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정의란 무엇인가?

소요유 : 2010.11.11 10:34


내가 실은 밭에 나가 삽질을 해야 하는데,
방사(房事)후 뒷물 하지 않은 계집처럼,
무엇인가 미진하여 마저 부려놓고 밭에 나가고자 한다.

“당신이 전차 기관사로, 시속 100km로 철로를 질주하는 중이라고 가정해보자. 저 앞에 인부 5명이 철로에 서 있다. 기차를 멈추려 했지만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는다. 이때 오른쪽에 있는 비상철로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도 인부가 있지만 1명뿐이다. 전차를 비상철로로 돌리면 1명이 죽는 대신 5명은 살릴 수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대다수 사람은 1명을 희생해 5명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샌델 교수는 질문을 바꿔서 다시 묻는다.
당신은 이번엔 기관사가 아니라 철로를 바라보며 다리 위에 서 있는 구경꾼이다. 이번에는 비상철로가 없다. 저 아래 철로로 전차가 들어오고 철로 끝에 인부 5명이 있다. 이번에도 브레이크가 문제다. 당신은 그때 당신 옆에 서 있는 덩치가 산만한 남자를 발견한다. 그 남자를 밀어서 전차가 들어오는 철로에 떨어뜨리면 남자는 죽겠지만 인부 5명은 살릴 수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지는 않았다.

바로 앞의 글에서처럼,
(※ 참고 글 : ☞ 2010/11/10 - [소요유] - 화두(話頭)의 미학(美學) 구조)
그대 이를 화두인 양 여기며 답을 찾겠다고 안간 힘을 쏟는가?
행여 지적 훈련을 하는 공덕이 있을런가는 몰라도,
그것으로 과연 그대가 정의로워 질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정의는 머리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손, 발로서 거증(擧證)될 뿐이기 때문이다.

정의란,
여기 현재(Here and Now).
그대가 서 있는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실천으로 입증하여야 하는 것이다.

작년 가을에 이웃 밭에 부부가 뿌리 작물을 캐내려고 왔다.
내가 다가가니 그들은 흠칫 놀란다.
집에서 가져온 페트병, 비닐봉지 등속을 박스 안에서 끄집어내놓고는
마악 태우려는 찰나였다.
내게 들키고 말았으니 자리는 갑자기 버성기게 되었다.
아니, 모았다가 밖에 내놓으면 거저 치워가는 세상인데,
애써 도시에서 그것들을 가져와 태우는 저 파렴치한 양심 ‘둘’은 도대체 무엇인가?
저것을 태워 쌀쌀한 가을 기운에 어한(禦寒)을 하겠다는 심산이었으리라.
샌델 책 삼세번을 읽는다한들 저들이 불현듯 정의를 회복하게 될까?

이웃 농원엔 화목 난로가 설치되어 있다.
거기 화구엔 온갖 비닐, 폐플라스틱 용기들이 불쏘시개용으로 들어간다.
저게 불만 붙으면 제법 화력이 좋다.
화력만 좋은가?
쓰레기를 거저 태워버릴 수도 있으니 여간 좋은 게 아니리라.
저것들을 태울 때는 솔솔 역한 냄새가 공중에 퍼진다.
이 아름다운 가을, 겨울 들녘 하늘에 저 짓을 할 수 있음인가?
넋이 부실한 인간이 아니라면,
저 창천(蒼天) 하늘을 이고 살면서 차마 저 패악질을 해냈을 있을까?
샌델 책 오만 번을 읽는다한들 저이가 과연 공의(公義)로와질꺼나?

여기 시골에 와서 보니,
보통은 드럼통을 개조해서 만든 화덕들을 하나씩 갖고들 있다.
저들은 여기에다 틈난 나면 온갖 쓰레기를 태운다.
비닐 등 환경오염물질이 나오는 쓰레기를 애써 가릴 처지들이 아니다.
나 역시 어떤 때는 저 드럼통을 하나 장만하여야겠다는 유혹을 받고는 한다.
물론 태우더라도 종이 나부랭이나 태우지 절대로 비닐 따위는 태우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제는 아예 그런 생각을 접었다.
행여라도 곁에 두고 있다가 실수로라도 잘못 되면 아니 되니까.
화목난로도 접었다.
나는 차라리 전기난로를 설치할 예정이다.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군자이기 때문에 대로를 걷는 것이 아니고,
대로를 걷기 때문에 군자라 이름 하는 것임에랴.
(※ 참고 글 : ☞ 2009/12/31 - [소요유/묵은 글] -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과 군자표변(君子豹變))

내가 여기 밭에 내려와서는 수시로 도로쪽 밭 가장자리를 돌아다니면 청소를 했다.
하지만 채 3일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다시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특히 담배꽁초는 아주 예사로운 것이다.
일회용라이터, 음료수 병, 휴지 등속이 너부러져 있다.
이러다가는 계집 개짐까지 버려지고 말 태세다.
어느 인간이건 간에 내게 들키면,
아마도 평생 지을 수 없는 상처로 각인될 만큼 호되게 경을 치게 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는 급기야 현수막을 내달았고,
cctv를 설치를 했다.
내가 지금은 틈이 없어서 그런데 차차 카메라를 몇 대 추가로 더 달고,
motion detection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기동시킬 것이다.
국내 cctv업체는 이런 기능까지 갖춘 것이 별로 없다.
도리 없이 이 프로그램과 궁합이 맞는 dvr card를 외국에서 조달해야 할 형편이다.
이리저리 찾고 있으니 조만간 구해질 것이다.
이때에 이르르면 담배꽁초 버리다가 내게 발각되면,
나는 기어이 차를 타고 쫓아가서라도,
그 녀석의 멱살을 거머쥐고 논두렁이에 패대기를 칠 것이다.

이들 모두는 내가 보기에는 쌍놈의 후예들이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저들은 절대 양반 농민들은 아닌 것이다.
양반이라면 그래 제 밭에다 저리 갖은 오물을 처넣어두고는 거기서 소출을 거둘 수 있음인가?
돌아다니면서 온 국토를 저리 쓰레기장으로 만들 수 있는가.
저들은 쌍놈의 후예임에 틀림이 없는 게라.

내가 얼마 전 저쪽 길 건너편 밭에도 가보았다.
멀리서 보기에,
여름 내내 온 식구가 매달려 오가기에 참 농사를 열심히 잘도 짓는구나 하였는데,
밭 안은 거의 쓰레기장을 방불하고 있다.
당년도에 흘린 오물이 아닌 것이,
땅속에 깊이 박힌 쭈쭈바 껍질, 병, 비닐봉지 등속이,
홀아비 속곳 뒤집을 때 튀어나오는 벼룩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튀어 나온다.
아무렴, 이들은 필시 양반 농민은 아닌 것이다.
제들 입속에만 들어가면 다행인데,
필경은 저것들이 도시인들의 입속으로도 들어간다.
참으로 흉한 세상이다.
그러하기에 농사는 양반이 지어야 하는 것이다.
쌍놈 농민은 그저 제들 입에나 들어갈 정도로 텃밭이나 가꾸고,
나머지는 모두 양반들이 나서서 지어야 한다.

다시 되돌아와서,
화두가 뭐 별 것인가?
1800개 공안을 전부 풀었다고 고승대덕(高僧大德)이 되는가?
천만에 말씀.
부처님전 앞에서 사르는 향불 하나 아끼고,
시주 쌀 한 톨이라도 귀하게 여기는 승이라야 진승(眞僧)인 것을.

농부가 뭐 별다른 것인가?
제 밭을 정(淨)이 가꾸고,
농약, 제초제 삼가고, 정성들여 가꾸는 것 외에 무엇을 더 구하랴.

시민이 뭐 별 것인가?
담배꽁초 하나 허술히 버리지 않는 것,
바로 여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정의가 뭐 별 것인가?
지금,
당신이 딛고 선 그 자리,
거기에 충실 한 것일 뿐임이라.

그러하기에,
대저, 저기 저 위에 있는 기차 문제는 정의하고 별로 상관이 없음이다.
1800개 공안(公案) 역시 깨달음 하고는 무관한 것임이다.
다만,
Here and Now.
여기 여여(如如)히 내가 바르게 살아가고 있음이,
정의고 공안일 뿐인 것을.

타타타(Tath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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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등명 법등명 2011.09.12 21:38 PERM. MOD/DEL REPLY

    방금 마이클 센덜의 정의란 무엇인가 책을 보고 과연 이문제를

    고승분들( 청안스님, 숭산스님...등)은 어떻게 답을 했을까 고민하던차에 저의 생각을 다시하게끔 해주는 좋은 글인것 같습니다.

    공안도 안되는 그런 문제들을 공안이라고 생각하고 고민한나에게...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듭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은 내용이 논리적이고 모두가 관심있어하고 그를 논리로써 풀어내는 작가의 논리에 사람들이 뭔가 있어보이고 획기적이다 라고 반응하지만, 정작 이책은 '행동(정의의 실천)'에 관해서는 언급하는 내용이 없다는것이 아쉬웠습니다.

    이렇게 글을 쓴것도 우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튼 좋은 공부하고 갑니다.

  2. bongta 2011.09.13 09:23 신고 PERM. MOD/DEL REPLY

    세상에 말입니다.
    위 기차와 같은 문제가 고리 고리 연결되어 제기되고,
    우리의 삶이란 이런 문제를 풀어야 하는 과정의 연속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딜레마에 봉착한 사람들 가운데 급기야 누군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성을 날 세워 논리적 규칙을 세우고,
    말씀의 행법을 다듬어 그럴싸하니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려들 것입니다.
    서양에선 이런 기술이 많이 발달되었지요.
    그게 저는 윤리학 내지는 논리학 그리고 수사학 류가 아닐까 합니다.
    이게 게임이론 따위로 재미있게 전개되기도 합니다.

    가을 들녘에 서면,
    마른 갈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서걱서걱 웁니다.
    마치 노인의 마른기침처럼 윤리학이란 것이 삶의 행로에 끼여,
    삐꺽삐꺽 소리를 내며 양심의 행동 준칙을 줄 세워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여름날 초장(草場)에 서면,
    거기 싱그러운 풀들의 푸르름을 만납니다.
    물기와 빛의 마술,
    그리고 풀들의 생명력이 대지 위에 서서 손을 힘차게 흔듭니다.
    하지만 가을녘 마른 풀들은 잔명(殘命)을 겨워하며,
    혼 줄을 가는 명주실처럼 풀어내며 서럽게 울어댑니다.

    큰 관을 머리에 쓴 대부가 행차를 하자,
    구종(驅從) 별배(別陪)는 ‘휘 물렀거라~’, ‘에라 게 들어 섰거라~’ 하며,
    벽제(辟除) 소리를 거만스레 외칩니다.

    서양의 윤리학이란 것, 정의론 따위의 것이,
    저에겐 한 때 마른 갈대의 울음소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저 처절할 정도의 간절한 정성이 가엽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는 저것들이 벽제소리가 되어 환청처럼 들립니다.
    인간의 오만 같기도 하고 아니 저것은 곧 미망(迷妄)이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제풀로 떠오르곤 하였지요,

    그러다 선사 한 분을 만나봅니다.

    대매 법상(大梅 法常)

    그는 대매산에서 즉심즉불(卽心卽佛)의 길을 갈 뿐입니다.
    세상이 제 아무리 비심비불(非心非佛)을 외치며 홀려도.
    ( ※ 참고 글 : ‘매실 이야기’ http://bongta.com/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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