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적(警笛)
내가 사흘 전, 시간을 내어 서울로 올라갔다.
일을 마치고 성북동, 북악산길을 내려오다 겪은 일이다.
그 길은 꼬부랑 산길이라 운전할 때 주의를 많이 하여야 하지만,
잠깐이라도 그나마 공기가 좋고, 산 길 푸른 기운을 느낄 수 있어,
부러 그리로 돌아 오가곤 한다.
한참 내려오는데, 산 길 밑뿌리 언간에서,
차도의 근 삼분지 일을 차지하고는,
폐지를 정리하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옆엔 인도가 있어,
그리 비껴나 제 일을 하여도 될 터인데,
가속 폐달을 밟지 않아도,
차가 내리막길을 절로 떠밀려 오는 그 곳에서,
저 일을 하고 있는 저자는 무슨 심사인가?
거긴 왕복 양 차선이라,
차선 하나가 막히면,
상대 차선을 급히 범(犯)하여야 통과할 수 있다.
게다가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차량은,
급정지 폐달을 밟아야 사고를 피할 수 있다.
순간이지만, 여러 생각이 지피어 오른다.
‘제 몸을 담보로 지나는 차량을 시험하고 있음인가?’
‘만약 사고가 나도,
피아(彼我) 간 부담(負擔)의 경중(輕重) 교량(較量)을 이미 마쳤음이 아닌가?’
아니 외려 사고가 나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 두 사람의 의견이 있다.
甲
‘삶에 지치다 보면 한 치 옆으로 몸을 비끼는 것도 힘이 든다.
닥친 그 현장에서 바로 자리 펴고 앉아 제 일을 볼 뿐인 것을.
그러함이니 탓하지 말고 피하여 갈 일이다.’
乙
‘비열하다.
제 몸을 걸고,
상대를 망신(亡身)시킬 수 있는 일을 태연히 저지르다니,
차라리 달리는 차열(車列) 속으로 뛰어드는 것보다,
심사(心思)가 사뭇 졸렬하다.’
나는 삼 년 전에,
내 차 앞으로 달려드는 여인네를 만난 적이 있다.
(※ 참고 글 : ☞ 도진차도(跳進車道))
甲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니,
그 아릿한 슬픔을 누가 있어 이를 탓하랴?
乙의 시비지심(是非之心)이라니,
그 밝음을 그 누가 시비하랴?
그런데 말이다.
거기를 지나는 백 사람이 있어,
모두들 甲의 마음이었다면,
세상은 과연 내내 화평하여졌을까?
모두들 乙의 마음이었다면,
첫 사람에 의해,
나머지 아흔아홉 사람은,
굳이 시험에 들 일이 없어졌을까?
그대 당신은 甲인가? 乙인가?
나는 심술이 많은 사람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위 궁리를 급히 끝내고,
경음기를 눌렀다.
그가 벌떡 일어나,
인도 쪽으로 물러서며,
내게 욕을 퍼붓는다.
그 역시 제 목숨이 아까웠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그리 급히 몸을 피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 역시 그 자리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땅한 도리를 구하지 않았다.
오늘 나를 만나 죽음을 피하고 그저 잠깐 혼이 놀라고 말은 것으로,
대신 변통 땜질을 하고 있으니 복인줄 알아야 하리라.
하지만, 이로서,
이 다음 아흔 아홉 사람은,
이제 내리막길을 편하게 내려올 수 있었을 게다.
여기서 乙은 법가의 입장을 대변한다 하겠다.
甲에 대하여 생각하자니,
성경 말씀이 떠오른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3~7)
그렇다면,
예수가 구한 한 마리 양은 과연 회개를 하였을까?
백인(百人)의 甲으로써,
한 마리 양의 회개가 실천 현실 속에서 구체화될 수 있는가?
법가는 기실 회개를 하든 말든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규율을 함으로써,
결과로서 얻어지는 사회적 총량 효과에 집중한다.
때문에, 사회를 구성하는 단자(單子)의 책임을 묻고,
평가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것 냉정하게 느껴지지만,
그 이후, 그를 넘은 일개 개인의 영역엔 사실 관심이 없다.
어떤 의미에선, 단자들에게 그 선 너머의 자유를 그들에게 전속시킨다 하겠다.
오늘날 식으로 하자면, 철저하니 사적(私的) 자치(自治)를 보장하고 있다 하겠다.
물론 고대의 법가가 이 정도로 민권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법가의 근본정신은,
법적으로 구속되지 않는 영역까진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
甲의 세계에선,
온정이 넘치며, 얼핏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인 것 같다.
하지만,
측은지심을 가진 사람은 마냥 양보를 하며 살지만,
이게, 그렇지 않은 이들이 제 욕심껏 심술을 부리는 것을 외려 조장하는 일이 되곤 한다.
가령 저 폐지 줍는 이는,
백인의 甲으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삼백예순날 차도에 나와 제 일을 도모하며 살아 갈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乙이라도 존재한다면,
폐지 줍는 이가 다음번엔 차도를 범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을 것이다.
누구나 제 목숨은 아까운 것이다.
지 아무리 제 잇속을 밝히려한들.
맹자의 사단설(四端說)에 비춘다면,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갑은 仁,
을은 智를 표상한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하지만,
이 중 하나라도 갖추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니라 하였다.
폐지 줍는 이는 측은지심의 대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사양지심을 지니지 못하였다.
이게 그의 현실 제약 존재조건이건 아니건 간에,
無辭讓之心 非人也이니,
사람 도리를 하지 못하였다.
그렇다한들,
을의 시비지심도 나머지 세 마음을 보증하지는 못하고 있다.
羞惡之心을 논하기엔 대하는 '그가 처한 대상 현실'이 마뜩하지 않고,
惻隱之心은 아직 발동조차 되지 않았다.
나의 경적(警笛)은,
그를 구하였다 확신할 수 없다.
네 가지 마음이 제 각각 따로 파편화된 이상,
세상은 그리 간단히 화평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나의 경적은, 오직 그것만으로는 나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 세상은 가능할까?
그런 세상을 그리기 전에,
그 세상에서 내가 취할 것을 먼저 찾아야 할 것이로되,
하늘은 언제나 구름에 덮여 있다.
구름 사이로 가끔 파란 하늘이 보일 때,
나도 그에 미쳐 어떤 때는 잠시 경적을 잊는다.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密) 즉,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여기 보면 지혜가 맨 나중에 등장하고 있다.
가령 보시, 지계 등을 사단의 측은지심에 비견하다면,
지혜는 시비지심에 배대할 수 있다.
측은지심 하나로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시비지심이 보태져야 세상이 밝아진다.
보살은 보시, 지계만으로 해탈을 이룰 수 없다.
밝은 지혜를 함께 내어야 비로소 열반에 들 수 있다.
측은지심을 느껴 경적을 누르지 않고 지나치면,
혹 제 마음은 편할지 모른다.
하지만 호루라기를 불지 않으면,
세상의 흑막은 결코 걷히지 않는다.
하여, 군자는 사단을 모두 깊이 살펴 행(行)하고,
보살은 육바라밀을 하나하나 닦(修)는다.
人之有是四端也,猶其有四體也。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自賊者也;謂其君不能者,賊其君者也。凡有四端於我者,知皆擴而充之矣,若火之始然,泉之始達。苟能充之,足以保四海;苟不充之,不足以事父母。」
(孟子)
“사람이 사단이 있는 것은 그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사단을 행) 할 수 없다고 이르는 자는,
스스로를 해치는 자이며,
임금에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임금을 해하는 자다.
무릇 나에게 있는 이 사단을 모두 넓혀 채울 줄 안다면,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이 처음 솟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만일 채울 수 있다면,
온 천하를 도와 편안하게 하기에 충분하고,
채우지 못한다면,
제 부모조차도 섬기지 못할 것이다.”
六波羅密,布施、持戒、忍辱,行此三事,離三惡道,人天往來。精進、禪定、智慧,修此三事,離生死苦,當來作佛。
(大乘起世論)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 지계, 인욕 이 셋을 행하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으며,
사람 세계나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정진, 선정, 지혜 이 셋을 닦으면,
생상 윤회를 벗어나,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자신만이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써 한 세상이 전격 불국토가 된다.
그런즉 보시는 자신을 구할 수는 있지만,
세상을 모두 구할 수는 없다.
지혜가 아니라면 결코 밝고 온전한 세상에 들어갈 수 없다.
결국, 사단이든 육바라밀이든,
절목이 각기 외따로 노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모두 함께 채워나가야 한다.
북악산 길을 내려오며,
내가 울린 경적은,
산고라니처럼,
산기슭 따라 숲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뿐인 것임을 나 역시 안다.
나도 집에 돌아가야 하기에,
허공중에 산탄(散彈)질을 하고 총총 내달음질을 치기 바빴다.
그가 놀라 내뱉은 욕설도
불타듯 붉디 붉히다 끝내 한 줌 재가 되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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