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先有鷄,先有蛋?’
“달걀이 닭이 되고, 닭이 달걀이 되는 이치는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가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게 과연 답이 있기는 있는가?
하기사 얼마 전엔 달걀이 먼저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떠드는 기사를 보기는 했다.
나 역시 달걀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 이유를 말하기는 여기 이 자리가 제법 버성기니 이는 차후로 미루기로 하자.
본원적인 세계라면 모를까, 차별상(差別相)이 펼쳐지고 있는 이 세상엔
달걀이든 닭이든 무엇이 간에 반드시 어느 하나가 먼저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이런 질문을 접했을 때,
때에 따라서는 그럴 듯하니 답해줄 말로서는,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적당하다.
안과 밖 동시에 역사가 일어나야 알은 깨진다.
이게 여간 감동적인 서술구조가 아닌던가?
과연 그런가?
헷세의 데미안에선 이리 읊어지고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시스다.”
여기 啐은 있는데 啄은 부재하다.
풍번지동(風幡之動)의 고사는 또한 어떠한가?
(※ 참고 글 : ☞ 2009/01/14 - [소요유] - 바람 부는 날)
여기엔 유심(唯心)의 철학으로서,
번뇌에 빠진 두 우승(愚僧)을 무두질 하고 있다.
다만 ‘先有鷄,先有蛋?’의 문제는 역시나 혜능은 가여운 우중(愚衆)을 향해 답해주지 않고 있다.
그런가?
나는 진작 이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 참고 글 : ☞ 2008/02/23 - [소요유] - 황희-일리-삼리)
나는 이 땅에 끊임없이 문제가 벌어지는 것은 시시비비를 따지기 때문이 아니고,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先有鷄,先有蛋?’의 문제는,
기실 그게 달걀이 먼저이든, 닭이 먼저이든,
양단 간 그 무엇이 되었든 어느 한가지로 밝혀지지 않는데 있다고 본다.
현실에선 적당히 두루 뭉실 넘어가는데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우리네 속담 중의 하나,
‘좋은 게 좋은 것이야’
이 말이다.
이 문법은 평화를 빙자하여,
힘없고 정당한 사람을 짓밟는 사회적 구조를 구축하는 음흉한 암계(暗計)의 첫걸음이다.
한마디로 파렴치, 깡패들의 문법인 게다.
예컨대 삼성도청 문제가 불거졌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경언 유착과 도청 문제 중 도청 문제가 더욱 중요하고 본질적이다.”
이리 말하며 의도적으로 ‘先有鷄,先有蛋?’의 문제를 피해갔다.
한마디로 원인무효라는 것인데,
‘先有鷄’가 아니면 ‘先有蛋’일 터,
법이라는 게 이를 밝히자고 칼과 저울로 세상을 째고 칭량하자는 게 아니던가?
법을 배운 사람이 법을 그리 허술히 대하더니만 그는 그 대가를 치루고 만다.
법으로부터 입신(立身)하였으나 종국엔 정치로 인해 몰신(歿身)하지 않았던가?
법을 배운 사람은 법을 끌어들여 ‘先有鷄,先有蛋?’의 문제를 파기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도를 빙자하여 이 문제를 우회한다.
나는 이게 法, 道가 아니라 실인즉 정치라고 생각한다.
실종된 법, 도의 자리에 언제나 그러하듯이 정치가 자리잡고 있다.
물론 이 시대 이 땅에 횡행하는 그 정치도 가짜인 게지만.
어쨌든 그것을 우리는 정치라고 부른다.
그래도 바른 사람은 모두 알아 듣는다.
때문에 세상엔 시시비비가 여름철 하수구에 꾄 하루살이 떼처럼 와글와글 들끓는다.
덕분에 잠자리 떼는 먹을거리가 많아서 행복하겠지만,
하수구 옆 외양간에 메인 소들은 연신 귀를 펄럭이고 꼬리를 휘두르며,
긴긴 여름밤을 지새우며 울부짖는다.
얼마나 원통하고 고통스러울까?
애꿎은 소는 잠자리 떼의 탐식(貪食) 때문에 세상에서 저버림을 받고 나락에 떨어졌음이다.
누가 그리 했는가?
이 물음을 절박하게 받아들여야,
‘先有鷄,先有蛋?’이 문제가 바로 풀린다.
‘先有鷄,先有蛋?’
이 질문을 던진 이에게 나는 되묻는다.
과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문제냐?
나중 이게 치고받는 소용돌이에 휩쓸리다보면 너나나나 다 똑같아 보인다.
그리하기에 즐탁동시가 제법 그럴듯한 답처럼 보인다.
하지만 원인 없이 결과가 있을까?
마음을 비우고 허령(虛靈)하게 임하면,
현실에선 최초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게 닭이 되었든 달걀이 되었든,
무엇이 먼저인가?
이 답을 회피하면 아니 된다.
‘先有鷄,後有蛋’
‘先有蛋,後有鷄’
차별상(差別相)에 거(居)하는 존재들은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아니면 누구처럼 몰신(歿身)을 면키 어렵다.
사뭇 준엄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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