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개복숭아와 삼독

농사 : 2017. 9. 20. 14:02


올봄에 개복숭아 묘목을 구입하였다.

열매를 탐하려 함이 아니라, 

그저 꽃이 좋아 이를 관상하려, 

추가로 더 심기로 한 것이다. 

올해에는 자체적으로 묘목을 키울 궁리를 트고 있기도 하나, 

몇 년이나마 시간을 줄이려 이리 나섰다.


외부 농장 두 곳을 통해 구매하였는데,

이 두 가지 상태가 눈에 띄게 달랐다.


한 곳에서 산 것은 줄기가 죽 뻗은 것이,

일견 기세가 좋고 잘 키운 것인 양 보였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구한 것은 줄기도 짧고,

가지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 있었다.


이 둘을 받아보고는 나는 이내 의심을 일으켰다.

죽 벋은 저 묘목들은 필경 비료를 많이 주고 단기간에 줄기를 뽑아 올렸을 것이다.

공개 시장을 통해 구한 것이라 농장으로선 책임감이 좀 덜하였을 수 있다.

그러니 보기 좋은 것이 먹기도 좋다는 식으로,

우선 허장성세로 거죽만 보기에 좋게 꾸민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반면 개인 농장에서 구입한 키 작은 묘목은,

그 농장 블로그 글들을 읽었을 때,

자연을 사랑하고 우직하게 농사를 짓는 분으로 여겨졌다.

다만 남편 분하고 통화를 몇 번 하였는데,

무뚝뚝하다 못해 정이 떨어질 정도로 불친절하고,

배송 처리 과정에서도 신뢰를 주지 못하여,

한참은 더 배움을 닦아야 하겠다 싶었다.  


이들을 농장 주변 곳곳에 나눠 심었다.

그리고 며칠 전 둘러보았는데,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키 큰 묘목은 별반 자라지도 못하였고,

이파리, 가지 상태가 썩 건강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키 작은 묘목은 자람세가 사뭇 왕성하였다.

게다가 결정적인 것은 주간 굵기가 두 배 이상 굵어져 있었다. 

키 큰 묘목은 도대체 일 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싶게,

키도 별반 자라지 못했고, 줄기 굵기도 별로 달라진 것을 못 느낄 정도다.


이들에게는 처음 식재 시 모두 비료를 주지 않고 심었다.

그 후에, 내가 한 일은 풀에 치지 않도록 몇 번 돌봐주었을 뿐,

나머지 모두를 저들의 소임에 맡겼을 따름이다.


키 큰 묘목은 애초 밀식 상태에서 비료 기운으로 웃자랐을 것이다.

이게 나한테 와서, 비료분도 없는 흙 속에 들어가니,

능력 이상으로 커진 지상의 줄기들을 부양하기 힘에 부쳤으리라.


하지만 키 작은 묘목은 필경 비료를 주지 않았거나,

주어도 조금 준 상태로 키워졌을 것이다.

이게 정식으로 흙에 자리를 잡자,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용을 쓰며,

지상의 줄기를 키워내며 한 해를 경영했을 것이다.

애초 지상 분 축적량은 제 힘이 감당할 만한 크기라,

힘을 낼 때 아무런 부담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함이니 올해 새로 자랄 때,

거리낌 없이 제 앞일에 충실할 수 있었으리라.


블루베리 역시 묘목 시장에 나온 것은,

대개 줄기가 길고, 이 때문이라도 커 보인다.

나는 저것들에게 어지간히 비료를 넣었구나 하는 생각을 단박에 일으키고 만다.

블루베리는 특히 비료를 그리 탐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품을 모르고 어린 묘목에 비료를 듬뿍 주고 키우면,

일시 웃자라 크게 자랄 수 있지만,

제 성품을 거스르고, 생리 체계에 반하는 인위적 강제 때문에,

생체에 많은 부담을 주게 된다.

장래 건강하게 자랄 토대를 잃게 된다.


특히 상업적 경영에 심히 경도된 농장의 경우,

필요 이상으로 비료를 투입하여,

일시 웃자라게 만들어 외양을 좋게 꾸미는데 주력하게 된다.

개중엔 재주를 부려 꽃이 피게 만들기도 한다.

나무에 꽃이 피면 시장에서 뭣도 모르는 소비자의 눈을 붙들게 된다.

어린 나무에 꽃이 피면 생식성장에 치중하며, 영양생장을 하지 못하여,

정상 발육에 차질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외려 꽃이 피면 부러라도 따버리며,

몸체 키우는데 주력하라고 일러주어야 할 판인데,

거꾸로 가니 문제가 크다.


온천하가 이문을 다투어 탐하며,

눈이 뻘게져 달려가는 형국이다.


묘목을 팔면서,

묘목의 장래를 염려하지 않고,

오로지 많이 팔릴 것만 꾀하기 바쁜 세상은 불행하다.

하지만 이런 실상에 어둡거나,

나아가 알면서도 거죽 외양에 혹하여,

그러한 세상을 부축하고, 따라가는 세상은 우매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독(三毒) 탐진치(貪瞋癡) 중,

이독(二毒)을 이리 농부와 시민 양측에서 나눠 가지고 있으니,

이는 바로 분노와 불신의 짙은 그림자를 사회에 길게 드리우게 된다.

세상은 실로 이리 어지로운 것이다.


탐진치 삼독은 흔히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으로 읽혀지고,

그리 이해를 하고 있으나,

실인즉 이는 범부(凡夫)의 것이다.


이승(二乘)과 보살(菩薩)의 삼독은 이와는 다르다.


말을 잇기 전에 우선 이들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본다.


이승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을 일컫는다.

성문은 부처의 설법을 직접 듣고 깨달음은 얻은 이를 말한다.

부처가 돌아가셨으니 앞으로 성문은 더 이상 나올 수 없다.

연각은 독각(獨覺)이라고도 하니,

이는 부처가 남기신 가르침을 새겨 깨우치거나, - 연각

스스로 깨우침을 얻은 이를 말한다. - 독각

스님뿐이 아니라, 오늘날의 철학자, 또는 과학자,

나아가 스스로 진리를 찾아 등불을 밝히고 참구하는 학인, 수행자들은 이 범주에 든다 하겠다.


보살은 실로 그 개념이 넓고 깊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남방불교와 북방불교 관점에 따라서도 다르고,

그 수행 층위에 따라 명칭이 다르기도 하며,

넓히 보기로 하면, 불교를 수행하는 이는 모두 보살이라 할 수도 있다.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깨달음을 얻고도 중생과 함께 하기 위해 부처의 위를 스스로 유보한,

유마거사나 지장보살 등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보살상이라 하겠다.


二乘之人欣求涅槃為貪欲,厭離生死為瞋恚,迷於中道為愚癡。菩薩欲廣求佛法為貪欲,呵惡二乘為瞋恚,未了佛性為愚癡。

(大藏法數)


“이승(二乘)은,

열반(涅槃)을 구하는 것으로 탐욕(貪欲)으로 삼고, 

생사(生死)를 여의고자 하는 것으로 진애(瞋恚)로 삼고, 

중도(中道)에 미혹(愚癡)하는 것으로 우치(愚癡)로 삼는다.

 

보살(菩薩)은,

불법(佛法)을 구하는 것으로 탐욕(貪欲)으로 삼고,

이승(二乘)을 미워하는 것으로 진애(瞋恚)로 삼고, 

불성(佛性)을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우치(愚癡)로 삼는다.” 


내가 여기서 ...로 삼는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열반, 중도, 불법을 구하려 집착하는 것 역시,

범부의 탐진치와 매한가지로 毒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을,

보다 실감나게 번역해본 것이다.


毒은 원래 사람을 해치는 풀을 뜻한다.

그런데 파자(破者) 놀음을 좋아하는 이 중엔,

이를 이리 풀기도 한다.

주인 주(主) + 없을 무(毋)의 결합으로 보아,

주인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를 빌어 삼독을 풀어 본다면,

범부는 탐진치로서, 

이승은 열반 등으로, 보살은 불법 등으로써,

이에 집착하기 바빠, 정작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니,

어찌 이를 두고 삼독에 들었다 하지 않으랴?


나는 기실 이런 파자 놀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진실에 기댄 것이 아니라,

우연을 사고, 재치에 기대어, 

한 때의 재주놀음에 과도히 빠지면, 

정작 본질에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표현은,

독을 이해하기엔 일면 본질에 다가간 측면이 있다.

이에 이를 한 번 차용해 본 것이다. 


내 이 삼독을 다시 한 번 새기는 뜻은 다름이 아니다.

내각 곧잘 삼독 탐진치에 빠진 세상 사람을 탓하나,

실인즉 이를 벗어난 이상적인 상태일지언정,

나 역시 이를 구하고 있은즉,

그 집착하는 바는 매 한가지로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

반성이 이내 따랐기 때문이다.


허나, 삼독에도 正三毒이 있고 邪三毒이 있음이다.


貪欲有二種:一者、邪貪欲,二者、貪欲。瞋恚有二種:一者、邪瞋恚,二者、瞋恚。愚癡有二種:一者、邪見愚癡,二者、愚癡。是三種邪毒眾生難可化度,餘三易度。

(大智度論 第34卷)


“탐욕(貪欲)엔 두 종이 있다.

하나는 사탐욕(邪貪欲)이고 둘은 탐욕(貪欲)이다.


진애(瞋恚)엔 두 종이 있다.

하나는 사진애(邪瞋恚)이고 둘은 진애(瞋恚)이다.


우치(愚癡)엔 두 종이 있다.

하나는 사우치(邪愚癡)이고 둘은 우치(愚癡)이다.


삼종의 사독(邪毒)은 중생이 건너기 어렵고,

나머지 독은 건너기 쉽다.”


그러니까, 삼독(三毒)과 사삼독(邪三毒)이 있다는 말이다.

후자는 중생이 어찌 해본들 쉽사리 벗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전자는 현실의 삶을 영위해 가는데,

욕망의 당체인 존재들, 곧 중생의 선용이 가능하다.


가령 재주꾼이 재주넘기에 공을 들여 매진하는데 잘되지 않는다 할 때,

화도 나고, 더 잘하기 위한 욕심도 부릴 수 있다.

이럴 경우 이런 욕망은 삼독에 해당된다 하겠다.


하지만 강도가 하나 여기에 있을 때,

강도질 하는 방법을 어찌 하면 잘 할까 이리 탐한다면,

이는 사삼독(邪三毒)에 해당한다.


若無三法則佛不出世,若三法不斷則不得離老、病、死。三法者則是三毒


“만약 삼법이 없다면 부처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삼법이 끊어지지 않았기에 곧 생노병사를 여읠 수 없게 된다.

그런즉 삼법이야말로 삼독인 게다.”


그러니까 삼독이 있으니까 삼법이 있고 부처가 출현한 것이란 얘기다.

그러니 보살은 바란다.

삼독이 생기지 않게 하고,

삼독의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이란 것을.


세상엔 다 함이 없이 삼독이 생기고,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이승이나 보살은 삼독을 없앨 궁리에 집착한다.

三法則三毒

삼법이 곧 삼독의 이치를 안다면,

이승이나 보살은 이내 열반에 들리라.


허나, 나는 어떠한가?


가령, 길을 달리다,

우측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갑자기 속도를 줄이며 유유히 우로 빠져 나가는 차량을 뒤따르거나,

점멸등도 켜지 않고 갑자기 속도를 줄이더니만 그 자리에 태연히 서서 주차하는 차 때문에,

급정거를 하며, 삼독에 빠져 곧잘 화를 불같이 내지 않았던가?


세상의 제법(諸法)은 是善、是不善,是縛、是解等이라,

선하기도 하고, 선하지 않기도 하며,

계박(繫縛)되어 있기도 하고, 풀려 있기도 하다.

그런즉 삼법을 흔구(欣求)하지도, 

삼독을 여의기를 원망(願望)할 일도 아니다.


다만,

등불로 길을 비추며,

내 길을 나아갈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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