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난득호도(難得糊塗)

소요유 : 2009. 7. 23. 09:18


고물할아버지 강아지들.
(※ 참고 글 : ☞ 2009/07/05 - [소요유] - 북두갈고리)

새로 온 강아지 집을 들여다보니,
어두운 가운데 무엇인가 이상한 게 들어 있다.
몸을 구부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비둘기다.
비둘기는 죽어 있었다.

설마하니 저 어린 것이 비둘기를 잡아 죽였을라고?
최근 비둘기들은 필사적이었다.
강아지가 있든 말든 개집 안까지 들어가 사료를 먹어대었다.
요행, 저들 강아지들은 이들에게 그리 심하게 굴지 않는다.
그러하니 저들은 주린 배를 채우려고 위험도 불사하고 곡예를 벌였다.

헌데,
아뿔싸.
시베리안 허스키, 이 녀석 코에 피가 흐른다.
필경 무엇인가 쪼임을 당한 모습이다.
짐작컨대 비둘기가 최후의 일격을 날린 것 같다.
녀석이 성가시게 구는 비둘기를 쫓다가 한 입에 물어버렸을 테고,
물린 비둘기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다가 얼결에 코를 쪼았으리라.
그리고 땅바닥에 내팽개친 것인데,
새로 온 강아지 이 녀석이 물어다 제 집 안으로 끌어 들인 것이리라.

어쩐지 그 극성이던 비둘기들이 모두 다 지붕에만 앉아 있다.
혼이 난 것이 역력하다.
그래도 모이를 분배하자 다시 밥그릇을 향해 대든다.
아, 그 누가 주린 배의 고통을 알리.

나는 비둘기를 거두어,
화단 근처에 묻어주었다.

헌데, 이젠 묻는 것이 능사란 아니란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왜 그런가?
습기 눅눅한 흙이거나,
메마른 흙에 덮이느니,
차라리 정갈한 곳에,
양명(陽明)한 볕 쐬며,
빛바래, 풍화되다,
최후엔 허공중에 바람이어듯 흩어지는 것이 낫지나 않을까?
이런 생각이 주억주억 드는 것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을 저 컴컴한 지하에 버려진 채,
이 풍진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 몹시도 한스럽지나 않을까 싶은 게다.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나중에 맘이 내키면 한번 써 볼 기회가 있을 터,
오늘은 예서 그친다.
(※ 참고 글 :

☞ 2009/08/27 - [소요유] - 바위, 볕 그리고 바람

)

 

삽을 제 자리에 놓아두려는 찰라,
고물할아버지가 들어온다.
양복을 차려입고 당꼬모자를 쓴 차림이 훤하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 한다.

그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물에 젖은 빈 의자를 털며 앉으려 한다.

마침 곁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고물주이답게 모아들인 액자가 적지 아니 마당가에 나뒹군다.
(※ 참고 글 : ☞ 2009/02/19 - [소요유] - 언제 아침이 될거나?)
그가 웬일인지 말을 걸어오려 하는 품세다.
귀치않다.

나는 그가 버정거리는 사춤에 내 말을 전격 껴 넣는다.
내 말은 검광(劍光)이 되어 그의 의식 속을 가른다.

여기 이 글,
“放一著,退一步,當下心安” 좀 보세요.
무슨 일을 하려면 행하기 전 문득 멈춰서야 합니다.
여기 퇴일보(退一步)란 멈춰 서기는커녕 뒤로 일보를 물러난단 말이 아닙니까?
그러길, 마땅히 마음을 내려놓으면 편안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시베리안 허스키 팔아먹으려고,
강아지 하나를 덜컹 또 다시 인수한 그에게,
이리 내려 새기는 내 말의 뜻이 전해질까나?

그의 심장을 헤집고 박아 넣듯,
다음을 새긴다.

“그러하면서도,
비도(非圖)라,
이는 다음에 올 복을 꾀함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마당가를 둘러보세요.
저 아이들이 왜, 어째서 이 진 고생을 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무슨 일을 하려면, 먼저 퇴일보(退一步)하여,
다음을 헤아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몇 푼을 탐하여 대책 없이 일을 저질러서야 되겠습니까?
차마 ...,
죄를 짓는 일이지요.”

 

難得糊塗
“聰明難,糊塗難,由聰明而轉入糊塗更難,放一著,退一步,當下心安,非圖後來福報也。”

“총명하기도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다.
총명한 사람이 어리석게 되기는 더욱 어렵다.
집착을 놔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 마음을 놓아버리면, 편안하다.
바라지 않고 있노라면 후에 복이 돌아온다.”

(※ 糊塗 : 흐리멍텅하다.)

이글은 청나라의 정판교(鄭板橋)의 글이다.
총명하면서도 이를 감추고 은거한 자칭 호도노인(糊塗老人)과의 우연한 만남 중에,
그는 이 글을 지었다.

총명할지라도 난득호도(難得糊塗)인데,
오직 호도노인(糊塗老人)만 홀로 자재(自在)로울 뿐.

고물할아버지는 단 몇 푼에 꾀를 내어,
제 집 마당가를 고통과 신음소리로 젖게 만든다.
난득총명(難得聰明)이라,
어찌 어리석은 이가 총명하기 쉬우랴.
제 홀로 꾀바르다고 얄팍한 셈을 하겠지만,
불능총명(不能聰明)이라.

제 집이면서도,
저 핏빛으로 질펀한 마당가를,
장화를 신고 다닐 터인가?
교회 다닌다는 표식을 거룻배 삼아 노 저어 다닐 것인가?
(핏빛이 결코 비유나 과장의 말이 아니다. 참고 글 : ☞ 2008/04/29 - [소요유] - 낮달)

 

그 액자 곁,
“仁義” 두 글자가 새겨진 나무를 켠 판자가
여기 이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게 덩그란히 처마 끝에 또 걸려 있다.
비둘기가 비린 콩 주워먹듯 잘도 모았다.
뜻도 모르는 채, 부끄럼도 없이 저게 그에게 훈장이어든? 완장이어든?

나는 내친 김에,
말을 다시 내뱉는다.

“인의(仁義) 하면 그저 공자님 말씀이거니 하지만,
저 같으면 이리 새기고자 합니다.
仁은 공자가 주창하신 가르침,
義는 맹자가 주로 주창하신 요목(要目)입니다.
저는 義자를 보면 칼을 연상합니다.

맹자는 이리 말했지요.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왕은 가볍다’라고 했지요.
순자가 말하길 물은 백성이고, 배는 왕이라,
왕이 왕답지 못하면 물이 배를 뒤집어버린다고 했듯이,
맹자는 왕도 왕 노릇을 못하면 몰아낼 수 있다고,
당시 왕 앞에서도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 齊宣王)
의롭지 않으면 왕도 갈아치우겠단 말입니다.

그러하니 이 義자야말로 칼 같이 날카로운 기상이 서려있는 것입니다.
그러함에 어짐(仁)은  의(義)와 함께 여기 짝으로 있지요.
문무(文武), 방패와 칼,
이리 함께 아우러져야 그 뜻이 바로 섭니다.
인(仁)은 그저 사람 좋은 인자(仁慈)함으로 새긴다면,
이는 그 뜻을 좁다란 골목으로 몰아가는 짓이 됩니다.
기실은 인자함보다는 차라리 옳바름에 더 가깝다 하겠습니다.
그런즉 인자가 아니라, 인의(仁義)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낯 선 마당가에 왜 이런 글자들이 있어야 합니까?
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그저 쪼개 태워버려야 합니다.
단 하나의 의로운 행(一枝行)조차 없는 이 집 마당가에 비바람 맞고 서 있는 것이,
이 글자들에겐 차마 견디기 어려운 치욕일 것입니다.
저들은 차라리 태워지길 원할 것입니다.”

수오지심 의지단(羞惡之心 義之端)이라 하지 않았던가?
마땅함.
마땅하지 않은 일에 부끄러움을 느낌이 곧 의(義)이다.
(※ 참고 글 : ☞ 2009/04/12 - [소요유] - 연못 속 고기를 잘 보는 자)
이 義란 칼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 반듯한 사람이 된다.
무릇 반듯하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를 다 할 수 없음이다.
마땅함을 얻지 못하면 부끄러운 노릇이다.

나는 그의 말을 들을 것도 없이 재우쳐 물었다.


“내가 듣기에 할아버지가 교회 권사님이라시는데, 그렇습니까?”

그는 그렇다고 한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도도처처에 다 계시지 않겠습니까?
여기 이 마당가에도 계시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을 모시려면 바로 이 마당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내 집, 내 마당에서부터.
하느님은 어느 곳이나 임재하고 계십니다.”

그는 말한다.


“그래도, 교회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교회에 가야 믿음이 생긴다.”

마치 교회에 가야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회중(會衆,congregation)이지요.
회중이야 뜻 깊고 귀한 모임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이 그곳에만 오실 까닭은 없지요.”

원래 회중은 무리가 모이는 것이다.
필요할 때, 적당한 곳 아무데에 차일을 치고 회중이 회합을 갖는다.
형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게 부르길 그냥 회당(會堂)이다.

그러다 배가 서서히 불러오면 도당(都堂)이 꾸며진다.
으뜸 모임의 집, 우두머리 모임터, 중요 회의소란 뜻이다.
이게 처음엔 중요한 의제를 논하는 회의당으로 출발하다,
나중엔 중요한 사람, VIP들만 모이는 회당(會堂)으로 변질되곤 한다.
그리되면, 그 외의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갈 수조차 없게 된다.
이 때에 이르면 도당(都堂)이 아니고,
도당(徒黨), 즉 불순한 패거리 집단이 돼버린다.

회당 중에 종교적 모임을 갖는 곳이 교회당(敎會堂)이다.
초기엔 아무개 신자 집이어든, 들판이어든, 산상에서든 필요에 따라 회중이 모였다.
하니 어디 별도로 회당이 있음이 아니다.
여기 하느님이 찾아오셨으리,
하느님을 찾아 그 계신 곳에 회중이 모인 것이 아니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여 하느님을 영접하는 바로 그 자리에 하느님이 오셨음이라.
이는 곧 하느님이 어디 한 곳에 주처(住處)하여 계심이 아니라,
나의, 또는 무리의 믿음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하느님이 계신 것임을 증거한다. 
물론 이것은 신자들 입장에서지,
믿음이 없는 자리라고 하느님이 아니 계실까?

그러던 것이 교회당이 세워지자,
이모저모 편리하니 그리로 정해놓고 모인 것임이니,
어찌 교회당이라야 하느님이 계시다고 강변할 수 있으랴.
이리 되면, 사뭇 편리해진다.
하느님 모신 곳에서만 점수를 따면 되니까,
그 밖에서는 맘대로 해도 괜찮지 않은가 말이다.
이쯤 되면 교회당이 아니라,
저들만을 위한 도당(都堂)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내 저들은 불결한 도당(徒黨)이 된다.
또한 성전(聖殿)은 환전상이 모인 거래의 장터가 된다.
이게 예수가 그리 증오하였던,
성전정화의 현장, 바로 그 모습이 아니던가?

그는 주저리주저리 그래도 교회가 중요하단다.
누가 아니 그렇다고 하였는가?
사람은 완벽하지 않단다.
누가 이를 부정했던가?

그가 이 말을 토해내는 것은,
그러하기에 일주일에 단 하루, 1/7회분의 교회가 필요하단 말이렷다.
거꾸로 짚어보면 그 밖에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니,
도리없지 않느냔 소리다.
그러하니 이들에게 교회가 있으니 얼마나 편한가?
나도 못하는데,
언제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이라도 박혀야 한다고 하였든가?
지향이라도, 흉내라도 내야 하지 않는가?
게다가 최소한, 단지 제 집 안마당을 정하게 지켜라 하는 것 아닌가?
이것 하지 않으려고 교회의 존재가 그에게 요청되어야 하는가?

하기야 무교회주의자 함석헌의 말씀에 숨겨진 뜻인들,
저들 보수 개신교 원리주의자들에게 씨알이나 먹힐 것인가?
도대체 저들을 누가 가르치는가?
제 집 마당가에 헐벗은 강아지들을 놔두고 교회만 찾은들,
빛이 내려 오실건가?
말씀이 임하실 것인가?

교회 밖에선 갖은 죄를 짓고,
일주일에 단 하루 교회에서 죄를 사함 받고자 함이 아니라면,
그저 복을 구하려 함이 아니던가?
교회가 믿음을 사고파는 장터인가?
갓 때 벗은 어린 계집 귓불에 다는 귀걸이, 액세서리라도 되는가?

제 집 마당가에 버려둔 믿음이 교회에 가면 추수가 되는가?
누가 교회를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인가?
이게, 교회가 나쁘다고 이르고 있는 것인가?
교회에 가서 믿음을 추수하려고 하지 말고,
믿음의 씨앗을 가져다 교회 밖에다 뿌려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밖에선 한 톨 씨앗도 뿌리지 않고,
교회로 가선 믿음을 수확하려는 것이 과연 옳은가 말이다.
이것은 완전 불한당 심보 아닌가?
이러고도 신자이며, 권사라 할 수 있음인가?
도대체 저 이가 권사가 되어 다니는 교회의 목사는 누구인가?

나는 개신교 신자가 아니다.
하지만, 설혹 내가 그들이 말하는 믿음이 없을지 몰라도,
이 정도는 그저 마음만 잠깐 깨끗이 비우면 절로 알게 된다.

저들은 아는가?
난득호도(難得糊塗)라,
대지약우(大智若愚)인 것을.

그런데,
노파심에서 한 가지만 덧붙이며 마친다.

난득호도(難得糊塗)를 곡해하여,
부러 못난 척 꾸미는 것이,
훌륭한 처세술인 양 여기는 이가 적지 않다.
특히 대다수 중국인들이 그러하다.
이 때, 그 본뜻은 사라지고,
거죽 흉내, 꾸밈, 위장을 위한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처세를 잘하기 위해, 짐짓 아닌 척 꾸며야,
난세를 헤쳐 가며 보신(保身)할 수 있다는 태도가 당연시 된다.

마치 명심보감을 읽다보면,
이게 명철보신(明哲保身)이라,
사뭇 그럴 듯이 교훈을 설파하는 것 같지만,
일개 개인의 사적 이익을 꾀하는 데는 좋을지 몰라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책임감 없는 처세술 일색으로 꿰맞춰진 인상을 갖게 된다.

중국인들이 누천년 수없이 많은 전쟁을 겪으며,
개인의 안위를 돌보는 게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도대체가 관(官)도, 부모, 처, 형제도 못 미더운 것이다.
보신, 처세술의 일환으로 아닌 척, 모자란 척,
이리 짐짓 꾸며 위장하는 것이 뼈 속 깊이 체화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게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주요한 덕목이 되면,
나 외의 것엔 무관심하게 되고,
오로지 자신의 이해만 집중하게 된다.
자연 공적 공간은 황폐화 되고 만다.
앞으로 이게 중국인들이 선진국이 되는데,
최대의 장애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찬란한 역사, 문화를 가지고도,
junk food를 양산하여 전 세계로 방출하는 몰염치(沒廉恥), 파렴치(破廉恥),
그 훌륭한 문화유산의 빛을 전 세계에 던져,
세계를 이끌지는 못할망정,
자청하여 쓰레기 국가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저에는 명철보신(明哲保身),
직설적으로 말하면 오로지 사익만이 최고라는,
오도된 난득호도(難得糊塗) 문화가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문화인이 되려면,
(아니 우리라고 더하면 더했지 결코 별 다를 것도 없지만.)
난득호도(難得糊塗)를 좌우명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차라리, 전도득총명(全都得聰明),
즉 모두 총명해지길 힘써야 하리라.

난득호도(難得糊塗)라,
스스로도 힘들다고 말하면서,
어찌 멍청이가 되려고 애를 쓰는가?
실인즉 멍청한 것들이,
제 분수도 모르고 자신이 똑똑한데도 짐짓 멍청한 척 연기를 하려니 어렵다고 하는 게 아닐까?
그러하다면, 이야말로 얼마나 어려운가?
실제론 멍청한 것들이, 아닌 양, 뒤집어 멍청한 척 연기하려니 어려워지는 것이다.
도대체 뒤집어 질 것이 있나, 홑겹이니.

우습다.
권하노니,
그럴 양이면 차라리 양지로 나와 똑똑이가 되도록 힘쓰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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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9. 7. 23. 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