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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면 되게 하라

소요유 : 2019.01.22 12:41


안 되면 되게 하라


내가 앞글에서,

(※ 참고 글 : ☞ special)

잠간 언급하였던 말이다.

혹 잘못 이해할까봐 몇 마디 덧붙인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즉, 형식 논리로 보자면,

저 말은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헌데, 군대에선 왜 저 말을 그리 자주 하며,

저런 말의 홍수에 젖어 살아야 했던가?


내가 최근 공무원과 접촉하였다.

공익 저해 사범(事犯)에 대해 진작 신고한 것이로되,

1년이 다 되어가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하여 재차 접촉하며 처리를 촉구하였다.


담당자를 만났다.

그는 이러저러한 핑계를 늘어놓는다.

그래 물었다.


‘그럼 군청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인가?

하면, 내가 상급 관서인 경기도청에 직접 신고하겠다.’


하자, 그 자가 당장 다급해지며,

바짝 다가선다.

하여 내가 이러저러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며 일 처리 길 안내까지 하였다.

그러자, 내가 한 말을 바로 되뇌며 그리 하겠단다.


다음 차, 그는 남자 직원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 담당자는 여자이다.

그래 또 한 번 시간을 내어,

저들을 훈도도 하고, 지남(指南)이라, 이끌어 가르쳐주었다.


헌데, 그리 하는 것이 제대로 아니 되는 지,

다시 남자 직원을 데리고 또 나타났다.

남자 직원은 공무원 물을 많이 먹은 이렷다.

요리 빼고, 저리 빼며,

경찰에 신고하란다.


자기네들이 책임 담당 관서임에도,

제 일을 저리 떠밀고 있는 것이다.

하여 내가 오금을 박았더니,

뒤로 물러나며, 애꿎은 차를 닦는 시늉을 하며,

다음부터는 자리에 끼지를 못하더라.


홀로 남겨진 여직원은 또 다시,

나의 지남을 듣고 돌아가 의논하겠다 한다.


하루 이틀 지나자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결국 내가 알려준 대로 계획을 짜고 인력을 배치하여,

처리 준비를 하겠단다.


왜 그리 여직원들이 많은지?

담당 직원도 여자, 그 상위 책임 팀장도 여자.

그리고, 관련 협조 부서 팀장도 여자란다.

이들이 모여 이리 결정을 내렸다 하는데,

참으로 의사 결정 경로가 길기도 하구나.

이도 내가 다 지남한 내용이니,

저들을 어찌 믿고 시민들이 베개를 높이 베고 잠을 청할 수 있으랴?


여자를 폄하할 생각 없다.

하지만, 맡아야 할 자리가 있고, 아니 할 자리가 분명 있다.

모쪼록 인사 결정자는 이를 잘 가려 제 자리에 인력을 배치하길 바란다.

내가, 공무원을 여기 시골에 와서, 제법 많이 만난 폭이다.

혼자서 충분 한 일도,

여자 직원은 반드시 남자 직원을 데리고 나타난다.

왜 곱으로 인력을 낭비하여야 하는지?

의문이다.


저 여자 직원 만날 때마다, 핑계요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순진하다?

일 앞에 순진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이는 욕이다.

결국 저 자는,

저 변명의 고깔모자를 쓰고,

일을 할 수 없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는 성곽 속에 들어가고 말은 것이다.

저 핑계의 망토를 두르고,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 범법 행위가 저질러지고 있으며,

그것도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것이라.

나는 이를 해결하고 싶었다.

이를 처리할 수 있는 권한과 집행력을 가진 집단은,

저 행정 단위 관서가 아니랴?

내가 저들을 놔두고,

이리 애면글면 할 까닭이 어디에 있으랴?


하여, 저들을,

나는 말로써 부리며,

결국 범법자를 잡을 덫을 설치하였다.

짐작컨대 향후 3 개월 안에 늦어도 6개월 안에,

처단할 기회를 잡으리라 여겨진다.


자,

그러니까,

부하 직원이 여기에 있다 하자.

그 때, 그 직원이,

저 여자 공무원처럼,

이리 빼고, 저리 빼고 있다면 어찌 할 것인가?


‘안 되면 되게 하라’


이처럼 쉬운 말이 또 어디에 있겠음인가?


이것은 윽박지르는 것을 넘어,

상대의 영혼을 회수하는 장치 개설 화법이라 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너를 믿지 말고,

오로지 내 말을 믿을 것이며,

시키는 대로 하라.


믿음.

믿음조차 외부의 강요로 살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한 영혼들이라니.

이 얼마나 가여운가?


한편, 이런 믿음 강요하는 자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 또한 얼마나 처량한 노릇인가?


(출처 : 水鏡先生)


耶穌天國 不信地獄


나는 예수를 사랑하지만,

여기 耶穌天國 不信地獄 이런 화법엔 의문이 많다.


√주체적 √깨달음이 없는,

무작정적인 믿음, 맹목적 믿음을 나는 회의한다.


믿음 자체가 나쁘다 좋다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이르는 과정에 주체적 깨달음, 주관적 결단이 없다면,

혹, 믿는다한들, 언젠가는 속절없이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무릇, 대신(大信)은 대의(大疑)로부터 얻어진다.

불교에서 화두를 잡을 때 흔히 세 가지를 거론한다.

대신근(大信根), 대의단(大疑團), 대분지(大憤志)


클로드 브리스톨 (Claude M. Bristol)이 지은 ‘신념의 마력’이란 책이 있다.

거기에선 이리 선전하고 있다.


“거울을 보고 자기가 염원하는 바를 매일 반복하여 

자기 자신에게 되뇌이면 그대로 실현된다.”


이것은 자기최면 같은 것으로 내가 보기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가짜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대의단(大疑團)이 빠져 있다.

믿음의 일향적(一向的) 효용만 강조되고 있다.

의심 또는 불신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다.

외려 믿음의 공액(共軛) 즉 켤레이다.

크게 발심하여 우주의 비밀을 알아내고 말겠다는 분심을 일으키되,

부처의 말까지 의심하며 그를 죽이고 말겠다는 자세로 밀고 나가야 한다.


遇佛殺佛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다.


부처의 말을 무조건 믿고서야 어찌 부처가 될 수 있으랴?

철저하게 깨부수고 내가 홀로 증득(證得)하여야 한다.


이 때래서야,

가을 밤하늘에 둥두런히 떠오른 만월(滿月)처럼,

월인천강(月印千江)

일천지강(一千之江)에 법(法, dharma)의 도장, 법인(法印)을 찍을 수 있다.

또한 이리 이른 자를 부처라 부른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만나는 종교 세일즈맨의 외침.


耶穌天國 不信地獄


‘믿음 천국, 불신 지옥’


불교와는 격국(格局)이 사뭇 다르다.


저들은 신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한 이상, 믿음과 불신의 양가(兩價), 양극(兩極) 판단 구조를 여읠 수 없다.

신이 존재하는데 이를 의심하고서야 어찌 신도가 될 수 있으랴?

과시 저들이야말로 신도(信徒), 믿음의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참고로 耶穌天國 不信地獄과 관련되어,

믿음의 장치(裝置)와 정치적 선동(煽動)의 예를 다룬,

나의 다른 글을 여기 소개해둔다.

(※ 참고 글 : ☞ 일규(一揆)

                    ☞ 나는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따지고 보면,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

이런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이.

이 모두는 불행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라거니와,

설혹 불행히도 그런 역사 현장에 있다 한들,

내가 지금 설한 이야기의 숨은 이치를 안다면,

한결 견디기 수월 하리라.

아니, 나아가,

얼핏 안 되는 일로 보이는 일이,

실인즉 되는 일임을 스스로 거증(擧證)하는,

놀라운 역사를 마주하게 될런지도 모른다.


참선삼요(參禪三要)

대신근(大信根), 대의단(大疑團(大疑情)), 대분지(大憤志)


이 셋은 모두 긴요한 것이니,

어찌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별도로 따로 꼽을 수 있다 할 것이리요만,

將三百六十骨節,八萬四千毫竅,通身起個疑團라,

크게 깨달으려면,

먼저, 삼백육십 골 마디, 팔만사천 털구멍 하나에 이르기까지,

온 몸으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먼저라 생각한다.


헌즉,

‘안 되면 되게 하라’라든가,

‘믿음 천국, 불신 지옥’


이것은 마치 가축에게 재갈 물리고, 고삐로 묶는 것과 매한가지 짓거리인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도대체가 재갈, 고삐를 이길 짐승이 있음인가?

이를 거스리면, 아구창이 터지고, 코가 찢어지고 말리니,

도대체 끌려 다니는 것 외에, 어떤 도리를 따로 찾을 수 있겠음인가?

주인이 좌로 가자 끌면, 도리 없이 그리 끌려 갈 수밖에 없고,

우로 잡아당기면, 그리 따라 갈 수밖에 없음이니,

거긴 도대체가 주체적 깨달음이라든가, 주관적 결단이 소실되어 있다.

이러고서야 어찌 믿음의 왕국에 떳떳하니 들어갈 수 있겠음인가?


이런 프라퍼겐더(propaganda)로 그대를 꾀는 이가 있다면,

殺父之仇라 아비를 죽인 원수를 대하듯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때래서야,

예수를, 부처를 만날 최소한의 기초를 만들 수 있다.


이는 지금 고삐에 채인 이를 두고 이름이니,

아니 그러한 이에겐 다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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