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향(香)

농사 : 2013. 6. 28. 12:22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를 흔히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육근, 십이처, 오온(五蘊)이니 하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향'에 이끌리고, ‘안이비설신의’에 미쳐 그저 나름대로 떠오르는 생각을 떨구어 보고자 한다.

우선, 안-이-비-설-신-의
우선 그 순서에 주목하며 그 대경(對境)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염두에 두자.

눈(眼)으로는 색(色)을 본다.
이 때, 색이란 지수화풍 즉 물질 정도로 생각해도 되지만,
물자체(thing in itself)가 아니라 나의 감각, 인식기관을 통해 인식된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불설(佛說)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섰다 할 것이다.
(그런데 물자체라 부를 만한 실체가 과연 있기나 있는가?
물자체를 알 수 없는 것이라면,
물자체를 상정하는 것조차 옳은 노릇인지 또한 장담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부득불 설하자니 이리 풀어낼 밖에 더 나은 도리가 없을 터,
하여간, 마찬가지로 이하의 ‘이-비-설-신-의’ 역시 ‘성-향-미-촉-법’에 각기 對하여 인식한다.
이런 육근의 육경을 대상으로 한 인식작용을 육식(六識)이라 부른다.
이렇듯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하는 대상이 나뉘어져 설명되고 있지만,
실인즉 삼라만상 일체는 인식될 뿐인 것이지,
별도의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이 불교, 특히 유식(唯識)의 가르침이리라.
이리 볼 때, 색성향미촉법은 별도로 존재하는 물질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인식내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니 곧 마음의 작용 결과라 할 것이다.
다만, 이것에 매어 곧 색성향미촉법의 유.무(有無)를 말하고 있다고 지레 단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이런 주제가 아닌즉, 이쯤 설게 풀어두고 본설로 들어간다.
안-이-비-설-신-의 이 순서에 착목해보자.
‘안’을 맨 선두에 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안식(眼識)이 다른 것 보다 더 빠르고 즉각적이기 때문이다.
보통 인간이 외물을 지각할 때 소리보다는 색, 형에 더 의지한다.
이는 ‘눈’을 통한 지각기능이 다른 기능주체 보다 상당히 빠른 지각 속도를 가지고 있고,
외물의 象을 구상화하여 인식주체에 전해주는데 능하기 때문이다.
이하의 이-비-설-신-의는 차서로 그 정도가 더디고, 구상력이 즉감적이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안식(眼識)이 나머지 식에 비하여 오차가 가장 많다는 것이다.
이하 역시 차서(次序)를 따른다.

아래 그림들을 보자.


인간들은 ‘눈’을 통해 상당량의 정보를 외부로부터 취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그대로 믿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가령 중간에 보이는 격자무늬의 그림에서 격자를 이루는 선들은 모두 수직, 수평선들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사선으로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보는 이의 눈이 바르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실제의 세계가 본시 그런 것인가?
의심 없이 의지하였던 눈에 보이는 현상이 그리 신뢰할 수만은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모든 것을 의심하여야 하는가?

도 닦는 이들이 동굴 속에 틀어박혀,
눈을 감고, 귀를 닫으니 곧 폐관(閉關)하는 사연은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안이비설신의 모두 믿을 바 없을진대,
제 눈을 어찌 믿을 것이며,
귀 밝다 어찌 자랑할 수 있겠는가?
하니, 차라리 빗장을 닫아걸고(止), 내관(內觀) 하자는 것이리라.
또한 귀는 어떠한가?
여기 재미있는 실험이 하나 있다.
아래 링크를 따라 자신의 가청주파수 청음능력을 테스트해보기 바란다.

1) http://www.ultrasonic-ringtones.com/
2) http://masudayoshihiro.jp/software/mamimichk1010.zip 
 
인간의 가청 대역폭(band width)이 20-20,000Hz라고 하는데,
나이가 들어가면 특히 고주파 영역은 점차 잘 듣지 못하게 된다.
언젠가 본 기사에 따르면 미국 어린 아이들이 선생들이 듣지 못하는 고주파 벨 소리를
핸드폰에 내리받아 두고 마음껏 핸드폰을 이용한다고 한다.
아이들끼리는 벨 소리를 들으나, 나이 많은 선생은 이를 듣지 못하니
이 또한 영악한 아이들의 소견으로는 제법 재미있는 놀이가 되겠다 싶다.
개인별로 이리 물리적인 감수능력(感受能力)의 편차가 존재하면서도,
인간이 노소 불문 언어소통이 가능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소리가 지시하는 그 내용, 즉 decoding된 정보를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decoding에는 또한 심리적 bias가 상존하니,
귀로 들어온 정보의 개인적 해석행위를 통해 비로소 성립되는
耳識의 내용은 실로 청자의 주관적 실재라 할 뿐.

또한 생각해보건대, 감각기능 간의 차이뿐이 아니다.
오욕칠정 감정 내에서도 상호 교착, 혼동, 은폐 현상이 나타난다.
이 생각의 꼬리를 쫓아,
이야기 물꼬를 잠깐 옆으로 터내 흘려내본다.

한나라 유방이 죽자,
정비인 여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우여곡절 끝에 황제가 된다.
그가 혜제(惠帝)다.
여후는 마음 약한 혜제를 대신하여 거의 전권을 휘두르며 국정을 농단하였다.
혜제는 여후의 패악질에 세상에 뜻을 접고 주색으로 일관한다.
여후는 권력을 잡자 유방의 살아 생전 애비(愛妃)였던 척부인을 팔다리 끊고,
눈알을 도려내고, 귀를 자르고,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변소에 넣어두고는 이를 인간돼지(人彘,인체)라 불렀다.
그녀는 혜제에게 이를 보였다고 하는데,
충격을 받은 그는 그 후로 1년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마음이 약할 뿐만 아니라, 몸도 약한 혜제는 재위 7년만에 죽는다.

당시, 여태후는 이 앞에 곡례(哭禮)를 올렸지만 그 눈에는 눈물이 괴지 않았다.
곡례란 큰 소리로 곡하는 것인데, 그녀는 소리는 내었어도 눈물은 흘리지 않은 것이다.

“왠지 아십니까?”

겨우 15살 난 장백강(張辟强, or 彊)이 승상인 진평(陳平)에게 이리 물었다.
장백강은 유방의 일등 책사인 장량의 아들이다.

“모르겠는데, 슬프지 않아서인가? 자기 아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친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지금 태후께서는 슬퍼할 때가 아닙니다.
슬픔보다도 두려움 쪽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태후께서 무엇을 두려워하고 계실까?”

“천자가 붕어하시고, 새 황제는 아직 어리므로 대신들이 전횡으로
태후를 억압하지 않을까, 그것이 염려되어 슬퍼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후를 안심시키면 될 것이옵니다.”

“어찌 하면 안심시킬 수 있을까?”

“... 여씨 일족을 등용하여 병무, 정무를 담당케 하면 태후께서도 안심하실 것입니다.”

승상 진평은 15살 소년이 가르쳐 준대로 했다.
과연 여태후는 안심했는지 비로소 슬픔의 빛을 띠었다.
(※ 실인즉 장량의 속뜻을, 아들인 장백강의 입을 빌어 폈던 것이리니,
혹간 고사에 등장하는 천재 소년의 경우 이리 후견인을 대신하는 정치적 장치임을 간파하여야 한다.
흔히 일컫는 장자방 즉 장량은 한(漢)나라 설립의 일등 공신이지만,
그는 천하통일 후, 바로 은퇴하여 벽곡하며 도인의 길로 들어선다.
짐작컨데, 토사구팽을 염려하여 짐짓 정치의 세계를 등졌음을 이리 연출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그로서는 직접 나설 수 없음이니, 이리 아들을 빌어 우회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리.)
(※ 일설에 의하면 저 역할은 장백강이 아니라 육가(陸賈)라 한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면,
희노애락의 감정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인간의 감각기능, 감정 표출이란 것이 이리도 미덥지 않다.
“악어의 눈물”처럼
“인간의 눈물”도 도무지 믿을 수 없다.
언젠가 모 연예인이 앉은 자리에서 바로 눈물을 떨어뜨리는 연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아니라도,
나는 실제 현실의 현장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연출을 목격한 적이 있다.
사실 내용을 아는 나로서는 그 자의 놀라운 거짓 변신에 놀란 적이 있다.
누가 말했던가?
눈물처럼 순수한 것이 없다고.
저 깊은 곳으로부터 감정을 길어 올려야 “인간의 눈물”이 나올 수 있다.
그러니 눈물이란 얼마나 진실될까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아버린 나는
그 날 이후, 세상을 알아 버린 것이 아니라,
정작은 순수한 나를 잃어버리고 말았음이다.

나는 ‘링컨의 얼굴론”은 가짜라 생각한다.
난 어느 글에서 글도, 말도, 얼굴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남의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믿을 수 없기도 하지만,
나아가, 지금 나는 내 감정, 판단, 의식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믿을 수 없기에 불행한 것인가?

아니면,
그러하기에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고, 종내 제법(諸法)은 무아(無我)한가?
이런 깨달음에 미칠(及) 수는 없겠는가?

무상(無常)이란,
존재의 머무름이 일시적이기 때문에, 또 그런즉 덧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아예 한 순간도 머무르는 바 없이 변화할 뿐인 것임을 설파하고 있다.
환원하면 변화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리라.
그러한즉, 무상은 이내 무아(無我)라 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이를 깨닫는다면,
종내 무욕(無慾)하지 않을 수 없을 터.

이에 이르러 두연히, 서산대사의 임종게 중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이 말이 떠오른다.

제법(諸法)은 뜬구름 같이 본래 實이라 할 것이 없은즉,
인생이라 그와 무엇이 다를런가?

무욕하기에 이제 비로소
대의(大疑),
대신(大信),
대분(大憤)할 수 있음이리니 ...

그러하기에,
내가 곧잘 분노와 슬픔을 함께 하고,
소요유하는 까닭임이니.

분노와 슬픔은 내겐 소요유함의 외적 형식임이라.

***

이리 한 바탕 진설하여놓고, 이제서야 본론으로 들어가 본다.

나는 본디 서울 사람이다.
여기 시골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시골 풍정, 인심을 제대로 접하였다.
그런데 단 몇 해도 아니 되어 내 일생을 통해서 한 번도 겪지 않은 별별 일을 다 치렀다.

날 짐승도 나뭇가지를 가려 깃들고,
들 짐승도 굴을 가려 드는데,
항차 인간이란 표찰을 목에 걸고도,
진종일 취생몽사(醉生夢死)라,
태연히 진창에 누워 지내는 이들이 참으로 많고뇨.

내가 어느 날 저녁 외출했다 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농원 앞에 다 이르렀다.
마침 앞에서 군인들이 굴삭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 북새통에 농원 출입구 앞은 군인 서넛이 막아서고 있었다.
나는 도리 없이 속도를 늦추고 깜빡이등을 켰다.

그러자 뒤쫓아 오던 봉고 하나가 경음기를 크게 울린다.
백미러를 통해 뒤를 보니 윤선생영어교실이란 마크가 보인다.
어지간히 더럽게 성질이 급한 녀석이 타고 있고나 싶었다.
그러자니 이자가 차문을 열고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욕설을 마구 퍼붓는다.

세상이 있는 모든 욕은 다 끌어다 배설해놓는다.
구상유취(口尙乳臭) 젊은 녀석이다.

네 녀석이 무엇이냐 물으니,
건달이란다.

얼씨구.
꼴에 깡패는 아니고 건달이란다.
예전 어느 조폭이 쓴 자서전 하나를 읽은 적이 있다.
그자는 말한다.
자기네들은 깡패가 아니고 건달이란다.

그래 그럼 건달이란 무엇인가?
원래 범어론 Gandharva로 쓰는데,
소리 나는 대로 음사하자니 이게 건달바(乾闥婆) > 건달이 된 것이다.
편히 생각하면 음악의 신쯤 된다고 여기면 된다.
이 신(神)은 악기를 잘 다루며,
육식을 하지 않고 향(香)을 취할 뿐이니 몸에선 향기가 진하게 난다.
세상 사람들은 베짱이처럼 놀고먹으며 음악만 즐기는 모습을 보고는,
할 일없이 무위도식하는 자를 일러 건달이라 하고 있음이 아니던가?

그러한 것인데,
깡패 중에 그래도 조금 유식한 녀석이 있었던가 보다.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 명리를 구하지 않고,
다만 의협의 기풍을 따라 유유자적 살아가고 있다.
허니 마치 간다르바처럼 육식(명리)을 탐하지 않고,
향기(의협)만을 취해 살아가는 고고한 무리란 뜻이렷다.

허나 현실은 어떠한가?
저들은 약자를 주먹으로 으르고, 칼로 궁박하며
재물을 빼앗고 생명을 위협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윤선생영어교실의 운전수는 꼴에 들은 풍월은 있어,
자칭 건달이란다.
깡패는 아니란 이야기일 터.
내가 피식 웃음이 다 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깡패로 알고 있는데,
자신들만은 건달로 대접해달라는 것이다.
꼴값을 떨고 있음이다.
저들은 도대체가 몸에서 향기는커녕 악취가 나는 흉측한 것들이 아니더냐?

이후 이들을 치도곤 낸 사연은 또 다른 이야기인즉 예서 끊는다.

지금 건달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건달은 인간처럼 맛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다.
다만 향으로 음식을 대(對)한다.

블루베리도 진짜배기는 맛이 아니라, 향으로 말을 한다.
농부가 맛에 집중하는 단계라면 아직 이르다.

묘향(妙香)

이 경지를 논할 수 있을 때라야,
참 블루베리 농부라 이를 수 있다.
난 이를 이름하여 간다르바 블루베리 농부라 하련다.

제사 때 향을 피어올림도,
귀신은 향으로 흠향(歆饗)하심을 엿볼 수 있다.

안이비설신의 육식의 차서로 볼 때,
뒤로 갈수록 더 고등한 인식능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함인데,
왜 건달이나 귀신은 맛이 아니라 향으로 제 몸을 기르는가?

인간은 설근(舌根)으로써 음식의 맛을 변별하여,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린다.
하지만 귀신은 설근을 동원할 것도 없이,
그저 좀 떨어지는 비근(鼻根)만으로도 족히 만족을 얻고 마는 것이다.

여기 농은 선사께서 언젠가 미식가라 이르셨음인데,
진짜배기 미식가는 맛 찾아,
혓뿌리로 골골(曲曲)을 더듬으며 돌아다니지 않는다.

다만 눈을 지그시 감고 귀로 취향(取香)할 뿐이다.
이를 취문(嗅聞)내지는 문미(聞味)라 한다.

냄새를 듣고, 맛을 듣는다.

이쯤이면 맛을 혀로, 향을 코가 아니라,
귀로 듣는 경지가 아연 지펴지시는가?

옛 사람은 감각기관 어디 하나에 매어 계시지 않았음이다.
두루 통섭 걸림이 없으셨던 것이다.

이제 관음(觀音)보살에서,
왜 청음(聽音)이 아니고 관음인 사연을 아실 수 있을 터.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멀티미디어는,
육근을 남김없이 소비하듯 ‘동원’하여,
사물을 낱낱이 나눠 차별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음인지라,
고인들의 모습과는 그야말로 천리를 격한다 하겠다.

농민들은 대충 들어라도 보았을 ‘신비한 밭에 서서’의 저자 요시카즈가 말한
차별지와 무차별지도 예서 확인할 수 있음이다.

그런데 취문(嗅聞)도 그러하지만 관음(觀音) 역시,
대경(對境)의 짝이 되는 인식능들을 살펴보면,
‘안이비설신의’ 이 차서(次序)가 어긋나 있다.
그런데 더 자세히 살펴보면,
작용자인 근(根)이 소연(所緣)되는 경(境)보다 언제나 한두 발 앞서,
짝이 맺어져 있다.

능연(能緣) 즉 인식 주체가 한 두 단계 낮은 것으로,
소연(所緣) 즉 그 객체를 대하고 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구태여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꼬붕이 다 알아서 해주는데,
두목이 나설 일이 있겠는가?
割雞焉用牛刀
닭 잡는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쓸 수 있음이랴?

물론 저 경지를 넘어서면 이젠 차서가 문제가 아니라,
넘나들기를 팔난봉이 야밤에 과부집 드나드는 것처럼 걸림이 없게 된다.

이해를 좀 더 돕기 위해 욕계(欲界) 말씀을 보탠다.
욕계엔 육천(六天)이 있는데,
그중 화자재천(化自在天)의 세계에선 자기 스스로 향락을 만들어서 즐길 수 있다.
그 아랫 단계인 도솔천의 경우만 하여도 다만 주어진 것을 즐길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스스로 향락을 창조하여 노닐 수 있게 된다.
또한 상향소(相向笑)라 하여 다만 서로 마주 보고 웃기만 하여도 음행(淫行)이 만족된다.

다음 꼭대기 하늘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경우엔,
자기가 수고롭게 향락을 만들어 노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시중드는 천신들이 향락을 대신 만들게 하고는 그를 즐기는 경지를 말한다.
이곳에선 상시(相視)라 하여 서로 슬쩍 보기만 하여도 음애(陰愛)를 즐길 수 있다.

취문(嗅聞) 따위의 crossover 경지는 우스운 게다.
도대체가 마냥 즐거운데 애써 수행을 구할 필요도 없게 된다.
때문에 이런 하늘 세계가 외려 인간 세계보다 부처가 되기엔 더 어렵다고들 하는 것이다.

그러함인데, 블루베리 재배를 하는 농부들은 과연 어떠한가?
결국은 소비자 혀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뼈 빠지게 일하고 있지나 않은가?
개중엔 자청하여 저들에게 복속하길 즐겨,
갖은 비료 처넣고, 제초제 치고, 착색제 바르고 장에 내다팔기 바쁘지 않던가?
하기사 이 짓거리란 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하루 빨리 돈을 벌어,
타화자재천의 세계에 꿈결 같이 노닐기를 욕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랴?

난, 바란다.
우리 밭에 들리는 이들이 맛을 탐하지 않고, 향에 취(醉)하려 하길.


난, 기대한다.
저들이 다만 블루베리 미향(味香)을 구하기보다,
추수(秋水) 가을 물보다 더 깨끗한 우리 밭 흙냄새에 젖어들길.

난, 조각 달 떠오른 우리 밭을 거닌다.
거기 혀를 녹이는 맛, 코를 찌르는 향이 왜 아니 흐르지 않으련만,
좌르르 풀 위에 흩어지는 은빛 구슬을 따를 수 있으랴?
난, 다만 우리 밭 언덕 달빛에 마냥 젖어 그린 천년을 잠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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