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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朴)

소요유 : 2011.06.23 16:00


내 차가 달린다.
그러다 차도 한가운데 지체한다.
나 어린 소년 소녀들이 당당히 차도를 가로질러 또는 길을 따라,
제 길을 따로 낸다.
마치 허공중에 기러기들이 새로 길을 내듯이,
저들은 제 필요에 따라 차도, 인도 가리지 않고 새 길을 낸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여기 시골은 차도 인도가 거의 구분이 없다.
아니 차도는 아스콘 포장이 되어있으니 그런대로 확인이 되지만,
인도는 좁다랗게 흉내만 내어 있거나,
있더라도 어느 결에 길 따라 걷다보면 슬그머니 없어져 있다.

하교 길 중고등학생은 차가 오거나 말거나,
차도를 가로질러 제 갈 길을 새로 만들어낸다.
그것도 바삐 서두르지도 않고 운전자를 뻔히 쳐다보며 태연히 걸어간다.
이게 내가 살면서 익힌 의식 수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명색이 차도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하다면 차가 오고 있으면 설혹 차도를 걷고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 거죽 시늉만이라도 비켜주는 척이라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러한 것인데, 남/녀 학생 불문하고 나 몰라라 하고,
제 보폭을 그대로 유지하며 무심히 지난다.

두 가지 상념이 뇌리 속을 지난다.

하나는 사람이 먼저지 차가 먼저일쑈냐?
하니 사람이 건널 때는 차도고 인도고 불문하고 멈추어 서서,
저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이 의당 옳은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하니 찻길을 막아서고 있는 저들을 향해 조급증을 부리고 있는,
나야말로 길 위의 불한당이 아닌가?

둘째는 차도와 인도의 구분은 문화적 코드인 것임이라.
시골이든 도시이든 우리는 이런 문화적 지시어를 사이에 두고,
상호 타협하고 양보하고 질서를 확립한다.
이를 통해 상대를 의식하고,
상대로부터 나의 자존을 확인 받는다.
이는 결국 우리 모두의 자존심을 공동으로 지켜나가는 첩경이다.

촌이라 문화(文化)가 미치지 못하고 덕화(德化)가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흔히 촌사람은 순박하고 어질다라고 말한다.
박(朴)이란 무엇인가?

설문해자엔,
朴을
木皮也 또는 木素也라 이르고 있다.

목피는 약재로 쓰인다.
목피는 약성을 간직하고 있음이니,
이는 곧 그 나무의 본바탕이 고스란히 잠겨져 있는 것이다.
나무의 본바탕임이니 이는 곧 木素인 게라,
즉, 나무의 본질, 실체를 朴이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시골 사람들이 순박하다함은,
사람의 꾸미지 않은 본성이 적나라하니 발현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한데 문화란 무엇인가?
나는 진작 문(文)은 곧 식(飾)이라 하였음이다.
(※ 참고 글 : ☞ 2008/03/04 - [소요유/묵은 글] - 무늬, reality, idea)
이리 보자면,
문화(文化)란 곧 식(飾)의 세례를 받은 상태를 이르고 있는 것이다.

차도가 있다.
문화인(文化人)은 저게 사람들이 차란 것을 발명하여,
차가 오로지 다닐 수 있도록 꾸민(飾) 것임을 안다.
그 꾸밈의 내용 안엔,
또한 차의 편리를 위해 다른 이들의 통행을 양보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있음이다.
문화인은 차를 타고 있지 않은 이상,
이런 양보란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
하지만 차를 타고 있을 땐 다른 사람의 양보를 할애 받는다.
이 경우 문화란 꾸밈 장치를 통해,
사회적 자원을 사회적으로 즉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거래한다.

여기 文 즉 飾의 세상엔 상대 즉 사회가 등장하곤 한다.
환언하면 상대를 의식할 때, 아니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때를,
문화, 또는 사회란 말로 바꾸어 이르기도 한다.

반면 박(朴)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
아무런 구속도 없이 애초대로 들에 놓여져 있는 것임인즉,
이를 야(野)라고 이른다.
이 들에 놓여져 있는 사람들은 거래를 모른다.
문화의 세례를 받은 족속들은 이들을 놓여져 있다 하지 않고,
버려져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野에 蠻을 덧붙여 야만(野蠻)이라고 부르며 비웃기도 한다.
하여간 이들은 다만 자기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 뿐이다.

이들 양자에 우열이 있을까?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가?

하지만 우리는 이미 문화의 길을 걷고 있음이다.
호오(好惡)를 떠나 한참 전에 접어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기실 촌(村)이란 둔취(屯聚)의 의미를 갖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집단을 이루기 시작한 상태인 것이다.
사람이 늘어나면 촌락(村落)도 도리 없이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촌(村)이라 할 때는 이미 文, 飾이 작동되고 있음이다.

제 아무리 촌이라 한들,
그 안에 거하는 이들이 이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조야(粗野)하다라든가, 야만스럽다라며,
저들을 의심하고 든다.

무엇을 의심하는가?
같이 더불어 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村이든, 野든 어디런지 갈 수도 있으련만,
우리는 도시를 감히 떠나지 못한다.
이게 태반이 우리네가 묶여 있는 현실이다.

나는 어찌어찌하다 여기 村에 이르렀는데,
다시금 文을 염려하고 있음이다.
이러한 지경이니 감히 둔취(屯聚) 村까지 넘어선 野를 넘볼 수나 있을런가?
거긴 다 벗어 하나도 걸친 것 없는 벌거숭이가 되었을 때나,
기웃거릴 비처(秘處), 별처(別處)일 것임이라.
아득하니 멀고도 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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