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찢어진 빤쓰

소요유 : 2020. 1. 22. 11:35


찢어진 빤쓰

 

내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하나 있다.

 

‘좋은 게 좋다.’

 

세상에 좋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이가 어디에 있으랴?

따라서 좋은 게 좋다는 말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문제 상황에 놓인 양 당사자 사이,

저이에게 좋은 게, 나에겐 나쁠 수도 있을 터.

그럼 이러할 때는 어찌 할 것인가?

양 당사자 사이엔 대립과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며 죽 둘러선 이들에겐, 저것은 남의 일인 바라,

‘좋은 게 좋다.’라는 말의 선전내지는 선동에,

굳이 반대하며 나설 유인이 별로 없음이라,

그냥 실실 웃으며 비껴갈 뿐이다.

내가 돈이 없지, 따지고 보면 쿨한 사람이야 하며.

어깨를 으쓱거리며 현장을 떠난다.

 

헌데, 벌판에 남겨진, 저 문제의 양 당사자 간,

하나는, 뻔한 사실, 진실을 두고서도, 자신을 입증할 기회를 잃고,

불편부당한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

 

허니, ‘좋은 게 좋다.’란 말은 그리 좋은 말이라 할 수 없다.

실인즉 ‘바른 게 좋다.’ 이리 말하는 게 옳으리라.

 

문재인은 어제 이리 말했다 한다.

 

“공직을 선택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공무원들은 우선 자기 자신부터 행복할 권리가 있다”

 

“저는 공직자들이 말하자면 공익이나 어떤 공공, 이런 부분에 꿈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전부 다 바쳐야 한다거나 또 희생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출처 : viewsnnews)

 

 

아, 이 말을 듣자 나는 단박에 저것은 영 엉터리 말이라 생각하였다.

도대체, 사람을 앞에 두고 행복해지라는 말에,

그 누가 있어 초를 치며 부정할 수 있으랴?

 

하지만, 공무원이 어떠한 신분인가?

이 물음 앞에 서서,

정확한 인식과 역할 판단을 할 수 있다면,

곧바로 저 말은 위험한 말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공무원 수장의 직임을 맡은 이가 저런 소리를 태연히 하고 있다면,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왜 그런가?

 

공무원(公務員)이란,

공무(公務)를 담임하는 이란 뜻이다.

여기서 공무란 사무(私務)가 아니라, 공적인 일임이라, 

공무원은 마땅히 공익을 추구하여야 할 것이며,

결코 사익을 두고 다툴 입장이 아니다.

 

헌데, 공무원이 한 일을 두고 공익과 사익이 충돌하면 어찌할 터인가?

물을 것도 없이 사익을 유보하고 공익에 헌신하여야 할 터이다.

이게 공무원의 역할이다.

 

만약 군인이 전쟁터에 나아가,

제 집 식구를 돌보려 자리를 이탈하고 돌아오면 어찌 할 것인가?

소방공무원이 제 몸을 아껴, 불구덩이에 들은 사람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밖으로 도망 나온다면 어찌 될 것인가?

만약 공무원이 제 행복을 위해,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으면,

세상은 어찌 돌아갈 것인가?

 

공무원 헌장

[시행 2016. 1. 1.] [대통령훈령 제352호, 2015. 12. 31., 전부개정]

인사혁신처(복무과), 044-201-8436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우리는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며 국가에 헌신하고 국민에게 봉사한다.

우리는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고 조국의 평화 통일과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한다.

이에 굳은 각오와 다짐으로 다음을 실천한다.

하나. 공익을 우선시하며 투명하고 공정하게 맡은 바 책임을 다한다.

하나. 창의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하나.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 행정을 구현한다.

하나. 청렴을 생활화하고 규범과 건전한 상식에 따라 행동한다.

 

부칙  부      칙 <제352호, 2015. 12. 31.>

 

 이 훈령은 2016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대통령훈령은 공무원 일반을 향해 선포된 행정규칙이다.

이는 곧 공무원을 향해 대통령이 요구하고 있는 선언명령이자 실천명령인 것이다.

여기 어디에 공무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란 말이 있는가?

물론 모든 사람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여기서 잠깐.

   나는 기실 행복에 대한 가치 판단과 관련하여 할 말이 많다.

   엊그제까지 힐링, 웰빙 이 따위 말을 주워섬기지들 않았는가?

   이젠 또 행복이란 말로 도배를 할 셈인가?

   道有本末,事有輕重

   ‘도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가볍고 중함이 있다.’

   본말을 뒤집어 행복, 웰빙만이 중요한 가치인 양,

   선전되는 이 현상에 대하여는 나중에 적당한 기회가 오면,

   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리라.

   (※ 참고 글 : ☞ 웰빙과 힐링)      

하지만, 내가 문재인의 저 말이 순전 엉터리란 판단을 한 것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전부 다 바쳐야 한다거나 또 희생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이 대목이다.

 

훈령을 보면,

“국가에 헌신하고 국민에게 봉사한다.”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고... ”

“공익을 우선시하며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리 되어 있지 않은가?

저 훈령 그저 폼 잡으려고 만들어놓은 것인가?

 

공무원 개인의 행복과 시민의 행복이 충돌할 때는 어찌 해야 하는가?

저 훈령에 따르면 의당 시민을 위해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유보하여야 할 것이다.

허나, 어제 문재인이 말한,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전부 다 바쳐야 한다거나 또 희생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에 비추면, 공무원은 제 행복을 위해 시민의 안녕과 행복을 저버려도 된다.

이는 엄중한 문제다.

 

저 말은 심각하니 하자가 있는 언명이다.

문재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공적 의식이 충분해보이지 않는다.

그는 일정 수준 이상 공부와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물가상승률에 준거하여,

2020년 노인연금, 국민연금 따위는 인상률이 0.4% 남짓으로 제한되었으나,

공무원 월급은 2.8%로 대폭 인상되었다.

이 땅엔 비정규직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며,

노약자등 사회적 소외 계층이 점증하며, 빈부 격차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고시촌엔 공무원이 되겠다고 머리를 싸매고 씨름하는 이들이 차고 넘치는 현실이다.

이는 거꾸로 되짚자면, 공무원 대우가 좋다는 이야기다.

대통령이 공무원을 저리 조국처럼 아껴, 치마폭에 싸고돌면,

소외 계층의 눈에 피가 고이고, 가슴은 더욱 멍든다.

이를 과연 문은 알고나 있는지?

 

게다가, 엊그제, 조국 사태를 두고,

그는 이리 말했다.

 

“조 전 장관이 지금까지 겪었던 어떤 고초, 그것만으로도 저는 크게 마음의 빚을 졌다”

“이제 검경수사권 조정법안까지 다 통과되었으니 이젠 조 전 장관은 좀 놓아주기 바란다.”

 

이것 시민을 앞에 두고 신년사로 부릴 말이 아니다.

조국이 저리 안타까우면,

난로가에 옹기종기 무리끼리 모여,

그 선전으로 익숙한 고구마 까먹으면서,
사적인 담화나 주고받으며,

상처를 햝으며,

서로를 위무한다면 모를까? 

 

시민을 향해,

현재 피의자 신분인 사람을 두고,

저리 닦아세우며 보호해줄 입장이 아니다.

그는 잘못된 인사에 대하여 송구하게 생각하고,

외려, 한참 근신하여도 부족한 형편이다.

 

변호사 출신인즉, 법을 공부하였을 터.

하지만, 법철학을 과연 제대로 공부하였는지 의문스럽다.

게다가 인식론, 윤리학에 대한 소양도 한참 부족해 보인다.

 

그저 가끔씩 감성을 건드리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선한 듯한 말을 부려놓는 재주는 있으나,

과연 저이가 공적 의식을 갖추고, 그 일을 담임할 역량이 있는지?

의심을 가진지 나는 사뭇 오래 되었다.

 

이는 그의 언어가 종교적, 과학적, 철학적이지 않으며,

다만, 자의적일 뿐이란 말이다.

이를 흔히 우리는 시니컬하게 정치적이라 말한다.

곧, 정치학적인 학문적 엄밀한 분석, 판단의 경계를 벗어나,

그저 주변 노변정담적 동네 아저씨의 이바구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단 말이다.

이는 그의 존재 한계를 넘어, 공화국 시민의 불행이 되고 만다.

슬픈 노릇이다.

그가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거나, 세탁소 사장이라면,

그려러니 하고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공화국 대표라면,

이는 심각한 시민의 위험이 되고 만다.

하여 나는 긴장한다.

 

철학사적으로 보면,

소위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은 대립되는 양 싶지만,

왕양명, 이탁오 등에 의해 인욕이 천리에 내재되었다 이해되기도 하였다.

이에 손문에 의해 공리(公理)로 전개되었고, 

근대엔 모택동에 의해 인민주의로 계승되었다.

 

내가 논의를 간단하고 쉽게 이끌어내기 위해 일시 공과 사의 충돌 문제를 들었으나,

기실, 공과 사는 영역적 의미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윤리적으로 선악(善惡), 시비(是非), 정사(正邪)의 지평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사회적 규범이 발라지면, 곧 이는 개인의 안녕과 행복에도 이바지 하게 된다.

그런즉, 공과 사는 대립 개념이 아니라,

선악 등 윤리적 문제의식 차원으로 나아가 이해되어야 한다. 

 

公是正無偏陂

 

공무원은 바르고, 공정함을 위해, 헌신하는 책무를 윤리적으로 부여받고 있다.

단순히 공사 간 욕망 충돌의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를 위한 보편 가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고, 실천하는,

최일선에 선 용맹한 전사이기도 하며,

한편으론 시민을 향해 자신을 불사르며, 

희생하는 보살이 되어야 한다.

 

불교의 육바라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이 육바라밀에 과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말씀이 있는가?

허나, 문재인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전부 다 바쳐야 한다거나 또 희생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리 말하고 있다.

아, 그는 정녕 이리도 인식의 창이 협착되어 있을 수 있는가?

공무원에게 혹 약점 잡힌 것이라도 있는가?

나는 이런 생각까지 들고 만다.

 

그가 진정 시민을 대표한다면,

공무원을 향해 이리 말했어야 한다.

 

“시민을 위해 희생할 자신이 없다면, 공무원에 투신하지 말아야 한다.”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

 

이 깃발을 저들은 한껏 휘두르고 있으나,

이것 뭐 기지촌 가시 철망에 걸린,

찢어진 xxx 빤쓰처럼,

어줍지 않은 희화(戱畵)를 보는 양 싶다.

 

한편으론,

슬프다.

우리의 남루한 정치 현장이. 

 

시대 현실이,

너무 불결하다.

 

(※ 기타 참고 글 : ☞ 연예인은 공인인가?

                             ☞ 연예인은 공인인가?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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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20. 1. 22. 11: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