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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암호화폐

decentralization : 2018. 2. 26. 11:27


‘내가 사기만 하면 떡락이다.’


주식시장, 코인시장 등은 물론 여하한 투자 시장 어디서고,

이런 소리를 곧잘 듣는다.

그런데 이게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혹인(或人 or 惑人)의 경우 거의 일상적이다시피, 자주 일어나니,  

참으로 야릇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곡절은 도대체 무엇인가?


단순히 생각하여,

오르지 않으면 내릴 터인데,

거꾸로 ‘내가 사기만 하면 오른다.’

왜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꼭 비극적 결말로 귀결되고야 마는가?


그렇다면, 떡락한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 경로를 따라가 보면,

혹, 무엇인가 단서를 찾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가질 만도 하다.

하지만, 과연 이게 말처럼 그리 쉬이 풀릴 수 있는 문제인가?

그럴 양이면, 벌써 누구나 개미 탈을 벗고 고래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비풍비번(非風非幡)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六祖因風颺刹幡。有二僧對論。一云幡動。一云風動。往復曾未契理。祖云。不是風動不是幡動。仁者心動。二僧悚然。

(無門關)


혜능 스님이 오조 홍인스님으로부터 전법 받아 남해 땅 법성사에 이르렀을 때다.

인종(引宗)법사가 열반경 강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절 앞에 깃발이 펄럭이며 날리고 있었다. 

당시는 설법시, 기(旗)를 높이 달아 그 표시를 했다.

이 때 두 중이 서로 대론하되, 

하나는 깃발이 날린다고 하고, 

하나는 바람이 분다라고 서로 자기의 주장을 할 때,

육조가 이르길,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오, 깃발이 날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두 중이 송구스러워했다.


이게 흔히 비풍비번(非風非幡)이라 이르는 화두이다.


내가 이곳에서 얼마 전 기술적 분석에 대하여 글을 올리니,

어느 인자(仁者) 하나가 나타나 호가창에 달린 깃발만 뚫어지게 쳐다보면 다 이룰 수 있는데,

이 따위 것 올리면 하수 취급받는다 하였다.

내 그래 이를 이름 붙여, 적혈안(赤血眼)이라 하였다.


그러자 또 하나가 끼어들며, 

통계란 다 학문에 불과한 것이다. 

통계학자, 경제학자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다.

도박에 불과한 영역에선 통찰력, 심리에 의지하여야 한다.

이리 일갈을 하며 헛기침을 대차게 내뱉었었다.

아, 얼마나 의젓한 태도인가 말이다.

사실 나는 이 말에 조금 감동 먹었었다.

이이를 나는 통찰이란 이름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아직 등장하지는 않았겠지만,

채굴인이라면, 지랄염병하고 자빠졌다며,

다만 채굴하면 마음의 흔들림 없이 돈을 벌 수 있다.

이리 말하며, 잔뜩 어지러워진 마당을 물 뿌리고 비로 쓸며 자리를 정돈하였을까나?


저마다의 색색 깃발 들고 이리 나서니,

과연 시장이란 오만 사람을 다 만날 수 있는 참으로 재미있는 곳이구나 싶다.


그런데 말이다.

마침(磨針)이라,

과연 철봉 갈아 바늘 만들 수 있는가?


혜능이야 오조 홍인(弘忍)으로부터 법의 증표로 의발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미욱한 풋중들은 바람이네, 깃발이네 하며,

동서로 찢어 갈라져 의론만 분분히 일으키는 것도 모자라,

마침(磨針)조차 하지 않을진대 도대체 어느 명년에 큰일을 마칠 수 있는가?


머릿속에 잠자리 떼가 분분히 날고 있다.

내 이를 채로 거두면 삼태기로 가득 넘치리라.

다만 그 중 하나 둘을 덧붙이며 글을 마감하려 한다.


***


神秀 偈  唐 神秀大師 (당나라 신수대사의 게송)


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의 나무요

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 같나니

時時勤拂拭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莫使有塵埃    티끌과 먼지 끼지 않게 하라.


慧能 偈  唐 六祖慧能大師 (당나라 육조혜능대사의 게송)


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無臺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佛性常淸淨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何處有塵埃     어느 곳에 티끌 먼지 있으리오.


육조 혜능이야말로 선종이 천하에 널리 흩뿌려지게 된 실질적 종주다.

오조 홍인(弘忍)에게 법을 받은 혜능의 전법설화는 여느 종교 이야기가 아니라,

차라리 향기 그득한 문학적 뜨락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뒤늦게 입문한 일자무식 혜능이 법기(法器)임을 알아본 홍인은 

당시 수석제자인 신수를 제치고 혜능에게 법을 전하면 대중이 

납득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지나 않았을까 싶다.


해서, 홍인은 짐짓 대중에게 이르길 이제껏 공부한 바를 게송으로 지어오라고 명한다.


신수는 게송을 지어 회랑 벽에 붙인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有塵埃


글을 모르는 혜능은 다른 스님의 도움을 받아,

이 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붙여 건다.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佛性常淸淨

何處有塵埃


이에, 

오조 홍인은 대중들의 질시를 염려하여,

혜능을 삼경에 조사당으로 은밀히 인견한 후,

그에게 법을 인가한다.

 

나는 예전에 이 양 게송을 처음 대하고 나서,

그 뜻은 그러하다하되,

언어구조상 한 가지 의문을 갖은 적이 있다.


즉, 혜능의 게송이 여법(如法)하다한들,

신수의 게송을 치닫고 나서야 혜능의 게송이 선 것이 아닌가?

만약 신수의 게송이 앞서서 게시되지 않았다면,

혜능의 게송은 어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음인가 말이다.


내용은 차치하고, 언어 형식 구조상으로는 분명,

앞을 부정함으로서 자신이 설 자리가 마련되었다.

부정의 근거와 더불어 존립이 성립되는 게송이란,

따지고 보면 그 상대에게 대단히 신세를 지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만약 상대를 구하지 않고는 독립적으로 성립될 형편이 아닌 게송이라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한결 마땅한 태도가 아니겠는가?

그러하기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저들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어쩔 도리 없이 말을 해야 했더라도, 전치부정(前置否定)의 형식이 아니라,

외통으로 스스로 독립된 게송으로 올올(兀兀)히 외쳐야 할 것이라.


게다가, 신수의 게송이 과연 깨달음의 경지를 빗겨난 것인가?

身是菩提樹라는 것인즉 몸이 즉 보리라고 이르고 있음이니,

부처의 가르침과 다를 게 무엇인가?

다만 티끌을 부지런히 닦아내어 청정심을 기르라는 것이 덧붙여진 것이다.

12연기설의 무명(無明) - 노사(老死)이란 것이 어느 날 깨우쳤다고 바로 벗기어지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 잘난 부처, 그 역시 죽지(老死) 않았는가 말이다.

여기 신수는 점수(漸修)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 혜능은 신수의 게송을 도움닫기 식으로 밟고 올라,

신수의 게송을 짐짓 기롱하고 있는 것이다.

신수가 말한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를 혜능은 파헤쳤을 뿐,

신수가 말한 깨달음의 본질에선 차이가 없다.

다만, 깨달음이후 닦음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만이 신수와 다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수야말로 성실한 인간이 아닐까?

공연히 더 이상의 수행은 필요 없다고 거들먹거리고 말 위인들에게

신수는 곡진한 경책의 말씀으로 외려 음미할 만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기실 같지 않은 선객(禪客)들이 깨우쳤네 어쩌니 하며 우쭐거리며,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이들 도배들은 외려 혜능을 따르는 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출되었으리라.

물론 그들은 위승(僞僧)들이겠지만.


당시 나는 이런 따위의 소견들이 마음 속에서 일었던 것이다.


그러다, 근일 청말(淸末) 이종오(李宗吾) 선생의 글을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을 만났다.

해서 이리 적기(摘記)해둔다.


전서산(錢緖山)은 이리 일렀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체이고, 

선, 악이 모두 있는 것이 의지의 움직임이며,

선, 악을 아는 것이 양지(良知)이고,

선을 위해 악을 제거하는 것이 사물의 이치에 들어맞는다.”


“無善無惡心之體,有善有惡意之動,知善知惡是良知,爲善去惡是格物”


이것이 양명학(陽明學)의 본이 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왕용계(王龍溪)는 이리 말했다.


“만약 깨우치게 되면 마음은 무선무악의 마음이요,

의지도 무선무악의 의지요,

앎 역시 무선무악의 앎이며,

사물 또한 무선무악의 사물이 된다.”


“若悟得心是無善無惡之心,意即是無善無惡之意,知即是無善無惡之知,物即是無善無惡之物”


이는 마치 전덕홍(=전서산)이 오조 문하의 신수와 유사하며, 왕용계는 혜능과 엇비길 만하다.

덕홍이 말한 바는 신수의 “때때로 먼지를 닦는다. 時時勤拂拭”라는 말과 유사하며,

용계의 설한 바는 혜능의 “본래 하나의 물건이 아니다. 本來無一物”라는 말과 같다.

소위 돈오를 이르는 것인데, 왕양명은 이리 말했다.


“여중(汝中=왕용계)은 모름지기 덕홍의 공부를 써야 하며, 덕홍은 여중의 본뜻을 꿰뚫어야 한다. 

두 사람의 견해는 다만 서로 취할 만하지, 

서로 해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말한다.

‘용계어록(龍溪語錄)’에서 말하고 있는 이치는 육조단경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길은 달라도 종국에 이르르는 곳은 같지 않은가 말이다. 

우주진리란 다만 연구가 철저하면 피차 소견이 서로 같은 것이다.


原文


以上一段,是從拙作《社會問題之商榷》第三章“人性善惡之研究”中錄出來的,我當日深疑陽明講學極爲圓通,處處打成一片,何至會把天理、人欲歧而爲二,近閱《龍溪語錄》所載“天泉證道記”,錢緖山謂“無善無惡心之體,有善有惡意之動,知善知惡是良知,爲善去惡是格物”四語,是師門定本。王龍溪謂:“若悟得心是無善無惡之心,意即是無善無惡之意,知即是無善無惡之知,物即是無善無惡之物。”時陽明出征廣西,晩坐天泉橋上,二人因質之。陽明曰:“汝中(龍溪字)所見,我久欲發,恐人信不及,徒增躐等之弊,故含蓄到今。此是傳心秘藏,顔子明道所不敢言,今既是説破,亦是天機該發洩時,豈容復秘”陽明至洪都,門人三百餘人來請益,陽明曰:“吾有向上一機,久未敢發,以待諸君自悟。近被王汝中拈出,亦是天機該發洩時。”明年廣西平,陽明歸,卒于途中。龍溪所説,即是把天理、人欲打成一片。陽明直到晩年,才揭示出來,由此知:門人提出剜肉做 瘡之問,陽明忿然作色,正是恐增門人躐等之弊。傳習錄是陽明早年的門人所記,故其教法如此。 

錢德洪極似五祖門下的神秀,王龍溪極似慧能,德洪所説,時時勤拂拭也,所謂漸也。龍溪所説,本來無一物也,所謂頓也。陽明曰:“汝中須用德洪工夫,德洪須透汝中本旨,二子之見,止可相取,不可相病,”此頓悟漸修之説也。《龍溪語錄》所講的道理,幾與六祖壇經無異,成了殊途同歸,何也?宇宙眞理,只要研究得徹底,彼此所見,是相同的。


이 논의를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에 대입하면,

고자(告子)의 성무선무부선지설(性無善無不善之説)에 이르게 되니,

이는 성선설과 성악설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로 지양(止揚)되고 만다.


맹자와 순자 그리고 순자의 제자인 한비자의 법가,

양자, 묵자들은 모두 천하의 의사들인 것이다.

세상에 편급된 고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양의(良醫)인 것이다.


저들을 과연 누가 분열시켰는가?

실인즉 미망(迷妄)들이라 할 터.


***


여기 내가 한철 의탁하고 있는 시골 밭.

한탄강변에 가까워, 봄이면 바람이 언덕 위까지 드세게 불어온다.

그 언덕 위에 서면,

그리고 근처 산이라도 올라서면,

바람이 웅웅 거리며 호랑이 소리를 내며 강 아래로, 계곡 밑으로 흘러간다.

나는 언제나 저들처럼 어디에 매이지 않는 영혼이 될 수 있을까?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다.

이것이 깃발을 날리기도 하고, 

때로 풍경 소리도 되고,

때로는 마음 밭에 내려 잔잔한 여운을 남기고는 사라진다.


그렇다. 

허공중으로 사라진다.

바람소리는 결코 남겨지지 않는다.


이 바람소리를 잠자리 잡듯 채집망 속에 잡아두자는 시도가 있었다.

서빙고, 동빙고에 얼음을 캐다가 쟁여두고는 여름철에 꺼내 쓰는 이치는 무엇인가?

얼음은 여름에는 얼지 않기 때문이다.

허니, 겨울철에 꽁꽁 언 한강의 얼음덩이를 썩 베어다가 빙고(氷庫)에다 저장해둔다.

그리고는 여름철에 요긴하게 꺼내 쓴다.


바람소리 역시 귓가를 스치고 지나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

얼음을 빙고(氷庫)에 가두듯,

바람소리를 저장하고자 고안된 것이 축음기(蓄音機) 아닌가 말이다.

바람이 허공중에 지나가는 궤적의 문양을 레코드판에 새김으로서,

영원히 잡아채어 창고 혹은 감옥에다 가두는 것,

그것이 축음 기술, 조작질인 것이다.


녹음(錄音)이란 말은 소리를 기록하는 뜻임이되,

애초엔 이 말보다 축음이란 말을 썼다.

녹음이란 말에는 축음(蓄音)이 지시하는 ‘저장한다’, ‘감춘다’라는 근원적인 뜻이 거세되고,

그저 연필로 무엇을 ‘기록한다’, ‘적는다’라는 정도의 범상(凡常)한 뜻만 남아있다.


어쨌거나, 이 기술은 허공중에 그려진 바람의 흔적을 그려내는 데 일견 성공한 듯 싶다.

공기 중에 에너지가 퍼져나가며 밀(密), 소(疎)의 패턴을 만들어낼 터인데,

그것을 흉내 내어 레코드판에 새김으로서 허공중에 사라지고 마는 소리를 잡아 붙든 것이다.

레코드판에 새겨진 이랑과 고랑이 만드는 문양이란 실로 소리에너지의 패턴인 것인데,

이것에 철심이 밭갈 듯 지날 때 흔들리는 진동을 전기 에너지로 포착, 환원하여,

스피커를 때림으로서 원래의 소리를 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역시나, 사진(寫眞)이란 것이 무엇인가?

빛(光)이란 진실의 세계를 베끼는 기술이 아닌가?

축음은 소리를 베끼는 것이로되,

사진은 빛을 베끼는 것이니,

이게 모두 거짓(假)을 지향하는 것임이라.


하지만,

이게 그저 단순한 거짓(假)이 아님이라,

진실의 세계로 틈입(闖入)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같은 것이 아닐까?

어찌나, 저리도 성실한 모습이라니 ...

하마 달려가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다.


저들 서양 기술자들의 정신세계란,

비풍비번(非風非幡)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날로그 세계에선 

그나마 저 소리의 문양을 소박하니 그리고, 충실하게 따라 재현하는 것이지만, 

이제 디지털 세계에 들어와서는 사뭇 달라졌다.

저 문양은 숫자로 바꿔버린 것이다.


01000101100100111111 ......


소리가 문(紋, 文)으로, 다시 수(數)로 환치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운수(運數)라는 것도 거칠게 말하자면,

운(運) 즉 삶의 운동(運動)이란 것을 수(數)로 풀어 보자는 것이다.

금목수화토 오행(五行)만 하여도 수(數)로 배대(配對)하길 

1.6수, 2.7화, 3.8목, 4.9금, 5.10토 이리 하지 않는가?


실체를 수(數)로 바꾼다는 것은 곧 고도의 추상화 작업인 것이다.

바람도 우리의 삶도 구체적인 것이다.

바로 이 현장, 이 때, 

운동(運動)하고 있는 여여(如如)한 것이거늘,

왜 수(數)를 등장시켜야 하는가?

인생을, 삶을, 현실을 엿 바꿔먹기라도 한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하여 이미 몇 차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구체적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도통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즉 기호화, code화하여 추상적인 틀(frame)을 마련해둠이 아니겠는가?

수(數) 역시 code에 다름 아니다.

복잡다단한 현실 세계를 도식화된 단순한 틀을 통해 역조명(逆照明)함으로서

마치 장님이 지팡이로 더듬 더듬 개울가를 건너듯,

그리 이 미망의 세계를 어렴풋이 짐작하여 지나려함이 아니겠는가?


수(數), code, 기호, 상징은 여전히

바람 대신 깃발인 것.

만약 바람을 찾는다면 깃발을 부러뜨려야 온전히 바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렇다한들 그 누가 깃발 없이 바람을 볼 수 있으며,

풍경(風磬)없이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음인가?

어느 장부(丈夫)가 있을런가?

(※ 장부(丈夫) :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육조 혜능 스님은


“비풍비번(非風非幡)”


이 한 마디로 바람을 재우신 것인가?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萬法歸一 

一歸何處


바람 부는 날.

계곡 안으로 우우 소리를 내며 낙엽이 몰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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