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군자부당(君子不黨)

소요유 : 2019. 2. 3. 12:53


김경수 구속, 손석희 폭행 시비 사건이 터지자,

여권내지는 그 주변인들은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연일 분주히 나서고 있다.


저들은 사실과 진실에 기반하기보다는,

상대를 비난하고, 그럴 리 없다는 저들만의 일방적 믿음 아니 주장에 의지하고 있다.

나아가 이로써, 민중을 동원하고, 자신들의 패권에 종속시킨다.


김어준은 진작부터 진영 논리에 빠져,

제 믿음, 아니 의도 목적을 객관적인 양 보이는 효과 장치로 교묘히 포장하여,

우중들에게 강매하듯 세일하고 있다.

이에 염증을 느껴 나는 근래 저이가 하는 방송을 아예 듣지도 않는다.


김용민은 좀 낫다고 보았는데,

어제 손석희에 대해 다룬 방송을 보다,

그 역시 김어준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을 확인하게 되자,

나는 급히 그의 방송으로부터 이탈하였다.


陳司敗問昭公知禮乎?孔子曰:「知禮。」孔子退,揖巫馬期而進之,曰:「吾聞君子不黨,君子亦黨乎?君取於吳為同姓,謂之吳孟子。君而知禮,孰不知禮?」巫馬期以告。子曰:「丘也幸,苟有過,人必知之。」

(孔子 述而)


“진사패가 소공이 예를 아는가 여쭈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예를 압니다.’


공자가 떠나자, 무마기에게 읍하고 들어오게 하고는 물었다.


‘군자는 편당을 짓지 않는다 들었는데,

군자도 편당을 짓습니까?

임금께서 오나라에서 부인을 취하고서는 성(姓) 같으니, 오맹자라 불렀습니다.

(※ 주나라 성인 희(姬)씨로 모두 같았다.)

이런 임금을 두고 예를 안다고 한다면,

누군들 예를 모른다 할 수 있겠습니까?’


무마기가 이를 공자에게 고하자, 공자가 말씀하셨다.


‘나는 운이 좋구나, 비록 잘못이 있다한들, 사람들은 반드시 이를 아는구나.’”


君子不黨


여전히 주(周)나라 후손으로,

같은 성(姓)인 희(姬)씨인데, 

오맹자(吳孟子)로 이름을 바꾼다한들,

피까지 바꿀 수는 없다.


김경수, 손석희 ...

아무리 같은 패거리라 하여, 

세상을 향해 몽둥이 휘두르며 경위(警衛)하려 한들,

그들 주변의 사건 내용은 바꿀 수 없다.


차라리, 사실에 기반하여,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잘못이 드러나면, 이를 반성하고, 앞일을 바르게 도모하는 편이,

자신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丘也幸,苟有過,人必知之。


공자 역시,

천만 다행이라 하며,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이를 알아내고 마는구나.

하며 차탄하지 않았던가?


군자는 패거리를 짓지 않는다.

박근혜 무리들과, 저들 친문 도당들이 무엇이 다른가?

내용 양태만 다르지, 

형식과 질은 매한가지가 아닌가? 


박근혜를 탄핵시킨 원동력은, 딱 두 가지다.

그의 비리와 시민 사회의 자각이 그것이다.


그 탄핵 이후, 대권을 쥔 권력 집단은,

이를 무시하고,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

예타면이 그렇고, 

김경수 비리에 대한 반성 부재와 옹호,

이재명에 대한 집단 몰매(다구리), 

손석희와 같은 친문 인사에 대한 노골적 경위(警衛)내지는 보위(保衛) ...

이는 박근혜 비리와 형식만 다르지, 

그 본질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다.


혹자의 안이한, 그리고 그릇된 판단처럼,

그들은 집권 후, 변질된 것이 아니라,

실인즉 원래부터 그러했다.

다만, 자신의 본 모습을 정치적으로 은폐하여, 

대중을 사회적으로 기만하였을 뿐이다.


무리 짓는 이들이 언제나 그러하듯,

저들의 화법은 상투적(常套的)이다.

‘상대는 악하고, 자신은 선하다.’

이 규격화된 틀 안에 모든 사실을 구겨 넣고,

마음껏 요리하고, 조작하며, 자신들 만의 신화를 창조한다.

우매한 대중은 저들이 세일하는 신화를 소비하고,

제법 착한 사람씩이나 되고, 구원을 약속 받는다.


(utube, ‘기적을 낳은 목사’…사건의 진실과 파장은?)


대중은 비주체적이고, 비자주적이다.

외부로부터, 이를 보증하고, 인도할 기적을 낳는 목사를 원한다.

우중은 주체적이며, 자주적인 위치에 놓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자리를 감내하기엔 치러야 할 부담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판단엔 지적(知的) 수고가 따르고, 

책임엔 두려움을 지불하여야 하는 위험이 수반된다.


하여, 대중은 이를 대신해줄 사람을 구한다.

그 사람 밑에서 자유를 저당 잡히고, 안정과 평화를 얻는다.

무리를 지어,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공유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비판이나 회의 없이, 누군가 손가락질 하는 방향으로,

우르르 달려가는 것처럼 속 편한 것은 없다.

이를 위해, 우중은 다시 저들 권력자들의 보위(保衛) 세력으로 전락한다.

기꺼이.


무리 속에 기어 들어가,

그 무리의 목소리에 자신을 내맡기고,

외부를 향해 전방위적으로 삿대질하고, 

목울대 쥐어짜며 비난하는 일에 종사는 것처럼,

구역질나는 일은 달리 찾을 수 없다.

비열한 짓이다.

남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에게.


기적을 낳은 목사, 정치인, 오피니언 리더 ...

이들은, 저들 우중을 상대로 기생하는 해충과 같다.

인류 사회는 저들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변설(辨說), 사상에 저항하고,

제도를 혁파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아직 마련치 못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이런 힘의 기울기가 상존하는 지각판(地殼板) 구조를 유지하고,

더욱 공고히 하는데, 역량을 집중한다.

아무리 진실이 까발려져도,

우중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미래에도 부절(不絶)하니 공급될 것이 기약되어 있다.

이것은 그저 감옥이라 할 밖에.


사이비 종교 교주가 감옥소에 들어가도,

그가 나올 때까지 수발들고 떠받는 이들은 남아 있다.

저들 측근으로 단맛을 나눠가지던 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그저 연봇돈 바치고, 제 정조(情操)를 유린당했던 신도들도,

발목에 차인 차꼬를 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불교엔 별업(別業)과 공업(共業)과 이란 개념어가 있다.

전자는 개인이 짓는 업, 후자는 더불어 지은 업을 말한다.


여론을 오도하는 오피니언 리더급 인사들이야,

의당 저들이 저지르는 짓에 상응하는 죄를 짓고 있다 하겠다.

하지만, 별업이란 것도 개인이 제 홀로 짓는 업인 양 싶지만,

이 역시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한, 공업과 구별되기 어렵다.

가령, 투표는 별업인 양 싶지만, 결과에 따라, 

그 개인의 결정이, 타자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외톨이로 살지 않는 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동안,

개인은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이에 따른 책임의 주체가 된다.

헌즉 개인의 자각은,

공화국에 사는 시민 모두의 책무 내용의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암호화폐 세계에서도 이런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하나도 다르지 않다.

거기 역시 기적을 낳는 교주가 있고, 

단꿀을 나눠 가지려는 탐욕스런 장로가 있으며, 

설거지 담당 우매한 신도가 역할을 나눠,

퍽이나 능숙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치러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 하였으나,

여러 일에 치여 미처 여가를 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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