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special

소요유 : 2019. 1. 21. 16:38


special

 

군대에 가서 처음으로 듣는 말 하나가 있다.

 

‘중간만 가라.’

 

잘 하면,

매양 선수로 뽑혀, 나가야 되니 고달프고,

못하면,

노상 기합 받고 빳따 맞으며 고단한 신세가 된다.

 

그러니, 튀지 말고, 그저 적당히 요령 피우며, 견디다가,

세월이 지나 제대하는 게 장땡이란 말이 되겠다.

 

게다가, 늘 듣는 이야기가 또 있으니,

 

‘안 되면 되게 하라.’

 

‘까라면 까라.’

 

특히 사병의 경우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수직 구조 속에서,

제일 말단에 처한즉, 위에서 내리는 명령을 받아,

저항하지 않고 복종할 것을 부단히 강요받는다.

 

허니, 개인의 인격보다 조직의 안위가 더 강조되며,

개인의 창의성을 요구하지 않고 절대 수동(受動) 기능 단위로 취급할 뿐이다.

 

교관도 훈련병들에게 스스럼없이 말한다.

 

‘네들은 국가가 제삿날 쓰고자 기르는 돼지에 불과하다.’

 

희생(犧牲)이란,

제물(祭物)을 가리킨다.

犧는 순색으로 흰 것을,

기르고 있는 중일 때는 축(蓄)이라 하지만,

이제 제물로 쓰려 할 때는 牲라 이른다.

 

여기 희생으로 쓰일 소는,

잡색 털을 가지면 아니 되었다.

특히 흰털이 섞여 있으면 실격이다.

 

그리 푸르디푸르러,

쳐다만 보아도 손이 베일 것만 같은,

저 빛나는 영혼을 데려다,

‘제삿날 쓰고자 기르는 돼지’로 취급하다니.

헌데, 그래 좋다.

그리 개별 인격을 뭉그러뜨리고,

궤짝에 든 물건 취급을 하면서,

재물(齋物)로 쓰고자 함인가?

 

본디 희생 제물로 쓸 소, 양 등은,

살아 있는 동안은 화려한 옷 해서 차려 입히고,

온갖 정성을 드려,

아끼고, 살피며, 보살핀다.

 

special 인격을,

모두 잡아다가, 

보통도 되지 못할,

천한 돼지로 다루고서야,

어찌 국방의 안전을,

온전히 기할 수 있으랴?

 

쳐다만 보아도 눈이 부실 정도의 푸른 청춘을,

국가에서 잡아다 이리 절이고, 썩혀도 되는가?

 

군대란 조직의 특수성이 있다.

나라 존망, 시민의 생사에 관련된 간성(干城)이기에,

일응 그러할 만한 사정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개별 인격 단위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심각한 도전이며,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 들어가면 개인의 개성은 저당 잡히게 되고,

평균적 인간 이하로 복무하길 강요받는다.

여기 억압을 넘어 때론 무력 강제가 따르기도 한다.

 

(※ 이상은, 

사병 기준, 개인 경험 기준임. 

요즘은 좀 나아졌길 기대함.

허나, 조직의 기본 속성은 변함이 없으리라 짐작한다.)

 

여기 시골 농장 이웃 중에 한 인간을 지켜보고 있다.

 

이 자가 기독교 신자인데,

나처럼 서울 사람이다.

 

언필칭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삽자루 하나 변변히 잡는걸 본 적이 없다.

그의 농장엔 온갖 오물이 버려져 있고,

유기농 농사 짓는다는 외부 선전과는 다르게,

제초제 사용도 한 치의 거리낌이 없는 위인이다.

 

헌데, 일요일이 되면 열 일 재끼고 서울로 올라간다.

예배당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거기 예배당 목사가 신도들 성추행했다고 하는데,

이 자는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왜 그런가 물으니,

그동안 투자한 것이 많아,

손을 빼기 어렵다는 투였다.

 

예수는 특별한 사람이고,

자신은 범인(凡人)이기에 절대 예수의 본을 따라 행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말은 곧,

일요일마다 예배당 가서, 예배를 드리는 짓은 하겠지만,

현실의 생활에선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예수는 특별한 존재이고,

자신은 범인이기 때문이란 이야기다.

 

이 얼마나 편한 논리인가?

허나, 이 얼마나 비겁한가?

 

諸惡莫作,衆善奉行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한다.’

 

이 말씀은 열반경, 증일아함경 등, 

조금씩 다르지만, 經마다 거의 비슷한 글이 나온다.

게서, 바로 이것이 法本이며, 불교라 가르친다.

 

하지만, 육조(六祖) 혜능(慧能)은,

不思善不思惡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하였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는 전치부정(前置否定, 혹 부정전치(否定前置))의 형식어법이다.

 

성철 스님과 더불어 널리 알려진,

山是山 水是水

‘산은 산, 물은 물’

이 말 역시 전치부정의 한 예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에 대하여,

한 두 마디 덧붙이고 갈길을 가자.

본디 이 말의 크레딧(credit)은 黃檗希運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그 외 적지 않은 스님들이 이와 비슷한 말을 하였다.

그중 특히 青源惟信禪師의 말씀이 압권인데,

이에 대하여는 나중 언젠가 별도의 공간을 두고 다룰 예정이다.

 

上堂。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見山是山。見水是水。及至後來親見知識。有個入處。見山不是山。見水不是水。而今得個休歇處。依前見山祇是山。見水祇是水。大眾。這三般見解。是同是別。有人緇素得出。許汝親見老僧(更參三十年迥無入處在)。

(指月錄)

 

자, 여기에서 중심 세 구절을 빼놓자.

 

見山是山。見水是水。

見山不是山。見水不是水。

見山祇是山。見水祇是水。

 

산은 산, 물은 물.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다시 보니, 산은 오로지 산, 물은 다만 물일 뿐.

 

2귀는 1귀를 부정하며,

다시 3귀는 2귀를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4귀, 5귀 ...는 없을쏜가?

주역 64괘 밖에 4096괘는 없을쏜가?

실제 초씨역림(焦氏易林)은 6爻에 6爻를 중첩시켜, 4096괘를 짓고 있다.

(※ 참고 글 : ☞ 焦氏易林 1/2

                    ☞ 焦氏易林 2/2)

※ 2^6=64, 2^12=4096

하지만, 또 다시 어떤 인물이 나타나,

262,144괘를 짓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으랴?

※ 2^18=262,144

 

다만, 주역은 64괘, 초씨는 4096에 멈추었듯,

青源惟信禪師는 3단 논법 형식을 비는데 그쳤을 뿐이다.

허나, 3단 넘어 4단, 5단 ...을 기약 없이 헤아리는 이도 있을 만하며,

더 나아가지 않고서도,

有人緇素得出이라,

그 이치를 터득한 스님이 어찌 없을쏜가?

 

육조 혜능의 말씀

不思善不思惡

역시 형식논리상 뒤미처 不不思善不不思惡를 예비하고 있다.

不不不 不不不不 不不不不不 ....

(不)n

이 가없는 부정의 부정 ...

부정의 점화식(漸化式)을 통해서만, 진리에 가닿을 수 있다.

인간의 언어란 배를 빌려 타는 한,

이 부정의 양식을 여윌 수 없다.

(※ 참고 글 : ☞ 화두(話頭)의 미학(美學) 구조)

 

언어의 감옥에 갇힌, 인간들,

특히 스님네들은, 하여,

동안거니 하안거니 하며,

이 가없는 부정의 뗏목을 타고,

노 저어가며, 젊음을 태우고,

종내는, 태워 한 땀도 사르지 못할,

낡은 잿빛 장삼까지 저당 잡혀가며,

속절없이 온 신명을 다 바쳐 불을 지핀다.

 

불립문자(不立文字)는 그래서 나온 말이다.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이 모두 이런 사연을 전하는 말이거니와,

이 역시 도리없이 말로 전하고 있은즉,

어찌 궁색한 노릇이 아니랴?

 

사정이 이러함인데도,

착한 짓 해야, 천당에 갈 수 있다.

이런 꾐에 빠질 텐가?

순진도 하구나.

우는 아이도 요즘엔 눈깔사탕 꾐에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함이니,

육조 혜능은,

不思善不思惡

이런 말씀의 채찍으로,

등짝을 후려갈기고 있는 게다.

 

허나,

이것 옳은 말씀이다.

하며, 냉큼 받아 처먹으며,

대사 치렀다고,

휘파람 길게 내뱉으면,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리.

 

요즘엔,

적육단(赤肉團),

벌건 핏덩이도,

눈깔사탕 따위엔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항차 그러함인데,

잿빛 가사 입고,

저 말씀의 올가미에,

스스로 목을 들이밀 터인가? 

 

‘중간만 가라.’

‘안 되면 되게 하라.’

 

이런 말씀은,

모두 그대 코를 꿰고 있는 고삐(韁繩 ∨ 繮繩)일 뿐인 것을.

 

각자는 스스로 능(能 ≒주체,subject)의 존재인 것이다.

이것을 부처는 일찍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갈파했다.

 

과감히 저 소((所 ≒객체,object)의 고삐를 싹뚝 잘라버려야 한다.

사람 각각의 개별 인격은,

모두 special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노태우의 보통사람론은,

그래서 모든 사람을 바보 멍텅구리로 만드는,

삿된 노예의 철학일 뿐이다.

 

사람은,

저마다 모두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special.

 

그렇지 않은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각자는 獨尊의 유일자인데,

어찌 special하지 않겠는가?

 

반면 동중서(董仲舒)처럼 천과 인이 상호 감응한다면, 천을 무시할 수 없다.

아니 무시한다면 불충이요, 역적으로 몰릴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은 하늘과 사람이 모두 음양의 조화로 이뤄졌으므로,

서로 통한다는 것인데, 

이게 한번 재주를 넘으면,

이는 곧 사람은 하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로 변전된다.

그런데, 하늘을 황제로 환치하면, 실인즉, 

황제에게 복종하면 바로 하늘에 복종하는 게 돼버린다. 

황제는 천자(天子)이니 아주 썩 잘 부합되는 정치이론이 되는 것이다.

실제 한무제가 새로 건국한 나라의 통치이념을 위해,

동중서가 천인감응설을 창출하여 재빠르게 부역한 것이다.

 

제 농장은 온갖 패악질로 더럽히고, 

입으로는 친환경 재배 운운하는 한편,

백날 빠지지 않고, 예배당 간다고 하여 천국행이 예비될 것으로 아는가?

행실은 제 손에 물 한 방울 튀기는 것조차 꺼리면서,

우아하게 차려입고, 백날 금사(金絲)로 사경(寫經) 한다고, 

천당행이 보장되는 것으로 아는가?

 

나는 내 스스로가 나의 주인이다.

그런 고로 문득 부처가 된다.

부처를 의욕하지도 않았음에,

나의 행덕(行德)으로 어느 날 부처가 되는 것임이라.

見山祇是山。見水祇是水。

이 말은 바로 이를 노래하고 있음이다.

 

이게 부처가 말씀하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함의가 아닌가?

운문(雲門)의 우불살불(遇佛殺佛),봉조살조(逢祖殺祖)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단하천연(丹霞天然)은 그러하기에 소목불(燒木佛)이라,

목불을 쪼개어 불을 쬐었음이 아닌가?

 

(출처 : takungpao)

 

예수를 팔고,

부처를 소비하며,

우아하게 폼 잡을 생각 말고,

당장 앉은 그 자리에서,

special한 자기 자신이 될 일이다.

 

헌즉,

special한 인간이 되려면,

(아니 인간은 special하여야 하며,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非人이다.)

善惡兩忘이라,

선악을 모두 잊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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