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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木鷄)

소요유 : 2021. 1. 23. 16:18


목계(木鷄)

紀渻子為周宣王養鬭鷄,十日而問:「鷄可鬭已乎?「曰:「未也,方虛驕而恃氣。」十日又問。曰:「未也,猶應影嚮。」十日又問。「未也,猶疾視而盛氣。」十日又問。曰:「幾矣。鷄雖有鳴者,已无變矣。望之似木鷄矣,其德全矣。異鷄无敢應者,反走耳。」
(列子)

紀渻子為王養鬥雞。十日而問:「雞已乎?」曰:「未也。方虛憍而恃氣。」十日又問。曰:「未也。猶應嚮景。」十日又問。曰:「未也。猶疾視而盛氣。」十日又問。曰:「幾矣。雞雖有鳴者,已無變矣,望之似木雞矣,其德全矣,異雞無敢應者,反走矣。」
(莊子)

(출처 : 網上圖片)

목계는 흔히 장자에 실려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열자에도 거의 대동소이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열자가 앞 선 글이지만,
옛 책은 후인들이 끼어 넣기 한 것이 많아,
그 선후를 제대로 알기엔 보다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어쨌건 여기선 열자를 중심으로 번역해보았다.

“기성자는 주선왕을 위해 싸움닭을 길렀다.
열흘이 지나자 물었다.

‘닭이 싸울 만한가?’

답하여 아뢴다.

‘아직 아닙니다. 교만하여 우쭐거리고 있습니다.’

열흘이 지나 다시 묻자 이리 아뢰었다.

‘아직 아닙니다. 다른 닭의 소리와 그림자에 아직도 반응하고 있습니다.’
(※ 影響 : 대개 작용에 대한 반응, 결과를 뜻하나,
여기서는 應影嚮이란 글귀에 매어 외려 작용으로 보았다.
하니까, 影嚮을 결과로 보아도 되지만, 그 결과를 내는 원인으로 새겨본 것이다.)

열흘이 지나 다시 물었다.

‘아직 아닙니다. 다른 닭을 깔보며 기가 성합니다.’

열흘이 지나 다시 물었다.

‘때가 이른 것 같습니다.
상대 닭이 울어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나무로 깍은 닭처럼 그저 바라만 볼 뿐입니다.
닭의 덕이 온전해졌기에,
다른 닭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달아날 것입니다.’”

이 고사를 매약목계(呆若木鷄)라 하는데,
때로는 태약목계(呆若木鷄) 이르기도 한다.
모두 같은 뜻이다.
여기 매(呆)는 멍청한 것을 뜻한다.
치매(癡呆) 걸렸다 할 때도 이 글자를 쓴다.

이상은 내가 언젠가 암호화폐와 관련된 글을 쓸 때도,
인용하여 두었던 것이기도 하다.

기실 매(呆)는 멍청한 것이 아니고,
싸움닭으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상태를 의미한다.
장자는 매(呆)로서 그런 상태를 그려내고 있다.

동북아시아 전통에선 바보, 못난이가 이름 그대로가 아니라,
그 반대 상태를 그리는 지시어로 곧잘 등장한다.
실제로도 기꺼이 그 말의 세례를 적극 받기를 원하기도 한다.
이는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기휘(忌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실로 고도의 경지에 이르면 그리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바로 목계나 아래 이어 소개하는 호도가 그 전형이라 하겠다.

難得糊塗
“聰明難,糊塗難,由聰明而轉入糊塗更難,放一著,退一步,當下心安,非圖後來福報也。”

“총명하기도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다.
총명한 사람이 어리석게 되기는 더욱 어렵다.
집착을 놔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 마음을 놓아버리면, 편안하다.
후에 복을 받고자 함이 아니다.”

(※ 糊塗 : 흐리멍텅하다.)

이 글은 청나라의 정판교(鄭板橋)의 글이다.
총명하면서도 이를 감추고 은거한 자칭 호도노인(糊塗老人)과의 우연한 만남 중에,
그는 이 글을 지었다.
(※ 참고 글 : ☞ 난득호도(難得糊塗))

여기 호도(糊塗) 역시 멍청한 것을 지칭한다.

왜 싸움닭은 나무로 깍은 닭처럼 되어야 하며,
사람은 호도노인처럼 멍청한 바보 행색이 되는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오늘은 그 중 하나를 들어 잠시 생각해보련다.

오늘 아침 눈을 뜨자 문득 목계에 생각이 미쳤다.
이는 요즘 눈이 아파 외물에 한눈을 팔지 않고 지내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어디 끄달리지 않고 가을물 추수(秋水)처럼 맑아졌기 때문인가?

싸움닭이든, 사람이든 삶이란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인지 모르겠다.
적을 향해 투지를 불태우고, 욕망을 쫓아, 적지를 탐하기도 하며,
때론 겁약하여 꼬리를 사리고 도망가기도 한다.

하지만 겁을 내기만 하며, 물러서길 되풀이 하다가는 공을 하나도 이룰 수 없다.
그렇다하여 무모하게 만용을 부리다가 실력이 미치지 못하게 되면,
크게 낭패를 당하게 되고 만다.

또한 용기를 내어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그렇지만 끝 모르게 욕심을 내다가, 한계에 부딪히면,
크게 봉욕을 당하게 되기 일쑤다.

그러함이니, 겁과 용기의 한계와 절제를,
자신의(我) 조건에 비추어 제대로 파악하고,
현실에(彼) 알맞은 행동을 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게 쉬운 노릇인가?

怯者無功 貪者見亡

마융(79~166)은 동한(東漢) 인물인데,
그는 고대 고기경(古棋經)의 하나인 위기부(圍棋賦)를 지었다.
거기 나오는 말을 이리 함축해놓은 것이 바로 이 말이다.

略觀圍棋兮法如用兵,三尺之局兮為戰鬥場。聚士卒兮兩敵相當,拙者無功兮弱者先亡。自有中和兮請說其方,先據四道兮保角依旁。緣邊遮列兮往往相望,離離馬道兮連連雁行。踔度間置兮裴回中央,違閣奮翼兮左右翱翔。道狹敵眾兮情無遠行,棋多無冊兮如聚群羊。駱驛自保兮先後來迎,攻寬擊虛兮蹌跭內房。利則為時兮便則為強,厭於食兮壞決垣牆。堤潰不塞兮泛濫遠長,橫行陣亂兮敵心駭惶。迫兼棋雞兮頗棄其裝,已下險口兮鑿置清坑。窮其中罫兮如鼠入囊,收死卒兮無使相迎。當食不食兮反受其殃,勝負之策兮於言如發。乍緩乍急兮上且未別,白黑紛亂於約如葛。雜亂交錯兮更相度越,守規不固兮為所唐突。深入貪地兮殺亡士卒,狂攘相救兮先後並沒。上下離遮兮四面隔閉,圍合罕散兮所對哽咽。韓信將兵兮難通易絕,自陷死地兮設見權譎。誘敵先行兮往往一窒,損蹇委食兮三將七卒。馳逐爽問兮轉相周密,商度地道兮期相盤結。蔓延連閣兮如火不滅,扶疏布散兮左右流溢。浸淫不振兮敵人懼栗,迫役踧踖兮惆悵自失。計功相除兮以時早訖,事留變生兮收拾欲疾。熒惑窘乏兮無令詐出,深念遠慮兮勝乃可必。
(圍棋賦 - 馬融 東漢)


“겁을 내는 자는 공을 이룰 수 없고,
탐욕이 많은 자는 망한다.”

실로 이 말은 뭇 사태 현실을 적실하게 그려냈다 하겠다.
만고에 빛나는 명언이라 하겠다.

탐욕과 공포(Greed and Fear).

저 싸움닭은 어찌 변해갔는가?
처음에 분수도 모르고,
교만하여 우쭐거리다가,
여전히 다른 닭의 모습과 소리에 반응하고,
깔보고, 기가 성하였었는데,
드디어 
상대 닭이 울어도 나무로 깍은 닭인 양, 그저 바라만 보게 되었다.

이제 다른 닭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 것이다.

의기양양(意氣揚揚)할 때는,
하루 열두 번 사당패 살판뜀을 뛰다가도,
스무 여덟 차례 계집사람 마음처럼 뒤집혀 곤두질을 치지 않았나?

손자병법의 구변(九變)편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忿速可侮
성을 내면서 그저 달려가 속전속결로 적을 무찌르겠다는 장수라면,
모욕을 당할 것이라는 뜻이다.
소위 五危라 하여 다섯 가지 위험한 장수의 유형 중 하나이다.

의기소침(意氣銷沈)할 때는,
겨울바람에 떠는 문풍지처럼 매양 바르르 떨지나 않았는가?

도대체,
바람은 언제가 되어야,
한계령 푸른 산허리에 기막힌 혼을 풀어내는 바람이 될 수 있을런가?

나뭇잎은 언제가 되어야,
맑고 고은 설악산 단풍이 될 수 있을런가?

싸움닭은 언제가 되어야,
열자에 나오는 목계가 될 수 있을런가?

사람은 언제가 되어야,
저 한계령 바람이 되고, 설악 단풍이 되고, 열자의 목계(木鷄)가 될 수 있을런가?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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