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소리(無聲之聲)
근대 민법의 3대원칙 정도라면 아마도 문과 계열 출신이 아니더라도,
상식인이라면 대개는 알고 있다.
소유권 절대의 원칙, 사적 자치의 원칙(계약 자유의 원칙), 자기 책임의 원칙(과실책임주의)
이 셋이 그것인데, 자본주의가 발전하자,
이에 대한 재해석이라든가, 수정이 요구되었다.
하여, 현대엔 저 3대 원칙에도 일정분 제한이 가해져,
새로운 수정 내용으로 보완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소유권 공공복리의 원칙, 계약 공정의 원칙, 무과실 책임의 원칙
이 셋이 그것인데, 아마도 학생시절에 문과인들은 달달 외우며 공부를 하였으리라.
나는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자영업자들의 생계는 물론,
생존까지 위협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저 민법 내용을 떠올리곤 하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아마도 ‘소유권 절대의 원칙’처럼 그 뼈대가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소유권은 그 소유자가 가진 대세(對世) 배타적 권리로서,
사용, 수익, 처분할 수 있다.
임대인은 이 중 사용, 수익권을 임차인에게 양여하고,
그 댓가로 임차료를 수수한다.
이는 ‘사적 자치의 원칙’에 따라,
양자의 의사 합치로 계약하고,
그 내용과 실현은 법적 보호를 받는다.
헌데, 지금 실정은 어떠한가?
임차인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 영업 제한을 받고 있다.
애초 임대인과 맺었던 계약에 의해,
당해 물권(物權)으로부터 기대되던 사용, 수익권에 중대한 방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등 관련법에,
의율된 합법적 행위이긴 하다.
하지만, 그 조치엔 임차인의 일방적 희생만 강요하고 있을 뿐,
이들의 피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라든가 구제책은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다.
정부는 착한 임대인 운동 운운하며,
임대인들의 자발적인 임차료 인하를 권하고 있다.
단호히 말하거니와, 이거 아주 허무맹랑한 짓거리다.
세상엔 말이다.
놀부는 많아도, 흥부는 적은 법이다.
눈깔사탕이라면 혹 나눠 먹을 수 있을지 몰라도,
수 백, 기 천만 원이 되는 임대료를 자진하여 덜어내고자 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임대료를 자진하여 낮춰주어,
혹간 뉴스를 장식하는 미담의 주인공은,
선한 이의 드문 예일 뿐,
전체를 대변하지는 못한다.
사용, 수익권에 제한을 가한다.
좋다.
공권력이 사회 전체의 안녕을 위해 그런 조치 할 수 있다.
헌데, 말이다.
민법의 수정주의의 핵심인 ‘소유권 공공복리의 원칙’ 정신에 입각한다면,
외려 임차인이 아니라, 임대인의 소유권 제한을 먼저 검토하는 것이,
우선이고,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 아닌가?
어떠한 필요에 의해 사용, 수익권에 제한을 가하기로 한다면,
그 제한에 따른 효과 내용은 일차적으로 소유자가 부담하는 것이,
법 집행의 합목적성에 비추어 마땅한 일이 아니겠음인가 말이다.
경제적 약자인 임차인만을 두고,
그 피해를 일방 수인(受忍)하라고 요구하고 만다면,
이는 공공복리의 원칙에 맞지 않는 부당한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 제한의 피해는 임차인만 부담할 것이 아니라,
소유권자인 임대인도 나눠 짊어지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이다.
자, 이제 근원으로 돌아가 보자.
애초 100의 효과 내용을 기대하고,
이뤄진 계약은 지금에 와서 국가 공권력에 의해,
크게 훼손되고, 무력화되기까지 하였다.
가령 이게 20으로 낮아졌다 하자.
그렇다면, 그 임대 물건의 효용이 미치지 못하게 된 현실 하에서,
그 피해를 왜 임차인만 고스란히 부담하여야 하는가?
의당, 물권(物權) 소유권자에게 먼저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게 아닌가?
100이 아니고, 20밖에 효용 가치가 저하되고 만 현실.
이것 불행하고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 사태 현실을 직면할 대상은,
의당 누구보다도 먼저 물권 소유자여야 하지 않는가?
현대의 민법 정신인 ‘소유권 공공복리의 원칙’이,
마땅한 것이라면, 입법권자와 행정 집행권자는 먼저 이를 고려하였어야 한다.
중대한 사정변경(事情變更)이 생겼은즉,
계약 내용은 변개(變改)되어야 정의에 부합된다.
게다가 국가가 사정변경의 주체인즉,
그 계약 현실 내용을 점검하고,
그 구체적 실체적 효력 결과 조정에도 과감히 개입하여야 한다.
생업 일선에 나선, 임차인의 일방적 희생 강요에 앞서,
(비교적) 경제적 강자에 속한, 임대인들의 물권 제한도,
동시 병발적으로 요구되어야 마땅한 노릇이 아니겠음인가?
가령 영업제한에 따라, 임차인의 사용, 수익에 제한이 가해진 만큼,
임대료 역시 적절히 제한되어야 공정한 일이 될 것이다.
아울러 공권력이 개인의 물권, 임차권의 행사에 제한을 가하고, 일방적 희생을 요구할 양이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전쟁 등의 비상사태 때 작동되는 징발법(徵發法)에서도 징발은 징발영장 발부에 의해서만 일어나며,
그에 따른 보상도 따른다.
작금의 자영업자 영업제한도, 나는 징발법의 법리를 원용할 충분한 상사(相似) 조건이 된다 생각한다.
뜻있는 자영업자는 헌법소원이라도 하여,
일방적 희생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따져 묻고, 적절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고려하여, 법령이 시급히 재정비되어야 한다.
입법권자들은 매양 권력 투쟁에 혈안이 될 일이 아니라,
지금껏 소홀히 하였다는 것을 자인하고,
시급히 깨어 일어나 재난 관련법을 손질할 일이다.
오늘날의 입법, 행정의 담임 관리들은,
검찰총장 윤석열 잡아 족치는 일에 급급할 일이 아니며,
권력 쟁탈에 혈안이 될 정도로 한가한 나라 형편이 아니다.
문재인은 도대체 숨바꼭질 놀음에, 장독대 뒤에라도 숨어버렸는가?
어쩌다 튀어나와 구름 잡는 이야기나, 자화자찬하는 말만 늘어놓았다.
시계 속 뻐꾸기처럼 잠시 나타나 번드르 뱉어내고 사라지고 마니,
실로 그 행적이 늘 묘연할 뿐이다.
항아리 뒷전에 숨어 늘어진 댕기나 수습하며 감추는 일에 재미를 붙일 일이 아니다.
시석(矢石)이 날라 다니는 이 전쟁터에,
앞장서서 대중을 이끌며,
용맹함을 드날리고,
지혜를 다하여,
인민들에게 희망과 믿음을 주어야 하지 않겠음인가?
將不勇,則三軍不銳;將不智,則三軍大疑;
(六韜)
대저, 장수가 용맹하지 못하면, 삼군의 예기가 날카롭게 서지 못하며,
지혜롭지 못하면, 삼군에 의심병이 크게 퍼진다 하였음이다.
민생을 돌보는 일에 일로매진하여도,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지금의 사태는 엄혹하다.
지은 허물 덮기에 급급하고,
권력 쟁탈에 혈안이 될 만큼,
지금의 나라 형편이 한가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헌즉, 착한 임대인 운동 운운하며,
희학질로 뜻있는 인사들의 조소(嘲笑)를 살 일이 아니다.
한국의 현실에서, 자영업자가 25%를 넘고 있다.
그러함인데도, 영업 제한을 걸어, 손발을 묶어버리며,
생계를 돌보지 못하게 하였다.
무릇 법 집행이란,
그 목적 행위만 만족되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그로 인한, 후과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뒤따라야 한다.
헌데, 국가가 자영업자를 북풍한설 한데로 몰아치며, 나 몰라라 한다면,
이따위 국가를 과연 그 누가 있어, 귀하게 여길 수 있으랴?
나는 자영업자는 아니지만,
저들의 눈물과 한을 국가가 외면하고 있는,
작금의 비정한 현실에 울분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水濁則魚困,令苛則民亂,城峭則必崩,岸竦則必阤。故夫治國,譬若張琴,大絃急則小絃絕矣,故曰急轡御者非千里御也。有聲之聲,不過百里,無聲之聲,延及四海;故祿過其功者損,名過其實者削,情行合而民(名)副之,禍福不虛至矣。《詩》云:「何其處也,必有與也;何其久也,必有以也。」此之謂也。
(說苑 政理)
“물이 탁하면, 물고기가 살기 어렵고,
법이 가혹하면, 백성이 난을 일으키며,
성이 높으면, 반드시 무너지고,
언덕이 솟아 있으면, 반드시 허물어진다.
그런즉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금(琴)의 현을 조절하는 것과 같아,
큰 현을 팽팽히 당기면, 작은 현이 끊어지게 된다.
그래, 말고삐와 재갈을 급히 채며 모는 자는,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마부가 아니라 이르는 것이다.
들리는 소리는 고작 백리를 넘지 못하고,
들리지 않는 소리는 사해에 미친다.
공보다 녹봉을 넘치게 받는 자는 손해를 받게 되고,
실제보다 명성이 지나치게 높은 자는 종내 깎이게 된다.
실제와 행위가 부합해야 명성이 따르는 것이니,
화복은 공연히 따르는 것이 아니다.
시(시경)에,
‘어떻게 편안히 계시는가? 반드시 함께 하는 이가 있네.
어떻게 오래 머무는가? 반드시 까닭이 있네.’
이리 이르는 것이다.”
보아라,
엊그제 드디어, 체육 시설 운영하는 이들이,
더는 참아낼 수 없다며,
봇물 터지듯 거리에 쏟아져 나오며,
분노를 토해내지 않던가?
故曰急轡御者非千里御也。有聲之聲,不過百里,無聲之聲,延及四海;
“그래, 말고삐와 재갈을 급히 채며 모는 자는,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마부가 아니라 이르는 것이다.
들리는 소리는 고작 백리를 넘지 못하고,
들리지 않는 소리는 사해에 미친다.”
(utube, 無聲之聲(葉小釵新角色曲) 曲:張衞帆/編曲:唐廸歆)
아아,
들리지 않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하고,
권력놀음에 미쳐 돌아가더니만,
이제야, 저 들리지 않던 소리가,
급기야, 벽을 넘고, 울을 넘어, 거리로 쏟아지고 있음이라,
그 동안, 조금이라도 코로나19가 잦아들면,
동그란 눈 굴리고, 배시시 웃으며, 나타나,
나 잘했지 하며 자화자찬하지 않았던가?
이 땅의 시민들은 도리 없이 품성이 착한 이들이라,
마스크 꼬박꼬박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하며,
묵묵히 방역 준칙을 지키지 않았던가?
그 공이 있다면, 마땅히 시민들에게 있음이라,
관리들이 감히 훔쳐갈 일이 아닌 것이다.
저들, 위정자들은 정녕 누구를 위해 나라 살림을 맡고 있음인가?
오늘 나는 아무런 힘은 없지만,
자영업자들의 손을 꼭잡아주며, 응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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