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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현정(破邪顯正)

소요유 : 2019. 1. 1. 12:46


파사현정(破邪顯正)


오늘 아침 뉴스 하나를 접하다.


다음은 문재인 대통령의 새해 인사 전문.


기해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겨울, 집집마다 눈길을 걸어 찾아가 손을 꼭 잡고 인사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국민들이 열어놓은 평화의 길을 아주 벅찬 마음으로 걸었습니다.

평화가 한분 한분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돌이킬 수 없는 평화로 만들겠습니다.

우리 땅 곳곳을 비추는 해처럼 국민들은 함께 잘살기를 열망하십니다.

미처 살피지 못한 일들을 돌아보며 한분 한분의 삶이 나아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겨울, 더 따뜻하게 세상을 밝히라는 촛불의 마음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출처 : zdnet)


대개, 새해 인사라는 것이,

그저 뻔한 것이라, 별반 큰 의미가 실려 있지 않다.

그저 좋은 게 좋다라는 말 부주 외에,

거기서 무슨 의미를 건져 올릴 수 있으랴?


악담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지.


새해라 모처럼 한 톨일지언정,

생심(生心)을 내어 착한 양심을 일시 되돌아 볼 수만 있어도 다행이지.

일 년 365일 중 364일 나쁜 짓, 악행을 일삼다가,

단 하루 만이라도 마음을 무장해제하고,

착한 양 행세하는 것이 아니냐?

내가 이리 짖궂게 묻는다한들,

아니다라며,

그가 과연 이를 나머지 364일도 매양 한결 같이 할 수 있겠음인가?


나는 이럴 자신이 없다.

하여 새해 인사 따위는,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남우세스러워, 하지 않는다.

나는 이리 흉한 인사임이라.


문자 메시지를 통해 올라온 새해 인사라는 것도,

많은 게, 이게 대량으로 기계로 돌려 버린 것이기 십상이라,

별반 감흥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어제 받은 폰 상의 인사 글이라는 것도,

그저 인연의 끝자락일지언정,

얽어 두려는 자의 불성실한 모습을 대하는 양 싶은 것도 있었다.

한 해 내내,

헤살 짓 하다가,

마지막 날,

인사를 차린들,

그게 무삼 소용이 닿으랴?


그저 여느 날처럼, 대하며,

자신의 본색을 온전히 함만 같지 못하다.


대통령의 인사라 하여 뭐 다를 것이 있으랴?

(자칫 나처럼 심술궂은 이이게 걸려 봉욕이나 당하고 말지.)

그의 말이란 것, 그저 심드렁하니 지나칠 뿐,

게다가 정치인의 말엔 언제나 자화자찬의 양념이 지나치지 않고 들어 있기 일쑤다.

이것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갈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

‘이 겨울, 더 따뜻하게 세상을 밝히라는 촛불의 마음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


왜 그런가?


순간, 내 마음에 떠오른 것은,

촛불은 결코 따뜻하라고 들은 것이 아니라,

파사현정(破邪顯正)

바로 이를 원망(願望)하였기 때문이 아니랴?

이런 생각이 불처럼 인다.


나도 사람인지라,

이제부터, 청산처럼 말없이 살려고 하였는데,

문의 말을 대하자,

다시 다독여 재운 불이 솟는다.

한참 수양이 덜 된 까닭이다.


도대체 따뜻함을 구하려 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엄동설한 그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고,

시린 손을 불며 광장에 모일 까닭이 있으랴?

따뜻함을 구할 일이라면, 차라리, 집에 들어가,

화로에 둘러 앉아,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지.


‘이 겨울, 더 따뜻하게 세상을 밝히라는 촛불의 마음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촛불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 수준이라는 게,

이 정도면 참으로 어지간하니 한심하다 싶었다.

그는 시민들의 촛불 정신에 대한 인식은커녕,

범부(凡夫)의 감각조차 없는 이가 아닌가?

촛불 앞에서 따뜻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다니,

이 얼마나 한가한가?

도대체 저 촛불에서 따뜻함을 길어 올릴 수 있는가?

저것은 한마디로 슬픔과 분노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의 인지 능력, 감수성이란 너무도 결함이 많구나.

불결하다.


바슐라르는 불에 대하여 이리 말했다.


“불은 물질 속으로 내려가, 증오와 복수처럼 잠재 상태로 그 속에 몸을 숨기기도 한다. 모든 현상 중에서, 불이야말로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가치 부여를 분명하게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현상이다.”


그렇다.

바로 그런 것이다.


시민 각자는 물리적으로 약하다.

당시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일으켰다.

하여 그 증오와 복수를 촛불로 세상을 향해 울부짖었다.

비록 가녀린 외침이지만, 천, 만이 모여,

세상을 변개(變改)시키려 하였다.


여기 어디 따뜻함이 한 톨인들 있는가?

저 촛불은 그저 슬픔과 분노의 상징이다.


따뜻하게란 말을 좋게 봐주려한들,

'더 따뜻하게'

여기 등장하는 '더'란 부사 때문에 그러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도대체 적폐가 그대로 있고, 삿됨이 온존한 데,

더 따뜻함이 어찌 구해질 수 있겠는가?

한가하니 따뜻함을 노래하기 전에,

먼저 더럽고, 삿된 것을 깨뜨릴 칼을 갈고, 철퇴를 준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닌가?

이리 함에도 지금 시간은 한참 늦었지만.


하여 나는 한동안 혹 내게 잘못이 있는가 싶어,

이리 저리 저 문장을 분석하여 보았지만,

아무리 하여도 분명 저 문장 주체의 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사현정.


금년 교수들(교수신문)이 뽑은 2018년도 사자성어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다.

이에 대하여는 내가 지난번에 글을 써 올렸다.

(※ 참고 글 : ☞ 임중도원과 일모도원)


헌데, 공교롭게도,

2017년도에 뽑은 사자성어가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다.

내 지난번 글에 지적하였듯이,

교수 집단이란 것이 얼마나 엉터리로 돌아드는지 여실하지 않은가?

왜 그런가?

지난해엔 파사현정(破邪顯正)이었다가 올해엔 임중도원(任重道遠)으로 돌아들은,

그 마음보의 경로를 보라.

이것은 문의 인사말처럼,

촛불을 따뜻함으로 독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본디 파사현정이란 불교의 삼론종(三論宗)의 교의(教義)다.

당(唐)의 길장(吉藏) 스님의 삼론현의(三論玄義)를 따라가 본다.


但論雖有三。義唯二轍。一曰顯正。二曰破邪。破邪則下拯沈淪。顯正則上弘大法。

(三論玄義)


“다만 삼론에 셋이 있다지만,

뜻으로 보자면 다만 둘 뿐이다.

하나는 현정(顯正) 둘은 파사(破邪)다.


파사는 아래로는 물에 빠진 것을 건져 올리는 것이며,

현정이란 위로는 불법을 펴는 것이라.”


이를 현실 세계에 빗대면,

파사란 왜곡되고 굽은 것을 바로 펴는 것이요,

현정이란 진리를 펴고, 정의를 창달하는 것이라 하겠다.


夫有非有是此則為邪。無是無非乃名為正。


무릇, 있고 없고 시비가 있는 것이 사(邪)요,

옳고 그름이 없는 세계로 이르는 것이 정(正)이라 하였다.


그러하니, 이는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면,

즉 파사(破邪)가 없다면,

진정 바른 세계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출처 : 網上圖片)


헌데,

교수 집단은 전년에 파사현정이라 하더니만,

슬그머니 파사는 들어가고 그저 현정하라고만 이르고 있다.

그럼, 과연 파사가 제대로 이뤄져 그리한 것인가?

결코 아니지 않은가?

이것은 문이 촛불을 두고 따뜻함을 끌어 올리는 것과,

그 걷는 경로는 매한가지가 아닌가?

파사는 실종되어 버리고,

스리슬쩍 현정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촛불 정신을 능욕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그래 나는 저 사자성어를 뽑아내는 교수 집단이,

미아리에 즐비한 허튼 점집에서 점사(占辭) 뽑아내듯 엉터리라고 하는 것이며,

문의 저 인사말은 세상을 흐리는 삿된 말이라 하는 것이다.


현정도 그저 제 말을 꾸미는 수사(修辭)에 그칠 뿐,

미뤄볼 때, 믿을 만한 전망이 서지 않는 말이다.


既有邪可破。有正可顯。


삿됨이 있으면 파할 수 있는 것이며,

바름이 있으면 드러내 펼 수 있다.


헌데,

삿됨이 있고,

이를 파(破)할 수도 있는데,

흉내조차 하지도 않았으면서,

이내 바른 것을 펴겠다 하고 있으니,

이 어찌 가증스럽다 하지 않을 수 있겠음인가?


(utube, [노래]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밝혀진 것도 없고,

그럴 의지도 사그라진 오늘.

촛불이 그저 따뜻함의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는,

오도(誤導)된 꾐, 꾸며 숨긴 가장(假裝) 행렬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역겨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촛불은 따뜻함이 아니라,

파사(破邪) 바로 삿됨을 깨뜨리고자 하는 분노의 상징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이것을 공연히 구부러뜨려 따뜻함으로 환치하고 있는,

이 비열한 역사 현장에 나는 메스꺼움을 느끼며 구토한다. 


파사(破邪),

그런 연후라야, 현정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거늘,

파사도 없이 현정을 노래하고 있음이니,

저 현정을 어찌 미덥다 할 수 있으랴?


‘이 겨울, 더 따뜻하게 세상을 밝히라는 촛불의 마음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결코 잊지 않겠다 다짐하고 있지만,

그는 이미 잊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애초부터 마음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그의 행동으로부터 진작부터 알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말로부터도 그런 기미를 읽어내지 않을 수 없다.


言教


말씀의 가르침이 온전하려면,


파사(破邪)가 있고,

현정(顯正)이 따라야 함인데,

이는 시도조차 없고,

다만 우정 꾸민 따뜻한 말씀의 가르침만 넘치누노.


삼론(三論)은 없고, 

그저 일론, 

제 삿된 주장만 덩그란히 남겨진 세상.

더럽다.


(출처 : facebook-moonbyun1)


문재인 그의 페이스북 이마에 떡하니 올려진 이미지다.


말씀만 그득하고,

가르침만 넘치는 세상인지라.

내 벽두(劈頭)에 한 소리 질러보는 것이다.


여기,

劈頭란 무엇인가?


앞머리를 도끼로 쪼개 벽두다.


헌즉,

진정 새해를 맞으려면,

저 엉터리 삿된 말 부스러기에 속지 말고,

내가 스스로 도끼가 되어,

파사하고 현정하는,

당체가 되어야 한다.


劈이란,

正对着

be right against라,

그 상대가 먼저 있음으로, 

쪼개고 파함이 가한 법이다.


새해 벽두라 할 때,

묵은해를 상대로 쪼개고 나서야 밝은 새해가 오는 것이다.

항시 그 상대가 먼저 있음을 기억하라.


헌데, 

떡하니, 

저리 대문 이마빡에,

‘나라답게 정의롭게’,

이리 써 붙여놓는다고 새 세상이 오는 것이 아니다.


파사할 상대는 실종되고,

화려하니 미래만 전망되는 언명.

이는 가짜이기 십상인 게다.


새해는, 

새 세상은,

劈은 副廢라,

폐단, 적폐를 쪼갬으로써 열어젖힐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묵은해가 없다면, 새해는 없다.

또한 그 묵은해의 적폐가 청산되지 않는 다면 새해는 오지 않는 것이다.

파사(破邪)가 없다면, 오는 해는 결코 전망되지 않는다.

계명(鷄鳴)없이 새벽은 열리지 않듯,

그럴싸한 수사로써, 인간의 새벽은 오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적폐청산(積弊淸算)하겠다며,

나팔 불어재끼며 말만 요란하더니만,

요샌 그나마 말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따뜻한 촛불 운운하고 있다.

이 감성적 수사화법으로,

과연 썩어 문드러진 감자 한 톨인들 제대로 자를 수 있겠음인가?


헌즉 파사 없이,

저 따발총처럼 난사되는,

‘이 겨울, 더 따뜻하게 세상을 밝히라는 촛불의 마음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류의 말이란,

그대 당신을 속이는 삿된 말에 불과하다.


남에게 기댈 일이 아니다.

그대 당신이 파사현정의 촛불이 될 일이다.


아직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언젠가 그게 횃불이 될 수도 있다.


그대 당신은 아직도 뜨겁다.

정녕, 비인(非人)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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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9. 1. 1. 12: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