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迂)와 우(愚)
내가 앞의 글에서 우(愚)와 우(迂)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 참고 글 : ☞ 2010/11/04 - [농사] - 우공이산(愚公移山))
그 자리에서는 한 주제를 빗겨갈 형편이 아니었은즉 사양해두었으나,
이제 때를 벗어나 새로운 글 하나를 준비하여 보충한다.
우(迂)는 보통 자전엔 ‘굽을 우’, ‘멀 우’ 정도로 소개된다.
우(迂)란 글자의 변(邊)은 착(辵)이라 읽는데 원래 발 모양을 본뜬 것으로,
걷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러하니 역시나 우(迂)란 글자는 멀리 돌아가는 모습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용례로 우회(迂廻)는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는 것을 뜻하며,
우여곡절(迂餘曲折)은 뒤얽혀 복잡한 사정을 말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迂)에는 이런 뜻 외에
언행이 진부하여 시의에 맞는 않는다란 뜻도 있다.
우론(迂論), 우부(迂腐), 우활(迂阔) 따위가 그 예인데,
모두 다 진부하거나 실제와 동떨어진 경우를 뜻한다.
영어로 하자면 unrealistic쯤 된다 하겠다.
그러하지 않은가 말이다.
지름길(shortcut)을 마다하고 멀리 에돌아가고 있으니 응당 비현실적이겠다 싶다.
그런데 우활(迂阔)하다는 것이,
부정적으로 쓰이면 곧바르지 않아 사리에 어긋남을 뜻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뜻이 깊고 넓어 감히 좁은 소견으로는 짐작할 수도 없이 심오한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영어로는 abstruse로 새겨볼 수 있는데,
(이의 반대는 obvious, simple이 해당된다.)
곧 심원(深遠)하여 함부로 파악하기 어려운 모습을 이른다.
이 말을 하면서 방금 나는 장자란 책을 떠올리고 있는데,
아마도 장자야말로 실로 이 우활(迂阔)의 표본이 아닐까 싶다.
사물의 이면에 숨은 뜻을 살피려면 역시나 에돌아갈 수밖에 없는 법.
4대강 죽이기 사업이라는 것도 지극히 ‘현실적’인 저들만의 이해에 복무하려고 기를 쓰고 있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생령들이 무참히 죽어나가고 있는 것을 저들은 알기나 알까?
그래 이것을 차마 못 참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저들 눈에는 unrealistic하고 abstruse하게 느껴질 것이다.
맹자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했다.
‘不忍人之心’
그래 차마 참아낼 수 없는 그 마음,
그게 곧 어짐 아니겠는가?
인(仁) 말이다.
孟子.公孫丑上
孟子曰:『人皆有不忍人之心。先王有不忍人之心,斯有不忍人之政矣。以不忍人之心,行不忍人之政,治天下可運之掌上。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皆有怵惕惻隱之心;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非所以要譽於鄉黨朋友也,非惡其聲而然也。由是觀之,無惻隱之心非人也,無羞惡之心非人也,無辭讓之心非人也,無是非之心非人也。惻隱之心,仁之端也;羞惡之心,義之端也;辭讓之心,禮之端也;是非之心,智之端也。人之有是四端也,猶其有四體也。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自賊者也;謂其君不能者,賊其君者也。凡有四端於我者,知皆擴而充之矣,若火之始然、泉之始達。茍能充之,足以保四海;茍不充之,不足以事父母。』
일부 풀이는 다음 글을 참고할 것.
(※ 참고 글 : ☞ 2009/09/15 - [소요유] - 무측은지심 비인야(無惻隱之心 非人也))
그리고 보면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따지고 보면 이런 사람들이 realistic하게 사는 게 아니라,
실은 unrealistic하게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혹자는 이런 모습을 보고 역량 있게 산다고 말하런지도 모른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좌고우면 따지지 않고 그저 제 잇속만 밝혀 불도저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들.
이런 이들이야말로 내겐 unrealistic하게 보여진다.
도대체가 옳고 그름 시비(是非)에 대한 판단이 없고,
다만 이해(利害)만이 문제가 될 뿐인 사이비들.
가련타 하지 않을 수 없다.
강이란 굽이굽이 에돌아감으로써,
홍수를 절로 예방하고,
물을 제풀로 정화한다.
이런 모습 또한 우원(迂遠)하다고 일러봄직 하지 않은가?
돌아감으로서 멀리 영속하는 이치를.
하지만 무릇 ‘현실적’이라는 사람들,
그래 누구의 말씀처럼 ‘역량 있는 사람들’이란,
이를 참지 못하고 직선(直線)으로 펴서,
천박(淺薄 ↔ 深遠)하니 제 사리를 도모하고 본다.
이 얼마나 obvious하고 simple한가?
유안(劉安)이 지은 회남자(淮南子)의 설림훈(說林訓)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逐獸者目不見太山,嗜欲在外,則明所蔽矣。
짐승을 쫓는 자는 눈으로 태산을 볼 수 없고,
기욕(좋아하는 욕심)이 밖에 있으면,
마음의 밝음이 가려진다.
열자(列子) 설부(說符)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昔齊人有欲金者,清旦衣冠而之市,適鬻金者之所,因攫其金而去。吏捕得之,
問曰:“人皆在焉,子攫人之金何?”對曰:“取金之時,不見人,徒見金。”
전에 금을 구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이른 아침 옷을 차려 입고는 시장으로 갔다.
금을 파는 곳을 거닐다가 그만 금을 훔쳐내고는 빠져나왔다.
마침 포리(捕吏)가 그를 잡았다.
묻기를,
“사람들이 모두 거기 있었지 않은가? 그대는 왜 금을 훔쳤는가?”
답하여 가로대,
“금을 취할 때,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만 금만 보이더이다.”
이 이야기는 기실 회남자의 ‘범론훈(氾論訓)’이란 곳에서도 거의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열자가 사뭇 앞선 책이니 회남자가 글을 수집하여 취합할 때,
이 이야기를 주워 담았을 공산이 크다.
마침 최근에 나는 회남왕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았는데,
재미는 제법 있었으나 역사를 완전히 뭉개뜨려 픽션과 버무려놓았다.
그러하니 동북공정(東北工程) 따위로 태연히 역사를 왜곡하고도 남음이 있을 터.
오늘, 중국인들의 타락을 목도하는 나는,
고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위인들이 이런 후손들을 보고 통곡이나 하지 않을까 싶어,
저으기 착잡해지는 심정을 가눌 길 없다.
동호(董狐)와 같은 사관의 열혈 직필은 모두 다 지난 옛 일에 불과한가?
(※ 참고 글 : ☞ 2009/04/20 - [소요유] - 주관적 역사)
황금은 그저 simple하다.
남의 점포에 있는 것일망정 욕심이 동하면 다른 사람이 보이질 않는 법,
이내 내 손안으로 취하면 obvious 내 것이 된다.
이 얼마나 realistic 한가 말이다.
하지만,
도덕심은 둘째고 포리에 잡히면 옥에 갇히게 된다.
여기까지만 생각하여도 내 욕심을 가라앉히고 참아내야 한다.
이 또한 급할수록 멀리 돌아가는 우원(迂遠)의 공덕을 알 수 있음이다.
4대강 죽이기가 당장 떼돈을 벌어다 줄 것 같은가?
근처 농지 리모델링의 대상자는 2년간 거저 돈을 버는 것 같은가?
그 다음엔 강은 썩고, 농지는 모래밭이라 소출은 나지 못할 때는 어찌할 것인가?
강에 의지하여 사는 수천 수억의 멀쩡한 생령(生靈)들을 생각하는 것이,
그래 그리 unrealistic한 것이더냐?
확금자불견인(攫金者不見人)이라,
금을 앞에 두고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뭇 생령들이 보이지 않음인가?
동정지변(動靜之變)이라,
욕심이 동할 때는 그 뛰고 내리는 마음의 변화를 잘 살펴,
받을 것, 줄 것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애증(愛憎), 희노애락(喜怒哀樂) 따위가 마음 밭에서 뛰어놀 때는,
삼가고 절제하여 허물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죄를 쌓지 않게 된다.
이 또한 회남자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제 제법 길어졌으니 우(愚)는 잠깐 살펴보고 끝내자.
우(禺)는 원래 후(猴) 즉 원숭이를 뜻한다.
조삼모사의 고사에서처럼 원숭이는 어리석은 사람을 빗댈 때 사용된다.
愚는 실인즉 이로부터 전화되어 어리석음을 뜻하게 된 것이다.
그런 한편 愚臣, 愚兄, 愚見 따위로 겸사(謙辭)하여 자신을 낮출 때도 쓴다.
그러하니 대우(大愚)는 크게 어리석은 게 아니라,
거죽으로는 짐짓 어리석은 듯하나 실인즉 현명한 것을 가리킨다.
장자(莊子)에도 若愚若昏,是謂玄德이라하여,
어리석고 혼암한 것을 현덕이라 이르고 있다.
이 지혜의 서(書) 장자엔 愚란 글자가 꼬박 24번이나 등장하고 있다.
제물(齊物), 청정무위(淸淨無爲), 무사망아(無私忘我)하며,
세상을 자유롭게 소요유(逍遙遊)하려면 우(愚)에 친숙할지라.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치적화법과 환경운동가적 화법 (2) | 2010.11.17 |
---|---|
정의란 무엇인가? (2) | 2010.11.11 |
화두(話頭)의 미학(美學) 구조 (5) | 2010.11.10 |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15) | 2010.11.03 |
곰보각시 (2) | 2010.10.16 |
쓰레기 전대(纏帶) (4) | 2010.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