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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다리

농사 : 2012. 6. 23. 14:55


이웃 논에 왜가리가 노닐고 있다.
예초기 작업을 하면서 슬쩍 슬쩍 쳐다보자니,
녀석의 행법(行法)이 거의 나와 비슷하고나 싶다.

처음 예초기 작업을 할 때는 10여kg 나가는 무게도 녹록치 않았고,
작업봉을 휘두르는 것도 수월치 않았다.
게다가 키 높이로 자란 풀을 베어나가는 것이 만만치 않아,
급기야 봉에 달린 기아뭉치 고정시키는 나사 구멍이 헐거워지기까지 했다.
수리기사는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고 했다.
거의 나뭇가지처럼 거센 풀을 봉을 휘두르며 자르자니,
고정나사까지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남들은 골프채를 휘두르느라고 허리가 나가고 엘보가 시큰거리고 한다지만,
나는 풀과 이리도 험하니 겨루기를 하고 있었던 게다.

그런데 해마다 이게 익숙해지더니 올해는 경지에 오른 느낌이다.
예초기 날도 지난해에는 댓 개 이상을 바꿔야했는데,
올해는 지난해에 쓰던 것을 아직까지 써도 별 문제가 없다.
흙을 다치지도 않고 그저 풀 마디만을 가볍게 자르고 있다.
마치 포정해우(庖丁解牛)를 방불하고 있음이 아니더냐!
(※ 참고 글 : ☞ 2011/09/29 - [농사] - 초선(草禪))

게다가 보법(步法)이 가볍고 날렵하니 세련되어간다.
힘차게 나아가고 걸음을 옮기는 행법이 
태극권의 등나(腾挪)처럼 우아하고나.

왜가리가 논가를 노닐 때 잘 보면,
발 하나를 들어 올렸다가 몸을 슬쩍 앞으로 기우리며,
그 사춤에 자연스럽게 구부렸던 발이 펴지도록 한다.
부러 의식적으로 발을 펴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중력 작용에 의해 자동으로 펴지듯 그리 우아하게 몸을 옮겨간다.

물속의 먹이를 보고 채갈 때,
사전에 몇 수 앞을 겨냥하고 몸 전체의 동작이 예비되어 있어야,
이런 우아한 동작이 그림처럼 그려질 수 있다.

먹이를 보자마자 채가는 동작을 바로 취했다면,
몸은 가파르게 아래로 쏠리고,
물그림자가 비춰 물속 먹이는 깜짝 놀라 달아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물가에서 춤을 추듯 저리 유연한 동작을 하고 있으니,
저것은 그저 바람결에 흔들리는 물의 자연스런 율동의 일부가 되어있음이다.
하니 물속의 먹이들이 학의 동작을 자연의 일부로 알지,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흉수(凶手)인줄 미처 모르고 살아들 간다.
아, 학의 덕이란 이리도 아름답고나.
잡아먹히울 운명이라면 차라리 그저 모르고 살다가,
불각시에 저승길로 갈 수만 있다면 이 또한 여간 큰 복이 아니랴?

나 역시 풀숲을 이리 헤쳐 나간다.
발 하나를 슬쩍 들어 외다리로 서서 있다,
슬쩍 몸을 기우리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예초기를 메고 있던 상체가 미끄러지며 나아간다.
이 때 작업봉은 앞에 있는 풀들을 자연스럽게 쓸어가며 베어낸다.
몸은 리듬을 타고 앞으로 흐르고,
정신은 선경(仙境)을 노니는 듯 아득 묘연한 곳으로 빠져든다.

예전 왕정치의 외다리 타법이 유명했는데,
두 발 동물이 외다리 행법(行法)을 취함은,
모두 다 리듬을 얻기 위함이다.

굽혀서 힘을 비축한 후,
그 힘을 서서히 흘려 내거나,
때론 폭발하듯 내던지며,
힘의 집속(集束)과 방출(放出)을 리드미컬하게 꾀한다.

길고 짧음.
장단(長短).
부러 길고 짧음을 만들 때 리듬이 생긴다.
파동은 왜 sinusoidal한 모습을 보이는가?
이 역시 에너지를 비축하고 풀고 하는 역동적인 삶, 존재의 양태인 것이다.

리듬은 그냥 규칙적으로 셈해지는 박자가 아니다.
굽히고, 펴고,
길고, 짧고.
때론 멈추어 서서 삶을 관조하는 것.
이 모두 자연의 법식(法式)에 다름 아니다.

내가 풀밭에서 예초기를 메고 풀을 베어나가다.
문득 멈추어 고개를 들고 논가를 쳐다보니,
거기 학 하나가 춤을 추고 있다.

너도 외다리 춤을,
나도 외다리 춤을.

그런데 외다리는 반드시 되돌아와 온다리가 된다.
짝다리가 아니란 이야기이다.
외다리는 순간을 지나지만,
영원을 겨냥하며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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