제 온 천하가 모두 가장, 위장, 변장에 익숙해진 까닭이다.
영어로 하자면 disguise쯤 될려나? 
그런데 종교가 저 짓을 앞 다투어 나서는 세상이라면,
이젠 거의 끝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하기사 종교가 언제 '싱싱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하니 새삼 종말을 운운할 염려는 없겠다.

이런 고사 하나가 생각난다.

위오(蒍敖)가 난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몽택에 살았다.
어느 날 괭이를 메고 밭으로 갔다.
밭 가운데 양두사(兩頭蛇)를 보게 된다.

“내 듣건대 양두사는 상서롭지 못하여 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한다.
그러하니 나 역시 죽게 되겠구나.
다른 사람이 이 뱀을 보면 그 사람도 죽는다.
나 혼자 죽으면 될 일인 것을.”

그리고는 괭이를 휘둘러 뱀을 죽이고는 밭둑에 묻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 앞에서 울었다.
어머니가 연고를 물었다.
위오가 답하여 말한다.

“양두사를 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합니다.
오늘 소자가 이를 보았습니다.
어머니를 앞으로 모시지 못할까봐 이리 우옵니다.”

“그 뱀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다른 사람이 볼까 염려되어 죽여 묻어버렸습니다.”

“사람이 한번만 착한 마음을 가지면 하늘이 그를 돕는 법이다.
네가 남을 위해서 양두사를 죽이고 묻었으니 어찌 한번만의 착한 마음이라 하리요.
너는 반드시 죽지 않는다. 또한 장차 복을 받으리라.”

이러고 수일 후,
왕명이 내려 위오는 발탁된다.

나는 우정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하려고 저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잘못인지라 뱀 앞에 그저 참회할 뿐인 것을.

도대체 그와 나는 무슨 인연이 겹겹으로 얽혔기에,
이리도 살변(殺變)의 마당에서 조우(遭遇)하고 있음인가?
‘미안해.’

사농공상(士農工商)
나는 이 말을 어느 정도 믿는다.
상인들은 무릇 세상을 이(利)와 해(害)로 양분한다.
저들은 결코 의리(義理)의 세계에 노니는 족속들이 아니다.
저 말의 좌변(左邊)으로 갈수록 利에서 義를, 해(害)에서 리(理)를 추구한다.

지난 IMF 신탁통치 시절,
김대중 정권은 신지식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들고서는
여러 사람들을 상을 주며 앞잡이 세워 이끌었다.
그가 가진 지식이 돈이 되면 자랑스러운 신지식인이 되었다.
지닌 지식이 돈이 되지 않으면 구닥다리 쓸모없는 구지식인이 되는가?

지식이, 돈이 문제가 아니라,
지식이 돈을 겨냥하게 되면 필시 무리가 따르게 되는 것이 문제다.
사람의 욕망은 가없이 끝이 없는 게라,
이게 불이 붙기 시작하면 별 요상한 짓거리를 다하게 된다.

예전엔 청빈(淸貧)이라 하여,
성품이 개결하고 재물(財物) 욕심이 없어 가난한 것을 우러렀다.
내 고등학교 기술선생님은 청빈에 빗대어,
요즘은 청부(淸富)를 겨냥하여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청(淸)이 부(富)와 어울릴 수 있는가?
아마 결탁은 가능하겠지 싶다.
실인즉 요즘 시대는 어떠한가?
청부(淸富)는커녕 탁부(濁富)라도 기리는 형편인지라,
돈만 잘 벌면 온갖 구린 구석이 많아도 온 천하인이 우러러 따른다.
정부조차 이를 상주고 훈장 붙여주며 부추긴다.

여기 시골도 마찬가지지만 농사를 짓되 농부는 없고 장사꾼이 더 많다.
농사도 곧 비즈니스라며 철저히 이(利)를 추구한다.
농사해서 돈을 벌지 못하면 이도 또한 문제이겠으나,
의(義)를 저버리고 이(利)에 매몰되면 갖은 비행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게 된다.
이리 되면 소비자에게 이(理)가 아니라 해(害)를 떠넘기게 된다.

내가 이곳 이웃에 있는 장미 농원을 구경하게 되었다.
아 차라리 가지를 말았어야 하는데,
거기서 차마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아니 외려 실상을 알게 되어 가기는 잘 간 것이다.

장미를 양액으로 키우는데,
나는 순간 좁은 케이지에 갇힌 닭들, 돼지들이 생각났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양액 트레이 위에 우유 갑처럼 생긴 봉투가 촘촘히 젖통처럼 나와 있었다.
그 안에 주먹만 한 장미 뿌리가 박혀 있다.
괴기스럽게도 장미들은 흙 하나 없는 스치로폼같은 베이스 위에,
마치 종기처럼 부풀은 뿌리 덩어리를 살기 위해 마지못해 얹혀놓고 있었다.

나는 이내 떠올리고 만다.
아아, 저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들은 닭장안의 닭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구나.
도대체 식물이 흙 하나 닿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음인가?
닭은 좁은 케이지에 갇히고, 개들은 뜬장에 얹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흙냄새 한번 맡지 못하고 죽는다.
대답하라.
도대체 이를 꾸민 것은 누구인가?
제 출물에 그 이름도 거룩한 인간이 아니던가?
인간의 악행은 끝이 없다.
가히 요사스런 인간들의 세상이다.

노파심에서 덧붙인다면,
이는 특정한 그 농장주인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도 희생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그를 대표 주자로 앞세워 그 결과를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세간의 실상, 이리 흘러가고 있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감상일 뿐인 것을.
하지만, 그냥 감상으로 치부하기엔 내겐 너무 안타까와 심통(心痛)이 크다.

어떤 농업 선배는 어느 말끝에 이리 말했지.
“... 능률적인 게야.”
능률, 효율지상주의가 온 세상을 휘덮고 있음이다.

아,
식물도 저리 인간의 손에 의해 쥐어 짜내지고 있구나.
팔려간 꽃들은 예쁜 포장지로 감싸져 꽃집 진열대 위에서 억지웃음을 팔게 된다.
부끄럽지만 나는,
저 꽃들의 웃음들이 결코 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마치 마트에 랩에 싸인 고기가 얼마 전까지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고,
그저 여느 차가운 공산품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위장되듯이.
장미 역시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멀쩡히 동원되고 말겠지.
아름다운 저들 청춘남녀는 슬픈 장미의 아픔을 알기나 할까?

동물들도 쥐어짜고,
식물들도 몰아쳐대고,
그렇다면 인간들은 누가 쥐어짜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매미-사마귀-까치-장자로 이어지는 엿봄의 연환(連環) 구조,
당랑규선(螳螂窺蟬)이란 무엇인가?
매미를 노리는 사마귀, 그 사마귀를 노리는 까치, 까치를 노리는 장자.
장자를 꾸짖는 산지기 ...
장자는 호들짝 놀라 집에 돌아와서는 3개월간 뜰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하다면 그대를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 참고 글 : ☞ 2009/10/05 - [소요유] - 엿보는 자)

가끔 농부란 이름으로 불리우되 실인즉 장사꾼에 더 가까운 사람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삼지사방 돌아다니며 자랑스러이 공언하듯이 장사꾼으로서 농사를 대한다.
meat is meat.
농축산업자들은 식물, 동물이 생명으로 보이지 않는다.
비즈니스의 객체로 보일 뿐이다.
거세된 생명 현장.
오늘 저들 상인을 우리는 신지식인, 모범적인 농업인 따위로 부른다.
이름이 어떠하든 실인즉 따지고 보면 돈 잘 버는 이의 대명사일 뿐인 것을.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저러고도 꼬박 일요일엔 교회, 절에 나간다.
거기 예수를 만나면 예수는 어떤 형상으로 나타날까?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계실까나?
아마도 장궤(掌櫃)가 주판을 열심히 놓듯 그리 셈을 하시고 계시지나 않을까 싶다.

언젠가 기독교 신자인 어떤 이는 이리 말했다.
절대 사람들은 예수같이 될 수 없다.
이 말은 뒤집으면 곧 일반 사람들은 예수와 같이 엄격히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살부살조(殺佛殺祖)란 말이 심금을 올리는 것은 무엇인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말이니,
결국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예수를 죽인다는 말은 무엇인가?
네 마음의 우상, 마음속으로 만들어낸 예수를 죽이라는 말이 아닌가?
절대 예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당신 자신과,
예수가 멀리 동떨어진 곳에 있는 한,
당신 자신의 안전은 확실히 챙겨진다.
그렇지 않은가?
십자가에 절대 못 박힐 일은 없어지니까 말이다.
대신 위세등등한 완장처럼 예수는 당신 팔뚝에서 번쩍번쩍 폼 나게 빛난다.

저들은 예수가 겁이나,
나는 절대 예수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애저녁에 한 금 긋고는 그 밖에 물러나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정직하게 말한다면 약삭빠르다, 야비하다고 일러야 할 것이다.
저들은 이곳 더러운 세상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법칙을 알고 있음이다.

7일 중 6일은 남 해(害)치며 제 잇속은 차리고 싶은 대로 다 차리고,
단 하루만 예배당에 가서 거룩한 양 의뭉 떨며 성전에
하나님을 돈다발로 입막음하고 있음인 것이다.
자신은 절대 예수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서,
그의 통성기도는 더 처절히 핏빛 절규가 되어 새벽녘 삼이웃 온 동네 사람을 깨운다.
통성기도가 연기처럼 머리카락 풀고 하늘가로 가닿을까?
천만에 그의 유일한 효능은 일하고 지친 어진 이들의 새벽 단잠을 깨울 뿐인 것을.

예수란 이름은 다른 게 아니다.
그는 신성을 자신의 행위로서 삶에서 피 흘리며 실천적으로 입증한 분이다.
그런데 오늘 날 일주일에 단 하루 예배당에 가서 연봇돈 바치는 것으로서,
예수의 삶을 훔쳐내고 있는 도적떼들이 차고 넘친다.
저이의 말처럼 ‘일반사람들은 절대로 예수처럼 될 수 없다’라고 하는 한,
일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골백번을 예배당에 가서 무릎 꿇고 기도를 바쳐도,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저들은 그러하기에 한 마디로 도적인 게다.

살부살조(殺佛殺祖) 하려면,
매일 현장에서 칼을 갈아야 한다.
부처, 예수를 만나는 족족 죽이려면 무딘 칼로 되겠는가?
7일 중 단 하루만 예배당 가서 폼 잡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노릇인 게다.
내가 보기엔 아무리 둘러보아도 참 기독교인은 예수 한 분밖에 없다.
역시나 참 기독교인이 되려면 예수를 죽일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불교도도 참살이를 하려면 역시 살부살조하는 길 밖에 다른 수가 없음이다.

아무리 고추 수확량이 많으면 뭣하나,
농약이 미처 씻기지도 않았는데,
이를 따서 말리며 시장에 내놓는다.
농약이 범벅인 저 말린 고추를 소비자가 과연 씻어 먹을 수 있음인가?
(※ 참고 글 : http://blog.ohmynews.com/feminif/343894)
사농(士農)이 제 자리를 버리고,
상인(商人)이 되면 저런 해망(駭妄)스런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음이다.

때문엔 신지식인, 돈 잘 버는 벤처기업인이 훈장을 받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온 천하인을 모두 상인으로 만들기로 작정하지 않고서야,
어찌 정부가 저 짓을 앞장 설 수 있음인가?
김대중 정권의 신지식인은 그나마 국민들을 상대로 좌판을 편 것이지만,
이명박 정권은 아예 몸소 손발 벗고 나섰다.
4대강 죽이기 사업을 돈 잘 버는 사업이라고 삽질을 하고 있음이다.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다.

사농공상.
각 그 위격(位格)을 지키려면 역시나 사람이 발라야 한다.
하지만 사(士) 즉 지식의 세계도 이미 정부에서 앞장서서 유린했는데,
하마 농(農)이라고 장사꾼이 들어와 헤살을 놓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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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0. 9. 26. 1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