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완(緩)

소요유 : 2011. 4. 4. 20:50


나는 중학교에 입학 할 때 1차에 실패하고 2차로 들어갔다.
2차는 여러 번거로움을 피하고 그저 집에 가까운 곳을 택하였으니,
요즘 세태에 비교하면 참으로 한가한 셈법이었다.

나는 중학교에서 새로 배우게 되는 영어 공부를 위해,
우선 알파벳을 익히기로 했다.
필법(筆法), 영어로는 penmanship이라 하든가?
간단히 모본(模本)을 보여주는 것을 마련하여 혼자 익혀두었다.

어느 날 아랫동네, 윗동네 동년배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와 함께 영어를 배우자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공부를 홀로 하는 품이지,
여럿이 모여 함께 어울리는 자리가 편치 않다.

어쨌건 형편 따라 저들을 따라 어느 동무 집네 안방으로 한 떼가 둘러앉았다.
저마다 연습장을 꺼내들고 공부랍시고 하는데,
참으로 가관인 것이,
영어가 어떻다는 등 나서서 나발 불고, 알파벳을 다 외었다고 풍을 떨던 아이들이,
실은 실력이 제일 못했던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야 혓바닥 인대를 칼로 끊고 영어에 몰입하는 처지이니,
실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이라 하겠으나,
당시로서는 중학교에 입학하여 알파벳이나 제대로 꿰고 있으면,
갑장(甲長)으로 쳐주는 형편이었다.

나로서는 저 녀석들이 저리 형편없었으면서,
왜 나대었을까 하고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오늘,
나는 수십 년 지난 옛날의 광경을 다시 떠올리고 있음이다.
내가 농원을 조성하면서,
처음엔 뭣도 몰라 그저 선참자(先參者)라는 사람들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았음이다.
그런데 어렴풋이나마 내가 차츰 눈이 뜨이자,
저들이 모두 허재비였구나 하는 깨달음을 뒤늦게 갖게 되었다.

수년간 그 바닥을 굴렀다는 이나,
바로 앞서 충분히 연구를 하였다는 이나,
그들의 말본이라는 것이 모두 허당이었다는 것을 알아채었으니,
고축장(高築墻)이요, 광적량(廣積糧)이고, 그리고 완칭왕(緩稱王)이야말로,
실로 금구옥언(金口玉言)이어라.

그리하자니,
지난 날 내 중학교 입학 직전의 영어 공부 시절이 떠오르고,
전일 본 글로 올려두었던,
高築墻 廣積糧 緩稱王
이 말씀이 새록새록 떠오르던 게다.
(※ 참고 글 : ☞ 高築墻 廣積糧 緩稱王)

특히,
완칭왕(緩稱王)
이게 그리 간단한 말씀이 아니었으니,
주승(朱升)은 공부가 익었음이라,
우리네 농부식 표현대로라면 곰삭아 제대로 발효가 되었구나.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갈 길은 먼데 언제 그를 좇아 따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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