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탈(肉脫)
20여일 전에 죽은 뱀이 벌써 육탈이 되었다.
추석 전날 예초기로 해(害)한 뱀을 바로 땅에 묻기 안타까워
그냥 풍장(風葬)을 시켜두었었다.
풀밭에 누운 채 바람에 산화((酸化) 아니 산화(散華)되길 바랐다.
그랬던 것인데,
어제 보니 이리 육탈이 되어 있다.
무른 살은 모두 바람에 실려 허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가시 바늘처럼 앙상한 형해(形骸)만 남아 지난날을 허허로이 추억하고 있다.
살덩이는 살아 있음에 그리도 끈적끈적 육욕(肉慾)을 실실 흘리지 않았던가?
그러던 것이 이젠 뼈다귀만 남아 말라가고 있다.
아아,
산다는 것은 실로 얼마나 허망(虛妄)한가?
살덩이의 의지, 욕망 ...
미망(迷妄)일지니.
저 뼈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처럼 하늘가로 흩어지고 말리.
이런 기약은 일편 허무하지만,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다.
나는 애시당초 끈끈한 것은 기휘(忌諱)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문득 떠오른다.
예전 소시적 침 선생님은 이리 말했다.
“여자는 혈(血), 남자는 기(氣)라 ...”
혈은 곧 살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여자는 음을, 남자는 양으로 바꿔 말하는 것이 혹간 불러오는 오해를 피할 수 있다.
여자에게 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이 있음이요,
남자에게도 양, 음이 함께 있는 것이니.
하여간 지금 여기에서는 혈은 배양액 같은 육즙(肉汁)을 연상해도 가히 좋다.
효모, 미생물을 증식하려면 배지(培地)에다 종균을 넣는다.
적당한 온도만 맞으면 이 때 비로서 기가 돌며 맹렬하게 증식된다.
그렇다.
진흙덩이에 생기가 불어넣어지면 사람이 된다.
이 신기한 신화, 전설의 세계가 저 뱀에게도 있었음이니,
연기처럼 사라진 오늘의 육탈 현장,
여기 남은 마지막 뱀의 형해는 내겐 또 하나, 구약의 증거이다.
허나, 이게 굳이 사람에게만 한정된다면 구약은 그야말로 허구다.
주를 믿지 않으면 사탄이라고 외치는 지하철 전도사들의 외침은,
저 육탈된 뱀의 형해 앞에 내겐 구라에 불과하다.
뱀이 이브를 유혹했다는 말씀,
역시 꾸미고 다듬는 말의 기교,
수사(修辭)에 그쳤어야 할 뿐인 것을.
천추(千秋)의 억울한 뱀을 나 홀로 변호한다.
기독교가 명색이 고등종교라 자처하려면,
뱀을 사탄으로 일방 몰지 말아야 한다.
저들이 사탄인 한, 내겐 기독교는 미신에 불과하다.
내가 처에게 말한다.
“요즘은 뱀을 거의 하루에 하나씩 본다.
저들이 나를 만나면,
슬쩍 나를 쳐다보며 파르스름 빛나는 몸을 틀어재끼고는 풀섶으로 사라진다.
제법 귀엽다.”
“미쳐가는군.”
그렇다 나는 미쳐가고 있다.
진작 미쳤어야 하는데, 미상불(未嘗不) 게을렀다.
처음엔 약간 어색하더니만,
요즘엔 저들의 현란한 꽃무늬가
마치 긴 스란치마를 끌고 침실로 들어가는 여인네처럼 너무 고혹적이다.
이젠 풀섶을 지나쳐도 저들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
내겐 이젠 밤도, 뱀도 무섭지 아니하다.
저들은 내겐 친구인 것을.
(※ 참고 글 : ☞ 2008/02/15 - [소요유/묵은 글] - 어둠의 계조(階調))
나는 어느 덧 저들을 사뭇 가까이 이해하고 있었던 게다.
저나 나나 피차 자신의 길을 걷고 있음이다.
한번 저들을 쳐다본 적이 있는가?
외로운 길.
그 길을 홀로 걷고 있는 우리들.
그저 그뿐인 것을.
오늘 만난 꽃길.
저들에게 삼가 바쳐 함께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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