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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의 미학(美學) 구조

소요유 : 2010.11.10 12:36


화두(話頭)

벽암록, 무문관, 종용록 등의 선어록은 과연 진리의 뗏목인가?
선문답을 통해 과연 피안에 이르를 수 있는가?

김선동의 만다라를 읽다보면 노승 지암이 법운에게 말하는 다음 장면을 만난다.

“여기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넓어지는 병이 있네.
조그만 새 한 마리를 집어넣고 키웠지.
이제 그만 새를 꺼내야겠는데 그 동안 커서 나오질 않는구먼.
병을 깨뜨리지 않고는 도저히 꺼낼 재간이 없어.
그러나 병을 깨서는 안 돼.
새를 다치게 해서도 물론 안 되구.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

법운은 이 화두를 짊어지고 운수납객(雲水納客)이 된다.
(※ 雲水納客은 雲水衲客 또는 雲水衲子라고도 쓴다.
衲이라면 곧 수행자, 스님을 가리키고 있다.
허나 納은 들은 상태를 뜻하니 어느 특정 집단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병 속에 갇힌 새 울음을 아직도 어쩌지 못하고 있다.
그는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이름만 그럴싸한 운수(雲水)따라 골골 방방 떠돌아다닐 뿐,
여직 폐포파립(敝袍破笠) 고단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한다.
하지만 지산은 술 처먹고 계집질하는 등 파계승으로 불리우지만,
한 세상 실컷 먹기는 잘 먹고 사라지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수지 맞춰 장사 잘하고 떠난 것은 아닌가?

최근 마주한 이런 이야기 하나.

“어떤 한 고승이 1미터짜리 동그라미를 작대기로 땅에 그린 후
수행하는 스님에게 안에 들어가도 백대요. 밖에 나와도 백대요.
대답을 1분 안에 안 해도 백대다.”

이것의 답은 동그라미를 지우는 것이란다.
과연 그러한가?
나는 이와 유사한 옥련환(玉連環)에 대하여 기왕에 적은 적이 있다.
(※ 참고 글 : ☞ 2008/10/08 - [소요유] - 골디우스의 매듭과 옥련환(玉連環))

이런 따위의 얼개를 가진 이야기들,
화두는커녕 그냥 퀴즈 정도에 불과한 문제는 지천으로 널려 있다.
이 꾐에 빠져버리면,
마치 코뚜레에 꿰인 소처럼 가련한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끔찍한 노릇이다.
그것도 자청해서 말이다.

화두란 부정(否定)의 미학(美學)이다.

내가 소싯적엔 회사에서 차출되어 합숙훈련에 참가한 적이 있다.
해병대 복장을 한 조교들이 거의 군대식으로 뺑뺑이를 돌린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군대에서도 그 신물이 나도록 당한 고문을 여기서 다시 되풀이 하다니.
직원들을 가학의 도가니에 몰아넣고,
아마도 경영자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노예들로 닦여져 나올 사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시대의 퇴물 군국주의자들 같으니라고.
지옥이나 가라지.

거기 구색으로 넣어둔 어느 그럴 듯한 시간 중에 하나,
강사가 논리적인 문제 열 개를 내놓고 풀라고 한다.
여러 회사로부터 수백 명이 차출되어 왔는데 열 문제를 모두 맞춘 사람은 유일하게 나 하나였다.
그 날의 운수였을 뿐이겠지만,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니,
이리 논리적으로 사물을 접근하는 한,
절대 화두를 제대로 풀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다.

화두란 부정(否定)의 미학(美學)인 게다.
일상을 부정하고, 논리를 부정한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인 선(禪)의 세계이니,
의당 언어, 논리로서는 길을 물어 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화두란 부정(否定)의 미학(美學)이라고 부른다.

위에서 동그라미 문제의 답은 어떤 이는 친절하게도 동그라미를 지우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게 답이든 아니든 간에 애초에 저 문제를 내놓은 땡중은,
아마도 다음번에 당장 이리 고쳐대며 심술을 부렸을 것이다.

“어떤 한 고승이 1미터짜리 동그라미를 작대기로 땅에 그린 후
수행하는 스님에게 안에 들어가도 백대요. 밖에 나와도 백대요.
대답을 1분 안에 안 해도 백대다.
단, 동그라미를 지우면 아니 된다.

이렇게 되면 ‘병속의 새’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병속의 새’에서도

그러나 병을 깨서는 안 돼.
새를 다치게 해서도 물론 안 되구.

이리 shield를 친다.
마치 원폭 보호요새처럼,
MB의 지하벙커처럼,
세상과 단절된다.

shield도 하나가 아니라 중중무진(重重無盡),
겹겹이 쳐내놓아야 그럴 듯이 삼삼한 공안(公案)이 된다.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부정 ...... = (否定)n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의 세계,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차례로 쳐 뚫고는,
비상(飛翔)하여 현실을 초월하려면 부득불 (否定)n이란 이름의 뗏목을 타야한다.

이 때, 언어는 도단 되고,
문자는 꺼꾸로넘어지고 만다.

그러하니 제 아무리 논리적인 문제 열 개 아냐 백개를 잘 맞춘다한들,
그런 식으로 가을 서리처럼 차갑게 벼린 이성을 가지고 이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겠는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병속의 새’
이 화두를 풀겠다고 대든 이들의 이야기들을 한번 들어볼까?

A. 병 속에 내가 들어간다. 안과 밖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가?
bongta : 덕산(德山) 방(棒)하나 먹거라.

B. 병 주둥아리처럼 내게 욕심이 많으니 그 욕심으로부터 벗어나련다.
bongta : 임제(臨濟) 할(喝)이나 받아라.

나는 저 문제를 풀었다.
아니 저런 따위의 문제로부터 걸림이 없고 매임이 없다.
이 소식은 내게만 유효한 것.
내게 묻지 말라.
그대의 것은 그대가 풀어야 한다.

내가 한 때는 머리를 싸매고 무문관, 벽암록 따위를 몇 차 들춰 보았지만,
이제는 마치 저것들이 퀴즈대왕 뽑는 싸구려 TV 프로처럼 싱겁기 짝이 없다.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부정 ...... = (否定)n
긍정의 긍정의 긍정의 긍정의 긍정 ...... = (肯定)n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전자는 끊임없는 자기 부정, 반전이 있다.
마치 살모사처럼 살모(殺母)하고,
개구리가 올챙이를 잡아먹듯 살자(殺子)하는 역동적인 연환(連環) 구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후자는 n으로 어디 뒷골목 싸구려 퇴물 작부 얼굴에 덕지덕지 회분칠하듯,
골백번 덧씌우기를 하여도 기껏 자기 강화 외에는,
아무런 새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 형식을 제대로 꿰뚫게만 되면,
공안이 1800개든 오만 개든 제 아무리 많다한들,
그리고 그대가 은성철벽(銀城鐵壁) 험한 요새에 갇혀 있다한들,
단박에 깨드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리 깨뜨린다고 상이라도 주는가?
하다못해 퀴즈 왕이라도 되면 해외여행 티켓도 주고,
황금 몇 냥이라도 쥐어주지만,
화두는 제 아무리 깨뜨린다하여도 득이 없다.
본래 진면목으로 되돌아가서가 아니라,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두더지 게임하듯,
보는 족족 화두를 깨뜨린들,
그게 전자게임 짱먹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문제는 부정의 미학은,
마치 쏜 화살이 상대에게 가서 틀어박히고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와서는 아니 되는 것처럼,
이 차안(此岸)의 세계에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안(彼岸)에 가닿았을 때라야 생명력을 득한단 말이다.

게임 짱은 오늘 짱 먹고 내일 다시 출전한다.
이것은 그가 아직도 차안(此岸)을 서성거리고 있는,
담판한(擔板漢)에 불과하다는 증거인 것을.

그러한즉,
진정한 게임 짱은 오늘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마우스 위에서 까딱까딱 거리던 그 녀석 검지 손가락을 당장 도끼로 찍어내어 끊어야 한다.
자비는 이리도 절절 삼엄한 것이다.

사타구니 밑에 물 마를 새 없는
기루(妓樓)에 적(籍)을 든 창부(娼婦)가 그 짓을 하루에 열두 번을 한다한들,
사랑을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화두를 제 아무리 잘 푼다한들,
제 앉은 자리 밑바닥이 언제 뻥하니 밑으로 허물어져 무간지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
게임 짱, 화두 짱은,
그저 스타일리스트, 쟁이(匠人), 기능인일 뿐인 것을.

나는 화두를 더 이상 마주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을 걸어 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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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산들 2011.07.14 11:35 PERM. MOD/DEL REPLY

    역시 선생님!!
    옳소 옳소입니다.
    제가 쓰려던 글과 마음을 올리셨군요.
    그러나 화두를 타파하면 더욱 공감하는 말이 된다는...
    간화선의 문제 핵심이기도 할 것입니다.

  2. bongta 2011.07.14 23:29 신고 PERM. MOD/DEL REPLY

    제가 사병시절 자대를 떠나 잠시 다른 부대에 배속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 한 사병이 벽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놓고, 무엇인가를 한다고 하더군요.
    일원상(一圓相) 앞에 두고 무심으로 선을 닦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나보다 까마득히 높은 선임이었고,
    나는 객이라 그저 밥 한 그릇 얻어먹기도 눈치가 보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말 한 마디 나눠 볼 기회도 없이 지내다가 그 부대를 떠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자살하였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간화선을 정통으로 칩니다만,
    묵조선(默照禪) 한줄기 빛도 그 자살한 선임병이 닦았듯,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왜 아니 염불선은 없겠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귀농을 하였는데,
    자생 토착 종 풀을 제외하고는,
    외래종, 귀화종 잡초들은 씨를 말려야 된다고
    악착같이 캐어내더군요.

    저는 돼지풀 같이 악성 종을 제외하고는 잡초간 별로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다 시절 인연되어 이 땅에 들어온 것 제 명운대로 사는 것임이라.

    여기 시골엔 외국에서 이리로 시집온 여성분들을 가끔씩 보곤 합니다.
    한국 사람들 중엔 이들을 백안시하고, 그 아이들을 깔보고 핍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인종 차별이 나쁘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상식입니다만,
    이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최소,
    제 필요에 의해 나라 안으로 끌어다 놓고는,
    이리 박대하는 태도만으로도 저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생태교란이니 혈통보존에 문제가 생긴다고,
    차별을 당연시 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저는 가만히 묻습니다.
    그래 당신은 얼마나 순혈이기에.
    네 서씨 피 안에도 수천래 안씨, 김씨, 이씨, 박씨 피가 네 어미, 아비 조상으로부터,
    한 점이라도 섞이지 않은 인간이 있던가?
    몽고족, 왜족, 거란족 ... 이들 피는 행여 아니 섞였을라고.

    안도현의 연탄재처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까짓 한국인이라는 알량한 국적 하나 가지고 열에 들 떠 으시대는가?

    정녕 순혈이 있다면,
    존재는 모두 다 다만 제 홀로 자신에겐 순혈인 것을.
    이것을 부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한 것이고.

    순혈을 재는 척도는 붉은 피가 아니라,
    푸르디 푸른 자존(自尊)인 것이지요.

    이를 바르게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내 타존(他尊)으로 나아가지 아니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를 존재(存在)의 형식으로 고고(呱呱)하니 외친 선언의 말씀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아니겠는지요?

    처용가를 당연 아시겠지요.

    서울 밝은 달밤에
    밤 깊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내 아내) 것이지마는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은(내 아내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처용이 이란 사람이란 이야기도 있지만,
    하여간 남방으로부터 표류한 사람이기 십상일 것입니다.
    왕은 그에게 여자를 하나 주선하여 주었는데,
    필경은 외간 남자가 겁간을 하였거나,
    계집이 문란하여 화간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를 역신이라고 말하지만,
    외국인을 토착인이 깔보아,
    그의 처를 농락하였을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그런데 처용은 저리도 무심 담담하니,
    그가 과연 도량이 넓어서 그리 하였을까요?

    저는 반대로 체념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여기 제가 머무르고 있는 시골은 텃새가 제법 사납습니다.
    지금처럼 개명한 세상에서도 이러한데,
    그 옛날은 오죽하였을까 저는 그리 생각해봅니다.

    처용은 아마도 왕따를 당하고, 이리저리 휘둘림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친구는커녕 피붙이 하나도 없는 이국땅에 홀로 남겨진 그를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서라벌 높이 돋은 달만은,
    그의 서러운 처지를 굽어 살피셨을 것입니다.

    저는 간화선이든 묵조선이든 차별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중국불교, 한국불교, 일본불교 이리 나눠 우열을 짓지도 않습니다.
    한국사람, 필리핀 새댁, 월남댁 나눠 인종 차별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외래 잡초를 이 땅에 부러 들여올 까닭은 없지만,
    기왕에 들어온 것을 민감하게 다 뽑아내자고 대들지는 않습니다.
    대체로 시간이 지나면 피아간 세력이 적절히 대립 경쟁하고,
    조화롭게 자리 나눠 균형을 이루는 게 상례입니다.
    황소개구리만 하여도 초기엔 생태계를 쑥대밭 만든다고,
    온 나라가 걱정하고 현상금을 걸고 거국적으로 잡아들였습니다만,
    요즘엔 문젯거리로 제기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한국 사람보다 월남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 토종 민들레보다 서양민들레를 더 아낀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분명 저의 선호 대상은 특정 객체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런 개인의 선호 수준이라는 것은 주관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 개인의 선호 때문에 타인의 선호 행위를 방해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가령 한국사람 하나가 있어,
    한국불교보다 중국불교를 더 좋아한다든가,
    중국불교보다 한국불교가 훨씬 수승하다고 주장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선호라든가 소신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선택 행위를 타당한 객관적 평가도 없이,
    폄훼할 수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
    대개 이런 류의 문제는 시비(是非) 이 경계를 넘기 일쑤입니다.
    즉 시비.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선호의 문제,
    아니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까딱 생각을 외곬으로 몰아가다 보면,
    네 피를 왜 자각하지 않느냐?
    너는 한국인인데 왜 외국 것을 따르고 추종하느냐?
    사대주의자, 혹은 매국노 아니냐?
    이리 물으며 상대를 궁박하게 됩니다.
    국수(國粹)는 이리 오도(誤導)된 자존(自尊)의 망토를 걸치고,
    전도(顚倒)된 가치(價値)의 칼을 들어,
    또 하나의 자존(自尊)들을 무참히 버혀나갑니다.

    이쯤되면,
    순혈은커녕 더러운 고름 덩어리가 횡행하며
    혈관 곳곳에 초소를 세우고 사나운 파수(把守)를 섭니다.
    자신을 지고지순한 자리에 앉히고 세상을 내리 굽어 검열합니다.

    독존(獨尊)이라는 것이 실인즉,
    세상을 해체하는 길인데,
    이를 오독하게 되면 옭는 길인줄 알게 됩니다.
    부처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 말씀은 탁장(拆墙) 즉 온 세상의 벽을 터 허무는 선언 명령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다만 제 길을 갈 뿐인 것을.
    그리하여 제 블로그에 내단 간판에도 있듯 소요유(逍遙遊)할 뿐입니다.

    제가 가지 않은 길이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진작 이리 들어와 저리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지만,
    둘 중 하나 택하여 걸어온 이 길도 충분히 사랑스럽고,
    앞으로 신나게 모험해야 할 길이 길게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걷는 것일 뿐인 것임을.

    제 서울 등산 길목,
    목판에 다음 시가 적혀있어,
    어쩌다 발걸음이 멈출 때는 읽어보곤 합니다.

    <프로스트 - 가지 않은 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그나 저나 답글로서의 위치를 한참 벗어나,
    제 홀로 길 내서 달려간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마, 돈키호테도 이런 심정이었을까나?
    글을 쓰다 보니 앞 귀(句)가 뒷 귀를 내달고,
    뒷 귀가 앞 귀를 따라 자기결정력을 갖고 이리 굴러가더군요.
    죄송합니다 널리 해량하시길.

    선생님의 글을 단서로 글을 써갔으나,
    결국 이와 무관한 제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좀 힘이 들더라도,
    글 수레가 오르막길에 있을 때 밀고 가야지,
    내리막 길에 있을 때는 이리도 내닫는군요.
    또 하나의 깨달음.

  3. 산들 2011.07.15 11:38 PERM. MOD/DEL REPLY

    선생님, 아까운 시간을 들여 이리 말씀을 많이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생님의 말씀 전부 공감합니다.
    자의식이 강한 저로서도 무척 닮은 꼴이군요...

    텃세는 어디나 강한가봅니다.
    저는 여기서 그것을 느낍니다.
    논술교실을 열었는데 외지인이라
    서울에서의 유명세도 무용지물이 되어
    소수의 학생이나 일은 많으나 적으나 같아서 덕분에 이참에
    이제 저는 오히려 명분좋게 푹 쉬며 시간을 벌어
    제 하고자 하는 일을 도모코자 합니다.

    오랜만에 얼음을 띄운 커피를 마셔봅니다.
    장마가 끝나면 땡볕이 시작된다지요..

    선생님, 그러나 그 무엇에도
    행복하고 좋을 뿐입니다.

    오늘 아침엔 이웃에 있는 친구(도반)이
    옻닭에 전복을 넣어 끓였다며 초대하기에 잘먹었는데
    그 국에 섞은 끓인 녹두죽까지 싸주더군요..
    기력없던 차에 기운이 솟는 날입니다.

    선생님, 좋은 음식 드시며 건강 지키시길
    바라는 여름입니다.

    -두서없는 댓글.

  4. bongta 2011.07.15 12:48 신고 PERM. MOD/DEL REPLY

    어제 늦게 일을 마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요즘 연일 술을 들었더니 조금 몸이 편치 않은 듯합니다.
    그래 오늘은 그저 쉬어갑니다.

    모쪼록 장마철에 건강 유의하시고,
    하시는 일 여의하시길 빕니다.

  5. 산들 2011.07.16 10:45 PERM. MOD/DEL REPLY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담주부터는 본격적인 불볕더위라고 하니 건강 유의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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