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현침문(懸針紋)
어느 날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을 보내드리고,
거기 오신 분과 뒤풀이 술자리를 가졌다.
그 분들은 모두 고인의 친척이나 친구 분들이었으되,
나만은 그들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객손에 불과하되, 고인을 생각함에 저분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으니,
함께 슬픔을 같이 하였다.
헌즉, 처음 만나 뵙는 분들이지만,
오래도록 정분을 나눈 사이인 양,
망자를 매개로 한 마음이 되어 스스럼이 없었다.
장례가 끝났지만 흩어지지 않고,
다시 모여 술집 하나를 겨냥하여 들어앉았다.
본디 상례라는 것이 고인을 추모하는 것이로되,
알고 보면 남아 있는 사람들의 슬픔을 쏟아내고,
서러움을 추스르는 일에 더 열중하곤 한다.
고인을 추모하는 일이 그치면,
저마다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법.
게다가 술이 들어가게 되면,
고인은 이미 진작에 저 멀리 전송하고,
모두는 자신의 일에 종사하기 바빠지는 것이다.
한 분에게 집 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상대에게 이르는,
타이름이 곡진하고,
염려가 간절하다.
늦둥이를 하나 나았는데,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라 한다.
우리말로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증후군(注意力缺乏過剩行動症候群)이라고 하는데,
중증이라 한 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고 한다.
급기야, 울먹이시기까지 하는 바라,
나 역시 어찌 할 수가 없으니, 가슴이 매어온다.
그 분의 면상(面相)을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흔치 않게 보는 상이라 여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소위 현침문(懸針紋)이라,
인당(印堂) 즉 미간에 마치 바늘을 매달아 놓은 듯,
한 줄 금이 죽 내리 그어져 있었다.
懸針主破,克妻害子。
이런 상을 가지게 되면,
처자를 해치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細如懸針者絕子貧寒
게다가 가는 줄금이 그어져 있기라도 한다면,
자식이 없고, 빈한하다고 가르쳐지고 있다.
한의학적으로는 심혈관 질환이 있을 때,
현침문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말씀을 나누니, 매사 이치에 밝고 소명(昭明)하시다.
그러하니 일가의 일처리에 중심 역할을 맡으셨고,
고인 역시 이 분을 신뢰하셨다.
본디 관상 글은 써내기가 쉽지 않다.
좋은 상은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
혹 그런 상을 가진 분이 보게 되면,
자칫 오해를 일으키게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우연히 동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
거기 등장한 빌게이츠의 인당 가운데서 바로 현침문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그의 얼굴에선 이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늙은 그의 면상에 감춰진 현침문이 이제 드러난 것이다.
혹 이 현침문의 사람일지라도,
과도히 걱정할 일은 아니다.
고대의 상법은 이런 가르침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有心無相,相隨心生;有相無心,相隨心滅。
마음이 있고, 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더라도,
상은 이내 마음을 따라 생겨나게 된다.
상이 있되, 마음이 없으면,
상은 마음을 따라 없어진다.
이제 여곤(呂坤)의 신음어(呻吟語)란 글에 등장하는 말씀 하나를 앞에 두면,
이 말이 여실하니 바로 납득이 될 것이다.
有相予者,謂面上部位多貴,處處指之。予曰:“所憂不在此也。汝相予一心要包藏得天下理,相予兩肩要擔當得天下事,相予兩腳要踏得萬事定,雖不貴,子奚憂?不然,予有愧於面也。”
“관상을 보는 이가 하나 있어 나(呂坤)의 관상을 보았다.
얼굴 여러 곳을 가리키며 귀한 상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그러자 내가 이리 말하였다.
‘내가 우려하는 바는 귀하고 아니 하고가 아니다.
그대가 내 마음을 본다면, 응당 천하의 진리가 다 담겨져 있으며,
그대가 내 양 눈썹을 본다면, 응당 천하의 큰일을 다 담당할 것이며,
그대가 내 양 다리를 본다면, 응당 만사를 착실히 수행할 수 있으리란 것을 안다.
비록 귀한 상이 아니라도, 그대가 어찌 염려할 일인가?
그렇지 않다면(실제가 마음과 다르다면), 그야말로 내 얼굴에 부끄러울 것이다.’”
여곤의 이 글을 보면 진희이의 다음 글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心者貌之根,審心而善惡自見。
行者心之表,觀行而禍福可知。
(陳希夷, 心相篇)
‘마음은 겉꼴의 뿌리이니, 마음을 살피면 선악이 절로 드러난다.
행동이란 마음의 외표(外表)인 바라, 행동을 잘 보면 화복을 가히 알 수 있다’
상서(相書)의 꼭대기에 이르면 단지 얼굴의 꼴만을 두고 논하지 않는다.
소위 相由心生이라, 즉 상이란 마음으로 말미암아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가(儒家)에서 다음에 말하는 것과 맥이 닿아있다.
有諸內,必形諸外。
內充實,而外有光輝。
胸中正,則眸子暸焉。
胸中不正,則眸子眊焉。
‘내심에 있는 모든 것은, 필히 밖으로 모두 형체를 드러낸다.
속알이 충실하면, 밖으로 광휘를 뿜는다.
흉중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흉중이 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혼탁하다.’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도 일견 맥이 닿아 있다.
自種因,自受果。
‘스스로 인을 짓고, 스스로 갚음을 얻는다.’
하지만 세속적인 숙명론과는 다르다.
相隨心轉
마음이 구르는 대로, 상은 따르는 법.
본디 상(相)과 명(命)은 말(末)에 불과하니 여기 관심을 두지 않는다.
舍本逐未이라 본을 버리고 말을 취할 일이 아니다.
자기 얼굴을 두고 관상을 본다든가, 사주팔자를 보는 따위로,
미래의 운명을 점치고, 의심을 잠재우는데 한눈을 팔 일은 아니다.
행운이 따를 터이니깐 로또를 사야겠다든가,
상이 좋지 않으니까 횡액을 만날 것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모두 다 번뇌를 더하는 짓이라,
해만 있지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
(※ 呂坤(1536年10月24日-1618年7月24日)
字 叔簡,
卑 心吾, 新吾
自號 抱獨居士
명나라 때 인물로 주희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반대하였다.
주자학, 불교, 도가, 법가에 대해 회의하며,
선진 시대의 유학 본류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我只是我
‘나는 다만 나일뿐이다.’
天地萬物只是一氣聚散,更無別個。
천지만물은 다만 기가 모였다 흩어질 뿐, 그 외 다른 것이 없다며,
기일원론(氣一元論)을 견지하였다.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하여, 전통적인 제 학설을 비판하였다.
어떤 상을 가졌다 한들,
我只是我
‘나는 다만 나일뿐이다.’
그러한즉,
모두는 자기 상(相)을 사랑할 일이다.
그것이 어떠한 것일지라도,
나는 다만 나일뿐임이라,
상(相)에 과도히 집착할 일이 아니다.
我只是我!
그 분에게 말씀을 전한다.
'용기를 잃지 마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