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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비지년(知非之年)

소요유 : 2020. 1. 27. 12:18


지비지년(知非之年)


철들자 망령이라 하지만,

기실 사람이 도대체 철이 들기나 하는 것일까?


莊子謂惠子曰:「孔子行年六十而六十化,始時所是,卒而非之,未知今之所謂是之非五十九年非也。」惠子曰:「孔子勤志服知也。」莊子曰:「孔子謝之矣,而其未之嘗言。孔子云:『夫受才乎大本,復靈以生。』鳴而當律,言而當法,利義陳乎前,而好惡是非直服人之口而已矣。使人乃以心服而不敢蘁立,定天下之定。已乎已乎!吾且不得及彼乎!」

(莊子 寓言)


“장자가 혜자에게 말하였다.


‘공자 행년(行年) 60이 되도록 六十化되니,

처음에 옳은 것으로 알았던 것이, 종국엔 그른 것인 줄 알게 되었다.

지금 옳았다 여긴 것이 59년의 그름이 아닌가?’


혜자가 말한다.


‘공자는 뜻을 힘써 공부하여 앎을 얻었을 뿐입니다.’


장자가 말하다.


‘공자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말을 허비하지 않은 것뿐이다.

공자가 말하길, 재주를 대본(大本)으로부터 받고,

영성에 돌아가서 생을 이뤘으니,

울리면 음률에 맞고,

말하면 법에 맞았다.

이익과 의리를 앞에 진술하여,

호오시비(好惡是非)로써 사람을 설복시킨다면,

사람의 입은 막을 수 있을지언정,

그 마음을 복종시킬 수 없다.

천하의 정해진 바로 정하여야 호오시비가 그친다 하였다.

나는 공자에게 미치지 못한다.’”


60을 이순(耳順)이라 하는데,

59세까지는 이역(耳逆)이란 말이 되겠다.


혜자가 공자를 그저 공부하는 이일 뿐, 별반 대단한 이가 아니라 여긴 것일까?

장자는 열심히 공자를 변호해주고 있다.

늘 공자를 까대던 장자인데,

이것은 놀라운 반전이다.

면전의 혜자를 논박하는 것이 장자에겐 더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런가?


헌데, 실은, 공자 나이 50에 장자를 찾아간 적이 있다.


子行年五十有一而不聞道,乃南之沛,見老聃。老聃曰:「子來乎?吾聞子北方之賢者也,子亦得道乎?」孔子曰:「未得也。」老子曰:「子惡乎求之哉?」曰:「吾求之於度數,五年而未得也。」老子曰:「子又惡乎求之哉?」曰:「吾求之於陰陽,十有二年而未得。」

老子曰:「然。使道而可獻,則人莫不獻之於其君;使道而可進,則人莫不進之於其親;使道而可以告人,則人莫不告其兄弟;使道而可以與人,則人莫不與其子孫。然而不可者,無佗也,中無主而不止,外無正而不行。由中出者,不受於外,聖人不出;由外入者,無主於中,聖人不隱。名,公器也,不可多取。仁義,先王之蘧廬也,止可以一宿而不可以久處,覯而多責。古之至人,假道於仁,託宿於義,以遊逍遙之虛,食於苟簡之田,立於不貸之圃。逍遙,無為也;苟簡,易養也;不貸,無出也。古者謂是采真之遊。

以富為是者,不能讓祿;以顯為是者,不能讓名;親權者,不能與人柄。操之則慄,舍之則悲,而一無所鑒,以闚其所不休者,是天之戮民也。怨、恩、取、與、諫、教、生、殺,八者,正之器也,唯循大變無所湮者,為能用之。故曰:正者,正也。其心以為不然者,天門弗開矣。」


孔子見老聃而語仁義。老聃曰:「夫播穅眯目,則天地四方易位矣;蚊虻噆膚,則通昔不寐矣。夫仁義憯然,乃憤吾心,亂莫大焉。吾子使天下無失其朴,吾子亦放風而動,總德而立矣,又奚傑然若負建鼓而求亡子者邪?夫鵠不日浴而白,烏不日黔而黑。黑白之朴,不足以為辯;名譽之觀,不足以為廣。泉涸,魚相與處於陸,相呴以溼,相濡以沫,不若相忘於江湖。」

孔子見老聃歸,三日不談。弟子問曰:「夫子見老聃,亦將何歸哉?」孔子曰:「吾乃今於是乎見龍。龍合而成體,散而成章,乘乎雲氣而養乎陰陽。予口張而不能嗋,予又何規老聃哉!」子貢曰:「然則人固有尸居而龍見,雷聲而淵默,發動如天地者乎?賜亦可得而觀乎?」遂以孔子聲見老聃。

(莊子 天運)


공자가 장자로부터 가르침을 받고는,

돌아와서는 3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자가 노자를 만난 일을 묻자,

공자는 이리 대답하였다.

吾乃今於是乎見龍。龍合而成體,散而成章,乘乎雲氣而養乎陰陽。予口張而不能嗋,予又何規老聃哉!

‘내가 그를 보니 용을 뵙는 양 싶었다.

용은 기가 합하여 몸을 이루고,

흩어지면 육장(六章)을 이루며,

 (※ 章 : 華美的文采)

구름을 타고 음양을 기른다.

나는 입을 열어도 말이 나오지 않는구나.

어찌 내가 노자에게 교훈을 주겠는가?’


그야말로 張口結舌이라,

입을 열어도 혀가 굳어 한 마디도 할 수 없다라고 하고 있으니,

공자가 장자에게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장자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고,

이제야 사람 노릇하게 된 그를 한껏 추켜올림으로써,

정작은 자신을 부각시키려 하였음인가?


헌데, 여기 60 대신 50을 두고 비슷한 말을 한 경우가 또 있다.


余自幼讀《聖教》不知聖教,尊孔子不知孔夫子何自可尊,所謂矮子觀場,隨人說研,和聲而已。是余五十以前真一犬也,因前犬吠形,亦隨而吠之,若問以吠聲之故,正好啞然自笑也已。五十以後,大衰欲死,因得友朋勸誨,翻閱貝經,幸於生死之原窺見斑點,乃復研窮《學》、《庸》要旨,知其宗貫(實x),集爲《道古》一錄。於是遂從治《易》者讀《易》三年,竭晝夜力,復有六十四卦《易因》鋟刻行世。

  嗚呼!余今日知吾夫子矣,不吠聲矣;向作矮子,至老遂爲長人矣。雖余志氣可取,然師友之功安可誣耶!既自謂知聖,故亦欲與釋子輩共之,蓋推向者友朋之心以及釋子,使知其萬古一道,無二無別,真有如我太祖高皇帝所刊示者,已詳載於《三教品刻》中矣。

  夫釋子既不可不知,況楊生定見專心致志以學夫子者耶!幸相與勉之!果有定見,則參前倚衡,皆見夫子;忠信篤敬,行乎蠻貊決矣,而又何患於楚乎?

(李贄(1527年~1602年), 聖教小引)


“나는 어려서부터 성교(聖教, 성인의 가르침)를 읽었지만, 그를 알지 못했고, 

공자를 존경하였지만, 공자에게 어떤 존경할 만한 점이 있는지, 아지 못하였다.

소위, 난장이가 놀이마당에서, 구경하다,

사람들을 따라 추임 소리를 함께 질러대는 격이었다. 


나는 오십 이전에는 진실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하였음이다.

앞의 개가 짖어대면 따라 짖어대었을 뿐이다.

만약 짖는 까닭을 물어오면, 

말문이 막혀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말았을 뿐이다.


오십 이후에 몸이 쇠약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자,

친구들의 권유와 가르침을 받아들여, 불경을 뒤적이며 읽기 시작하였다.

다행이 생사의 근원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대학과 중용의 요지를 다시 궁구하였다.

그 관통하는 종지(宗旨)를 알아내 도고(道古)란 책을 엮어내었다.

그러다 마침내는 주역을 연구한 이를 좇아 삼년 동안 주역을 읽었다.

주야가 다하도록 힘을 써, 

다시 64괘를 밝힌 역인(易因)이란 책을 판각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오호라!

나는 오늘에야 우리 공자를 알게 되었고,

따라 짖는 개 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다.

예전의 난장이가 늙어서야 마침내 어른이 된 것이다.


비록 나의 뜻과 기상이 가히 쓸모가 있었다한들,

스승과 친구들의 공을 어찌 (없다고) 속일 수 있으랴?


기왕에 성인에 대하여 안다고 자부하게 되었으니,

그런 까닭이라도 불교를 배우는 무리들과 더불어 공유하고자 한다.

예전에 친구들이 이끌어준 마음을 불교도들에게 미쳐나가,

그 도가 만고에 하나일 뿐이고,  

둘이 아니고, 별도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하련다.

이는 진실로 우리의 태조고황제께서 간행하여 제시한 뜻과 같은 것이니,

이는 삼교품(三教品) 안에 자세히 실려 있다.


무릇 불교도들조차 모르면 아니 되는 것인데,

항차 양정견처럼 전심으로 공자를 배우는데 뜻을 둔 이에게랴?

부디 우리와 더불어 힘써 공부하길 바란다.

바른 견해가 생긴다면,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공자를 모두 볼 수 있을 것이다.

충신독경(忠信篤敬)이 오랑캐 땅에서도 행해질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초나라 땅에서 (아니 그럴 것을) 걱정하겠음인가?”


是余五十以前真一犬也,因前犬吠形,亦隨而吠之,若問以吠聲之故,正好啞然自笑也已。


“나는 오십 이전에는 진실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하였음이다.

앞의 개가 짖어대면 따라 짖어대었을 뿐이다.

만약 짖는 까닭을 물어오면, 

말문이 막혀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말았을 뿐이다.”


아아, 이지(李贄, 李卓吾, 1527∼1602)는 50이전엔 한 마리 개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동네 고샅길을 걸어보라.

개 한 마리가 짖으면,

담장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데,

온 동네 개들이 모두 따라 짖질 않던가?

이지는, 50이전 자신이,

꼭 그와 같은 개에 불과하였다 울부짖고 있다.


오늘날도 보라.

빠돌이들이 극성을 부리지 않던가?

이젠 진화하여, 대깨문이 미쳐 날뛰듯 창궐(猖獗)하고, 

(대깨문 : 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

급기야, 평생 정의를 외치던 심상정, 그마저,

조국 밑 빨며 헤롱헤롱거리지 않던가?

그래 혓바닥이 상기도 달달하더냐?

이젠 치욕도 잊고,

정당 기탁금을 500만원에서 3500만원으로 올려 장사에 나섰다.

미구에 정당 문이 닫힐 것을 알기라도 하듯.

바짝 고삐를 조이고, 미투리 끈을 조여 매고,

장사질에 나섰다.


평생 지지하고, 응원하던,

나조차 저들을 시궁창에 내다버렸다.

저들에게 오만정이 다 떨어졌다.

이젠, 내가, 의지할 곳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슬프다.

이를 미리 알아보지 못한 내 잘못이다.

나야말로 한 마리 개였다.


진보의 가치를 훼손한,

저들 패악의 무리들,

그리고 이를 따르는 개, 돼지들.

저들에게, 내가 쓰는 이글이 무슨 의미가 있겠음인가?


이탁오가 옥사(獄死)한 게, 1602년이다.

400년 지나, 저마다 스마트폰 손에 들고, 개명(開明)한 세상에 산다고 뻐기지만,

이처럼, 여전히

천하에 개, 돼지들이 가득한데,

이탁오,

그 홀로 대장부(大丈夫)가 되기라도 한 것인가?


스마트폰(smart phone)은,

개천가에 나뒹구는 깨진 사금파리처럼 널려 있지만,

정작 스마트 인간(smart man)은 찾기 어렵다.


先唱者,窮之路也;後動者,達之原也。

何以知其然也?凡人中壽七十歲,然而趨舍指湊,日以月悔也,以至於死。故蘧伯玉年五十,而有四十九年非。何者?先者難為知,而後者易為攻也。先者上高,則後者攀之;先者逾下,則後者蹶之;先者隤陷,則後者以謀;先者敗績,則後者違之。由此觀之,先者則後者之弓矢質的也。猶錞之與刃,刃犯難而錞無患者,何也?以其托於後位也。此俗世庸民之所公見也,而賢知者弗能避也。所謂後者,非謂其底滯而不發,凝結而不流,貴其周於數而合于時也。

(淮南子 原道訓)


“앞에서 남을 이끄는 짓은 궁색한 길이고,

뒤쳐져서 작용하는 것은 달성의 근본이다.

어찌하여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는가 하면,

무릇 사람의 중수(中壽)는 70세에 지나지 않다.

그렇지만, 그 출처진퇴(出處進退)에 있어서는, 날마다 후회만을 하다가,

마침내 끝에 이르러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백옥(蘧伯玉)은 나이 50이 되어서야,

지난 49년간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앞서가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뒤에 가는 이는 잘못을 책하며, 제대로 따져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가는 자가 높이 올라가면, 뒤처진 자는 따라 올라 가고,

먼저 가는 자가 물을 건너면, 뒤처진 자는 그 뒤를 따르고,

먼저 가는 자가 떨어지면, 뒤처진 자는 궁리를 트고,

먼저 가는 자가 실패하면, 뒤처진 자는 그것을 피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살펴볼 때, 

앞서 가는 자는 뒤처진 자에게 있어 화살의 과녁이 되며,

또한 창고달(창끝에 끼우는 뾰족한 쇠)과 창날과 같다.

창날은 위난(危難)을 맞고 있는데,

창고달은 걱정이 없는 것은, 왜 그런 것인가?

창고달은 창날의 뒤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사람 누구나 보는 바이며,

현자(賢者)이나 지자(知者)라고 하여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른바 뒤처진다는 것은, 아래 고여 펴지 못하고,

응결된 채, 흐르지 아니한다는 것이 아니라,

운수에 따르는 것을 귀히 여기고,

때에 맞춰 따르노라.”  


여기 회남자에도 보면,

故蘧伯玉年五十,而有四十九年非。

거백옥이 50에 49까지의 살아온 삶이 잘못된 것이라 하였다.

(※ 장자엔 거백옥을 두고 60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대목이 나온다.)

헌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제 나이 50이 되자,

자신의 앞 선 행위들을 돌이켜 볼 때,

이게 다 선창자(先唱者)인 게라. 

이제 스스로 후동자(後動者)가 되어,

살펴보자니 잘못이 보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가?


철들자 망령든다는 속언이 있지만,

기실 이 정도만 되어도 다행이다.


과연, 50 이후엔,

철이 들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까?


철드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내 망령 들어도 좋으니,

철 한 번이라도 들어나 보라지.


후동자(後動者)가 되려면,

선창자(先唱者)가 있어야 되는 법. 

50 아냐, 100이 되어도,

후동자(後動者)는 여전히 선창자(先唱者)를 구하고 있는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면,

50도 너무 이르다 할 밖에.

아니, 선창자(先唱者) - 후동자(後動者) - 선창자(先唱者) - 후동자(後動者) ....

이 연환쇄(連環鎖, endless chain)의 고리가 끝이 없으리라.


헌즉, 정작은 저 쇠고리를 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언제까지 숨바꼭질을 지속할 터인가?

(※ 참고 글 : ☞ 골디우스의 매듭과 옥련환(玉連環)

                     ☞ 연환쇄(連環鎖))


(출처 : 網上圖片)


斷障證眞

斷相續心


허나, 

一斷則一切斷也라,

斷 그마저 끊어야 한다.

斷惑無漸次也라,

차차, 나아갈 것 없이,

바로 당장 斷해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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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20. 1. 27. 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