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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에

소요유 : 2019. 12. 30. 12:40


후미에


후미에(踏(み)絵)는, 일본 에도막부시대,

기독교를 탄압할 목적으로 시행한 방법이다.

가령, 기독교 신자로 의심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성화상을 밟게 지나게 하고,

이에 망설이거나, 밟지 않으면 처형하였다.

이 성화상 또는 그런 방법을 후미에라 이르는 것이다.



기독교 탄압은 훨씬 앞에도 있었지만,

이 야만적인 후미에란 제도가 도입된 것은 1629년이다.

초기엔 크리스천 사냥이 제법 효과를 발휘하였지만,

차츰 내면으로만 기독교를 신앙하면 된다는 생각이 퍼져,

이 후미에를 이용한 크리스천 사냥은 효과가 신통치 않았다.

이 제도는 1856년이 되어야 폐지되었다.


내가 후미에를 떠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사이트에서 미국의 무리한 방위비 청구에 대하여 논쟁이 붙었다.

한편은 미군 주둔을 정당화하고, 한편은 미군 떠나도 괜찮다며,

상호 열을 올리며 논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 한 사람이 나타나,

미군 철병파(撤兵派)를 상대를, 이리 말하였다.


‘너 빨갱이지, 북한으로 가라.’


아, 이 순간 나는 후미에를 떠올렸다.


논리도 없고, 설득도 구하지 않고, 무작정 들이미는, 저 말법.

폭력성과 야만성에 있어 후미에와 무엇이 다른가?


미군 철병파든 주둔파든 그리 간단히 시비를 가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국방을 넘어 정치, 경제적 구속 조건이 혼재되어 있으며,

나아가, 근대이후 사회, 역사적 역학 관계의 복잡함을,

저 사이트에 등장하는 장삼이사의 감정적 대립으론,

쉽사리 결론에 이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허나, 골디우스(Gordius or Gordias)의 매듭처럼,

어느 날, 이 땅에도 알렉산더가 나타나 이 문제를 일도양단으로 처리할 수 있으려나?


다시 돌아와 말을 잇자.


‘너 빨갱이지, 북한으로 가라.’


이런 단세포에 대하여는 그저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다.

실제 현실에서 이를 무시한다한들,

후미에처럼 처단 받을 염려도 없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하지만, 저 친미사대주의자는 집요하여,

거듭 철병론자에게 끈끈하니 덤벼들며,

연신, ‘너 빨갱이지, 북한으로 가라.’ 이리 묻고 있다.


철병론자가 설혹 빨갱이가 아니고, 김정일을 미워한다한들,

‘나는 빨갱이도 아니고, 북한의 김정일을 미워한다.’

이리 말해주어서는 아니 된다.


이는 곧 후미에란 시험대에 스스로를 저당 잡히는 것이 때문이다.

저 야만과 폭력에 굴복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이리 되면, 저자는 의기양양 후미에를 바닥에 깔아놓고,

언제나 지나는 사람의 사상 검증을 하게 될 것이다.

그의 팔에 완장을 채워줄 일이 있는가?


저 어줍지 않은 단세포, 허름한 인격에게,

어찌 그대의 자존을 훼손시킬 수 있으랴?


이재명의 부랄 점 사건의 경우에도,

병원에 가서 조건 없이 바지를 내리 깔 일이 아니었다.

(※ 참고 글 : 부랄 점)

먼저 내기를 제안했어야 한다.

만약 바지를 까내고, 부랄에 점이 없는 것이 확인이 되면,

네들 여인네들도 고쟁이 내리고 밑을 내보일 수 있느냐?

이리 먼저 물었어야 한다. 

물론 제일 좋은 것은,

저 물음에 답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정치란 게, 대중의 확인을 구하지 못하면,

다음 기회를 잃게 되니 차선으로 저리 할 수밖에 없었던 점,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물음은 언제나 답이 따라야 하는가?

절대 아니다.

나를 향한 물음은 내가 제기하여야 참된 것을 보증할 수 있다.

타자가 던지는 물음은 언제나 검증되어야 한다.

또는 나의 주체적 선택으로 답/부답/無視 등이 따를 뿐이다.

(※ 참고 글 : ☞ 물음을 물을 수 없는 물음)


이는 군자에 이른 태도에 불과하다.


기실 제대로 된 군자쯤 되면, 남에게 질문을 받지 않는 존재가 된다.

설혹 질문이 있다한들, 

자신이 자신에게 하며,

답 역시 자신이 자신에게 할 뿐이다.


성인, 도인에 이르면, 질답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임이라.

헌즉 범인이 남에게 질문을 받으면,

과연 성인은 어찌 대할까 이를 연구하여야 한다.

이리 되지 않으면, 모두 칼을 목에 대인 채,

후미에 성화 앞에 서서 망설이는 크리스천이 되고 만다.


아, 그러함이니,

이리 되면, 이 얼마나 면구스러운 존재인가?

스스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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