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사와 도토리
택배사와 도토리
낙화유수(落花流水)도 아니고,
연일 택배기사들의 죽음이 한 떨기 꽃처럼 지고 있다.
한진은 11월 1일부터 택배 심야배송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미배송 물량은 다음날 처리한다. 동시에 화·수요일에 집중되는 물량을 주중 다른 날로 분산해 근무강도가 특정일에 편중되지 않도록 조치하기로 했다. 택배기사의 수입은 기존 대비 감소하지 않는 방향으로 개선하기로 했다. 설날, 추석 등 물량이 급증하는 시기에 맞춰 필요 차량과 인원을 늘리기로 했다.
(출처 : 매경)
이 기사를 잘 읽어보라.
'택배 심야배송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미배송 물량은 다음날 처리한다.'
내겐 이게 거의 협박처럼 읽혀진다.
일상의 택배기사를 늘리겠다는 말은 쏙 빠져 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배송 지연이 불가피하다.
이에 대한 대책은 빠져 있다.
자, 우리는 이러려고 한다.
이젠 네들 이용자들은 견디어내야 할 것이다.
나는 할 일 다 했다.
어쩔꺼야?
이런 문맥 해석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죽어 나가자,
택배사들은 뒷북을 치며,
장마, 홍수에 물 부른 둑을 바짓가랑이 올리고 건넌다는 듯,
갑자기 광대나, 스턴트맨이 된 양 연출을 하고 있다.
어색하구나.
교활하다.
네들은 참으로.
죽음의 강은 이미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는데,
녀석들이 뒤늦게 나타나,
이 위험한 강을 우리가 건너고 있다고,
유세(遊說)라도 벌이려 함인가?
지금 사태가 이리 돌아가고 있는데,
어느 놈이 절대로 우리 잘못 아니다.
앞으로도 이런 시스템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이리 주장할 것인가?
헌즉, 택배사들의 저런 따위의 언설은,
아무런 실질 기대 효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기억하시는가?
나는 어제 내 글에서 이리 말했다.
“‘애국, 공감, 멸사봉공, 협동, 사랑, 자선’ 이런 말들이 공중에 뿌려질 때는,
그런 말을 하는 자를 구시월 독사를 보듯 의심해야 한다.”
저들은 구시월 독사인 게라.
마지막까지 믿음을 유보하여야 한다.
아니, 끝까지 의심을 유지하여야 한다.
본디 맑고 고은 강물을 유지할 책임은 저들에게 있었다.
택배 시장 규모가 연년세세 늘어나고 있음인데,
그 동안 적자를 보지는 않았을 터.
쥐어짜고, 또 짜고 난, 찌꺼기까지 홅아 거머쥐며,
저 강물을 흙탕물로 만들고 있었던 장본인들은 저들 아니었던가?
그 강물 앞에서,
이 땅의 비정규직은,
문득 심청이가 되어,
저 검푸른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져,
한 떨기 꽃이 되고자 하였음이다.
벼 300석은커녕 한 됫박도 팔아주지 않던 저 패악의 택배사들,
이제 검푸르다 못해,
붉게 핏빛으로 변하자,
밤새 주판 튕기며 생각해낸 것이,
심야 배송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넋 부실한 인간들은 나타나,
잘한 일이라며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박수를 쳐댄다.
일부는 둥그렇게 모여, 저들의 처사에 금박(金箔) 찬양의 말을 늘어놓으며,
찬송가를 부르기까지 하고 있음이다.
이게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저들은 결코 시민이 아니라,
아직도 군주 발굽 아래, 항쇄(項鎖), 차꼬 채워져 사는 백성일 뿐이다.
(출처 : 網上圖片)
아니, 이것은 뭐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원숭이 대가리라 할 밖에.
勞神明為一,而不知其同也,謂之朝三。何謂朝三?曰狙公賦芧,曰:「朝三而莫四。」眾狙皆怒。曰:「然則朝四而莫三。」眾狙皆悅。名實未虧,而喜怒為用,亦因是也。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是之謂兩行。
(莊子)
“잔득 머리를 굴리면서 한편에 치우친 이야기를 하면서,
그게 매한가지임을 모르고 있다.
이를 일러 조삼(朝三)이라 한다.
어째서 조삼인가?
어느 원숭이 키우는 이가 도토리를 주면서 말하였다.
‘아침에 셋, 저녁엔 넷씩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 떼거리들이 모두 화를 내었다.
그러자 다시 고쳐 말하였다.
‘그렇다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씩 주겠다.’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명목이나 실질이 하나도 다르지 않는데,
기뻤다, 화를 냈다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런즉 성인은 옳고 그름을 잘 조화시켜,
천균(天鈞)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이를 일러 양행(兩行)이라고 한다.”
(※ 天均
萬物皆種也,以不同形相禪,始卒若環,莫得其倫,是謂天均。
역시 장자엔 이에 대한 풀이가 잘 되어 있다.
만물은 모두 종류가 다르며, 각기 같지 않은 형체로, 서로 맞 돌아가는 것이다.
처음과 끝이 마치 둥근 고리처럼 이어져 구분할 수 없듯이,
그 도리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천균이라 이른다.)
그대가 정녕코, 원숭이가 아니라면,
그럼 그 동안 무엇하고 있었는가 따져 물어야 한다.
저 인당수에 몸을 던져, 꽃다이 숨진 영혼의 빚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리 엄히 추궁하고 매섭게 질타하여도 모자랄 판이다.
헌데, 저 원숭이들은,
손바닥에 벌겋게 되도록 연신 박수 치기에 여념이 없다.
정녕, 댁들은, 아침과 저녁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심야 배송 중단하면,
어디 콩쥐를 돕던,
두꺼비가 대신 나타나, 새는 독의 구멍을 막아 주고,
새떼가 몰려와, 곡식을 까 준다든?
두고 보아라.
어느 정도 여론이 잠잠해지고,
세론이 시들어지면,
당장 택배비 올려야 한다고 쌍나팔을 불어댈 것이다.
하기사, 저들 무리 가운데는,
아직 미처 울지도 않는 어린아이에게,
겸자(鉗子)로 입 어겨 벌리고,
택배비 올려 먹여주어야 한다는 원숭이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 동안, 배송은 느려지고,
택배기사들 월급은 제자리를 맴돌 것이다.
택배사들은, 쾌재를 부르며, 술잔을 높이 들 것이다.
택배기사들 별반 처우 개선 된 것도 없이,
이용자들만 골탕을 먹을 것은 불문가지.
저들은 탱자탱자 놀며 시간을 벌며,
운동장 기울기 조건을 예전보다 더욱 가파르게 만들 것이다.
(출처 : yahoo)
이 기울어진 운동장(unlevel playing field) 위에서,
저들은, 정책 당국자와 함께,
손을 잡고 쎄쎄쎄, 짝짜꿍하며,
허리를 끼고 돌아가며 밤을 패가며 춤을 출 것이다.
운동장 저 아랫배기로 쓸려 내려간,
세상 사람들을 전과 다름없이,
아니 더 혹독하게 조롱할 것이다.
저 원숭이들,
이젠 어찌 할 것인가?
그 장단에 놀아나며,
제 주머니 헐어,
부자 주머니를 채워줄 것이다.
정작 적당의 무리는 저들 택배사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하여, 내 진작부터 말하지 않든가?
어리석음은 죄라고.
탐진치(貪嗔癡) 삼독(三毒) 가운데,
탐진(貪嗔)은 실로 치(癡)으로부터 유출되는 것.
용궁에 들어간 심청은 과연 다시 현실로 복귀할 것인가?
왕비가 되는 설화의 설정은 차라리 슬프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애써 꾸며대며,
슬픔의 강물을 술인 양, 마구 퍼먹으며 울었을 것이다.
작자는 이를 통해 저 슬픔 덩이들을 마냥 아파하였을 뿐인 것을.
저 원숭이가 가득한 세상.
저공(狙公)보다 곱절은 더 영악한 이들을 당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하여, 심판관인 위정자들도 원숭이 편이 아니다.
이미 표 받아 먹고 난 후인즉,
'하나만 더 주면 안 잡아먹지, 어흥'
요리 요살 떨며,
원숭이들을 놀리면 그 뿐인 것을.
저들은 보리개떡보다 곱곱절은 더 무서운 호랑이일 뿐인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