됴
이명래 고약(李明來 膏藥)을 알고 계신 분이 지금도 계실까 싶다.
이게 내 어렸을 적엔 제법 유명하였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사람은 왜 그리 병도 많았는지,
침을 종일 질질 흘리는 아이도 많았고,
배가 불룩하니 부풀어 오른 녀석도 심심치 않게 있었고,
부스럼, 종기가 생기는 이도 적지 않았다.
우리 집 앞에 계집아이가 하나 살았는데,
그는 부스럼을 달고 살았다.
하여 오죽하면 별명이 부스럼이라 하였을까?
그 오빠는 국거리라 불렀는데,
그만치 성정이 질정치 못하였다.
뒷집 하나 건너에도 두어 살 어린 계집아이가 살았는데,
곧잘 우리 집에 놀러와 함께 대청마루에 드러누워 뒹굴던 생각이 난다.
나중에 크면 이 아이와 짝을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다 커서는 뿔뿔이 헤어져 제 갈을 가고 말았다.
나중에 한참 커서는 우연히 을지로에 물건을 사러갔다가는 그이를 만났다.
껑쭝하니 키만 큰 아이 하나가 카운터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한참 숙맥인 시절이라 변변한 말 하나 건네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이와 나는 이미 저만치 떨어져 제 길을 걷고 있었음이라.
슬픈게도, 시간은 이리도 사람을 갈라놓기도 하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종기가 생기면 이명래 고약을 환부에다 붙이는데,
이것을 붙이면 소위 근(根)을 뿌리 채 뽑아내기에,
치료에 탁효(卓效)를 보였다.
말을 하고 나니 옛 고사 하나가 떠오른다.
(※ 참고 글 : ☞ 불균수지약(不龜手之藥))
그래 이것을 만드는 이는 크게 돈을 벌었다.
나는 어렸을 적에 종기를 모르고 살았지만,
고등학교 때 목덜미에 이게 생겼다.
당시엔 종기가 사회에서 이미 퇴장을 하던 때라,
이명래 고약을 찾기 어려웠다.
이 회사가 광화문 윗길 아현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누나가 이를 수소문 하여 찾아내고는 나를 데리고 갔다.
몇 차 약을 받아썼는데,
그리 완벽하게 나은 것은 아니나,
이 종기 덕분에 머리카락을 깎지 않고 버티던 기억이 있다.
당시 고등학교 사회라는 것이 병영문화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두발을 항시 짧게 깎아야 하였는데,
나는 이를 핑계로 열외로 재껴져 있었다.
하여 동무들의 부러움을 샀다.
헌데,
오늘 댓글을 주신 ‘됴’라는 닉을 분을 뵙는다.
이명래 고약과 더불어 됴고약이라는 것도 있었으니,
지금은 아마 모두들 ‘됴’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를 것이다.
됴는 조(趙)의 옛날 우리식 발음이다.
우리 엄마 성씨가 조인데,
글자를 배울 때 엄마는 趙를 써놓고는 이를 됴조라 일러주셨었다.
지금 생각하니 이게 형식상 동어반복이지만,
내용상으로는 근원을 특별히 새겨 일러 주시는 말씀이었음이니,
한달음에 나의 어린 시절, 그 분홍빛이 아련하니 흐르는 골짜기로 달려가고 만다.
飮水思源
물을 마시면, 그 샘의 근원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가뭄이 심해지면 이 때라서야 물의 공덕을 생각하게 된다.
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어찌 근원에 생각이 미치랴?
하지만 인자(仁者)는 가뭄이어든, 홍수가 나든,
늘 먹는 물의 근원을 잊지 않는다.
葉落歸根
낙엽은 떨어져 제 뿌리로 돌아가는 법.
이 말씀에서 종종 낙엽의 락(落)에 눈길을 빼앗기는 사람이 있는데,
반회고토(返回故土)를 말하고 있음을 잊지 말 일이다.
즉 내 인연지은 옛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의 뜻을.
不忘本
한마디로 본을 잊지 않는다는 말이다.
感恩戴德
베풀어 주신 덕을 지니고,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함이라,
雪中送炭
눈이 내리는데도, 숯을 보내 따뜻하게 해줌이라.
이로써, 험한 세상일지라도, 아름다운 분들이 계심을 알겠음이다.
아름다움을 넘어 놀라운 일이다.
세상이 힘들어, 곧잘 성을 내더라도,
우리는 끝내 이 아름다운 품에 안겨,
마음을 눕히고 편히 쉰다.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언쇄어(閑言碎語) (0) | 2017.07.05 |
---|---|
고양이 밥그릇과 개미 (2) | 2017.07.03 |
홍등(紅燈) (4) | 2017.07.02 |
Ultrasonic Mist Maker (2) | 2017.06.25 |
가지 밭에 서서 (0) | 2017.06.22 |
경적(警笛) (0) | 2017.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