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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료와 인자수(仁者壽)

소요유 : 2014. 10. 2. 10:57


소싯적엔 한약방이 동네마다 있었다.
지금이야 한약방은 눈을 씻고 찾아도 거의 볼 수가 없다.
대신 한의원, 한방병원이 그럴 듯이 꾸며 차리고 자리를 잡고 있다.

한약방 이름 중엔 특히 인수당(仁壽堂)이란 게 많았다.
원래 인수(仁壽)는 논어의 다음 글이 출처인데,
거기 수(壽)에 착목하여 많이들 가져다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싶다.

知者樂水,仁者樂山;知者動,仁者靜;知者樂,仁者壽。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인자는 고요히 있는 것을 좋아한다.
지자는 즐기고, 인자는 오래 산다(?)

그런데 다른 부분은 몰라도 어째서 인자가 수(壽)하는가?
이 점은 얼핏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해서 논자마다 설이 분분하다.

소위 약왕(藥王)이라 불리우는 당(唐)나라의 손사막(孫思邈)은 152살까지 살았다느니,
혹은 162세까지 살았다는 설이 떠돈다.
그는 일생동안 공명을 탐하지 않고, 인의를 실천하였다.
의약을 연찬하여 사람들을 병고로부터 많이 구하였다.

혹자는 손사막 같은 이의 장수를 들면서,
역시 인자수(仁者壽)가 옳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개중엔 인(仁)하면 마음의 평정이 유지되고,
면역력이 강화되니 어찌 오래 살지 않겠는가?
이리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면 안연(顏淵, 前521年-前481年) 같은 이는 왜 일찍 요절하였는가?
이런 질문이 나오면 ‘인자는 장수한다’는 설을 펴는 이들은 이를 어찌 방어할 것인가?

命也,麥不終夏,花不濟春,如和氣何?雖云其短,長亦在其中矣。

명(목숨)일 뿐이다.
보리는 여름을 다 마치지 못하고, 꽃은 봄을 건너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화기가 있음은 어떠하더냐?
비록 명이 짧더라도 그 가운데 긴 생명의 씨앗이 있노니.

신감(申鑒)에 나오는 말이다.

안연이나 염구(冉求)의 요절을 어떤 이가 묻자,
그에 대한 변설을 이리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
동한(東漢) 시대의 중론(中論)엔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이런 논설이 펴지고 있다.

어떤 이가 이런 의문을 내놓는다.
‘안연이 일찍 죽고 비간이나 오자서가 큰 화를 당하지 않았는가?
이는 성인이 믿지 못할 말을 하여 후인을 속이려 하는 것인가?’

그러자 영천순(潁川荀)이 이리 변설하였다.

‘고인의 말은 죽어도 썩질 않는다.
제일 으뜸인 것은 덕(德)이요, 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독자적, 창조적) 말씀을 세우는 것이다.
(※ 이를 삼립이라 한다. - 立德, 立功, 立言)
몸은 죽어도 도(道)는 남는다.
무릇 형체란 궁극엔 이지러지고 썩어 사라지고 마는 것인 바라.
오래 살든 일찍 죽든, 기껏 수 십 살에 불과하다.
덕(德)이라는 것은 한 번 세우면 아니 그런 것과,
그 차이는 천년이 난다.
안연이 백년도 채 살지 못하였지만,
그 이름자는 지금도 알려지지 않더냐?
이런 관점에서 인자수(仁者壽)를 본다면,
그 말을 어찌 믿지 못할쏜가?’

인자는 사욕을 탐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한다.
壽與不壽
몸이 오래 살든, 일찍 죽든 상관없이,
그 덕향(德香)은 천만년을 지나 전해간다.

영천순(潁川荀)의 논조는 여러 다른 사람의 것에 비해 사뭇 시원스럽다.
이는 결국 청죽에 이름을 남기려면 어질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름을 남기려 하는 것은 욕심이 아닌가?
명예심을 구하려 仁을 꿔오려 수작을 부리진 않을 텐가?
또한 이 양자가 상호 충돌할 때는 그럼 어찌 될 것인가?
인자수(仁者壽)에서,
仁하기에 수한 것인데,
수하기 위해 인을 욕심내는 그 모습 중에.
이름을 남기려는 짓은 왜 아니 점검이 되지 않는가?
결과와 원인이 거꾸로 돌아들면 난이 생긴다.

삼립 중 덕(德)을 제치고, 공언(功言) 내지는 공명(功名)만을 탐하면 어찌 되는가?
기실 염구(冉求)는 노나라 실권자인 계씨(季氏)를 섬겼는데,
그 때 세를 많이 거두자, 공자는 그를 파문한다.

‘冉求不是我的學生, 你們擊鼓聲討他的罪狀’

‘염구는 내 학생이 아니다.
너희들은 북을 올리며 그의 죄상을 성토하라.‘

제자들에게 이리 준엄히 선포한다.

그러함이니 염구를 들어 그가 일찍 죽었다고,
인자수(仁者壽)를 의심하는 것은 과녁을 한참 빗겨나간 것이다.

오늘날 3S (sex, sports, screen)라는 것도,
삼립 중 덕은 빠지고 다만 공(功)과 명(名)을 다투고 즐기는데,
그 위험함의 염려가 있는 것이다.
아시안 게임을 두고 보더라도 거기 무슨 덕이 있는가?
선수들은 오직 공명을 다툴 뿐이며,
사람들은 거기 함께 부화뇌동하여 즐거움을 탐할 뿐이다.
덕(德)은 기실 그 행이 어렵다.
이게 증발하고 남은 자리,
민낯으로 공을 취하고 이름을 남기자는 욕망의 잔치.
이게 모두들 암묵적으로, 현시적으로 동의된 자리,
현대인은 벌거벗은 채, 취하고, 즐기며,
고단한 삶을 얼음 지치듯 그리 잊으며 지나는 것이리라.

나는 삿된 짓을 삼가고,
블루베리가 제 품성대로,
건강하게 자라면,
열매가 알맞게 달리고,
유효성분도 충분히 들어 있게 되며,
맛과 색도 훌륭하게 되리란 조촐한 믿음을 갖고 있다.

만약 블루베리를 크게 키우고,
열매를 많이 열리게 하려고,
비료를 많이 주면 어찌 될 터인가?

이 문제를 앞서,
선생님 한 분 계셔 아주 적실하니 잘 지적하여 주셨다.
(질소분 비료 과잉 투입은 꽃눈 분화에 부정적 영향)
과학적 언술이란 이리도 사람의 마음을 미덥게 한다.
소박한 을밀 농철은 내 조그마한 신념에 터하지만,
과학이란 이름의 증명법사(證明法師)를 만나,
그 뜻을 굳건히 하고, 믿음을 점검하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귀한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행(五行)의 상생(相生), 상극(相克)이란,
어떤 계(界, system)의 동태적(dynamic) 균형내지는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근본 원리를 뜻한다.
상생뿐 아니라 상극도 지나치거나, 넘치면,
계의 안정성은 이내 허물어지고 파국이 닥친다.

그런데 세상엔 이 원리가 이지러진 모습도 있는 법,
상승(相乘), 상모(相侮)가 그것인데,
상극의 상대나 자신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약할 때는,
자연스런 상극 상태에 이상이 생긴다.
이리하여 상대를 눌러 타거나, 거꾸로 능멸 당하게 된다.

가령 생물학적 개체 내에서 호르몬의 길항 작용이 일어난다 할 때,
길.항(拮.抗)이 편급되게 치우치면 탈이 나게 된다.
이를 오행으로 보자면 상승(相乘)에 해당된다 하겠다.

여기 그림 하나를 남겨두고자 한다.
(간단한 한자이므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뜻을 살필 수 있다.
※ 참고 : 胜, 过는 각기 勝, 過의 간자체. 侮 : 업신여길 모)

(五行乘侮圖)

블루베리에 비료를 많이 주게 되면,
식물은 성체 키우는데 집중하게 되며,
이에 따라 생식(生殖) 과업을 지나치게 극(克)하게 되어,
열매 달리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이 또한 오행으로 풀이 하자면 상승(相乘)에 해당된다 하겠다.

가령 전자를 木, 후자를 土에 배대하고,
이 과정을 오행으로 살펴보자면 이러하다.

목은 본시 토를 극한다. - 木克土
허나 목이 지나치게 강성하면,
토를 정상 상태를 넘어 극하게 된다.
이에 따라 토가 그 근거를 잃고 망가져 버린다.
우리는 이를 목승토(木乘土)라 칭한다.

사정이 이러한데,
우리는 열매를 수확하고 나서는 감사 비료 운운하며,
밭에다 또 욕심껏 비료를 넣는다.
게다가 여름 내내 각종 영양제를 넣지 못하여 조바심을 낸다.
이 때엔 밭둑에 서서
오행의 상승(相乘), 상모(相侮),
그 이치를 가만히 헤아려보면 어떠할까?

농업이란 것이 결코 한가롭게 놀자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욕심이 지나치면 공(功)과 명(名)을 탐하는데 매몰되어,
외려 사태를 그르치게 된다.

이제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 보자.

知者樂水,仁者樂山;知者動,仁者靜;知者樂,仁者壽。

여기서,

知↔仁
水↔山
動↔靜

이들은 상호 대비가 자연스럽다.
헌데,

樂↔壽

이것은 무엇인가 자연스럽지 않다. 

가령, 이게,  

夭↔壽로 쓰였다면 댓귀로선 완성이 된다.
한문이란 댓귀가 리드미컬하게 짝으로 연결이 되는데 능숙하다.
그러함인데 이 부분은 얼핏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仁者壽

이를 ‘인자는 장수한다.’

이리 새겨도 되지만,

그저 담백하니 ‘인은 오래 간다.’
이리 새겨보면 어떠할까?

지혜로운 자는 세상을 즐긴다.
내일 모레 죽더라도 현재를 즐긴다.
허나 어진 자는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함이니 오래 간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늘은 너르고 땅이 오래 갈 수 있는 까닭은,
자기 고집에 따라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래 살 수 있음이다.

不自生 → 長生, 이 구조가 나는 인상적이다.
長生인즉, 이게 通則久 다음에 이르는 久則生인 것이다.
自生은 노자, 장자의 일관된 경계의 말씀 즉 機心,
또는 내가 가끔 말하고 있는 조작질, manipulation과 맥이 닿아 있다.
만약 천지가 장구하지 못하고 망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조작질 때문일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게 바로 自生의 모습이다.

仁者壽

여기,
壽에 집중, 매몰되면,
인자가 되기 어렵다.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면,
3S에 혼백을 앗기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은 오늘 樂한즉,
항시 知者라 여기게 된다.

아,
온 세상은 왼통 知者로 가득하고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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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4. 10. 2. 10: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