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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無爲之化

AI : 2023. 2. 7. 13:35


인공지능과 無爲之(而)化

지금까지의 전통 프로그램을 통한 접근방식은,
인간의 有爲에 기초하고 있다.
하니까 어떤 해결 과제의 세부 작업 단위를 낱낱이 규정하고,
통제하여 인간이 생각하는 체계 구조를 구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 체계에 한 치라도 벗어나면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저들은 이를 남 탓하듯 bug라 부르며, 탄식하고 만다.

하지만 과연 세상을 인간이 모두 분별하고, 인식할 수 있는가?
가령 사물을 인식한다고 할 때, 사물의 모든 특징을 특정하여,
단위 요소로 하고 그 요소의 결합 관계를 규정하여,
프로그램을 제작한다고 할 때 이게 가능한 일인가?
비교적 단순한 일은 얼추 대응할 수 있겠지만,
복잡도가 높아지면 이를 모두 포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非仁無為也,非禮無行也。
맹자의 이루(離婁)에 나오는 말이다.
‘인이 아니면 하질 않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
그러니 如有一朝之患,則君子不患矣라
하루아침에 닥치는 우환이 있더라도 군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하였다.
有爲의 전형적인 형식을 우리는 맹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아, 非仁,非禮를 하지 않겠다 작정하지만,
프로그래머는 仁, 禮의 세목을 다 헤아리고,
각각에 대하여 행동준칙을 세워 움직여야 군자가 되며,
비로소 不患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가령 OCR(optical character recognition)만 하여도,
기존 전통 방식의 프로그램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었지만,
완벽한 것은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가령 책을 text로 뽑아낸다고 할 때,
종이가 구겨졌거나, 얼룩이 심하게 지면,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만다.

이는 애초에 프로그래머가 하느라고 하였지만,
미처 이런 특이한 사항에 대하여까지 다루지 못하였기에,
문제가 생기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특이 사항까지 다시 고려하여 프로그램을 수정하여야 한다.
하지만, 천변만변하는 세상의 가능성을 모두 프로그램으로 다룬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심히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非仁,非禮한다는 것은 현실 적응형 모델로서는 적합도가 떨어진다.
실로 군자나 성인 수준이 아니라면 쉬이 이룰 수 없는 경지라 하겠다.

프로그램 역시 현실에서의 문제 해결에 실패하자 큰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오늘날 딥러닝 등의 기술로 무장한 인공지능이 이를 해소하였다.

인공지능의 대부로 불리우는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제프리 힌튼 교수의 접근방식은,
한마디로 無爲에 가깝다.
그러니까 낱낱이 규정하고 통제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맡겨두는 방식이다.
無為而萬物化
장자의 사상처럼 만물의 변화는 실로 유위가 아니라 무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물은 인지로 일일이 규정할 수도 없고, 규정한들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인공지능학자들은 용케도 노장철학의 無為를 깨우친 것인가?
아니면 저들이 과연 노장(老莊)을 배웠음일까?

(※ 출처 : manning)

그림에서 보면 각 노드나 파라메타들을 neural networks의
재귀적 학습과정을 통해 스스로 평가, 웨이팅(weighting)한다.
그러니 외부로부터의 작위(作爲)나 유위(有爲)의 간섭이 없다.
물론 지도학습(Supervised Learning) 방법도 있으나,
성과 여부에 관계없이, 이는 인공지능 본령으로 보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도가의 무위철학 그 실천내용의 구현과 별다르지 않다.
전통 프로그램 방식이라면, 인간이 이들 값을 외부에서 정해준다.
마치 非仁,非禮하지 않도록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태들을,
점검하고, 규정하며, 명령하느라 밤잠을 설치며 노심초사하였을 것이다. 

저들은 이를 machine learning 또는 deep learning 등으로 부르는데,
나는 이를 대하자, 이내 장자의 이 대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夫帝王之德,以天地為宗,以道德為主,以無為為常。無為也,則用天下而有餘;有為也,則為天下用而不足。
제왕의 덕은 천지를 종주로 삼고, 도덕을 주인으로 삼으며, 無為를 언제나 따른다.
천하를 쓰는데 無為인즉 남음이 있으며,
천하를 쓰는데 有為인즉 부족함이 있다.
인공지능의 놀라운 성과를 대하자,
아아, 장자가 노래하는 無為歌의 참뜻이 더욱 밝혀져 온다.

故失道而後德,失德而後仁,失仁而後義,失義而後禮。
(老子, 道德經)

“도(道)를 잃은즉, 덕(德)이 나타났고, 
 덕(德)을 잃은즉, 인(仁)이 나타났으며,
 인(仁)을 잃은즉, 의(義)가 나타났고,
 의(義)를 잃은즉, 예(禮)가 나타났다.”

노자 역시 인의예지는 도를 잃을 때 나타난다 갈파하였다.
프로그램의 문제 해결 능력이 애로에 빠지자 - 有為
인공지능 학자들은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기존의 전통 프로그램 방식을 여의지 못하는 한,
실패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국 출신 제프리 힌튼(Geoffrey Everest Hinton)은,
기존의 인공신경망 실패를 안고 미국 그리고 다시 캐나다로 건너간다.
지금 캐나다는 과히 인공지능의 요람이자 성지가 되고 있다.
거기서 제자와 함께 현대 인공지능의 지평을 여는 성과를 낸다.
그 중 대표적인 게 딥러닝이다.
그 핵심 기제는 無爲之治, 無爲之化, 無爲之事, 無爲之益 ...
無爲에 귀착된다.

至人無為,大聖不作

놀라운 인공지능의 최근 성과 앞에 서자,
실로 노장(老莊)의 말씀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사람들이 곧잘 멀리 떨어진 양 오해하고 있었던,
양(洋)의 동과 서는 이리 해후(邂逅)하고 있음이다.

인공지능의 놀라운 성과를 앞에 두자,
내 머릿속에 콩알 볶듯 수많은 말씀과 영감이 불꽃이 되어 터져오른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에 양무제(梁武帝)란 이가 있다.
그는 호불(好佛)하여 수많은 불사(佛事)를 일으켰다.
五里一庵 十里一寺
오리에 암자 하나 십리에 사찰 하나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절을 많이 지었단 이야기다.

어느 하루 양무제가 지공선사(誌公襌師)에게 물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공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금세에 이리 지존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러자 지공선사가 그 내력을 들려주었다.

‘황상은 본래 가난한 초부(樵夫)였습니다.
산 가운데 황폐한 불당이 있었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청소하고, 불공을 드렸습니다.
불상을 수리할 돈도 없었지만, 성심성의를 다하여 공양을 드렸습니다.
실로 이는 自然無為, 清靜質樸한 공양이라 할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말을 보탰다.

‘불보살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는 이리 차탄하였습니다.
善哉!善哉! 貧者布施,甚為稀有,汝於來世,當作上人
선재, 선재!
빈자가 이리 보시를 하다니,
그대는 내세에 황제가 되리라.’

不求回報,無為之心

실로 이는 복을 바라고 지은 것도 아니오,
그저 성심성의를 다하였을 뿐이다.

후에 양무제는 달마대사를 친견한다.
그때에도 양무제는 자신의 불사공덕을 자랑하며,
聖諦第一義가 무엇이냐 묻자, 
달마대사는 廓然無聖이라 쏴주고 만다.
‘텅 비었는데 무슨 성스럽기나?’
도올은 이 장면을 두고, ‘니기미 무슨 공덕씩이나’ 이리 역하였지.
이것 여간 역이 찰떡처럼 찰진 것이 아니다.
(※ 참고 글 : ☞ 不思善不思惡)

大道無形,生育天地;大道無情,運行日月;大道無名,長養萬物。

‘대도는 무형이로되 천지를 기른다.
대도는 정이 없되, 일월을 굴린다.
대도는 이름이 없지만, 만물을 키운다.’

프로그램하며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다고 기염을 토했지만,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더는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제프리 힌튼과 그 제자들은 문득 無為之心을 일으켜,
인간이 개입하지 않고 시스템 자체의 無爲之事에게 맡겨버렸다.
그리고는 엄청난 성과를 일궈낸다.

나도 한 때 프래그램에 몰두하여,
10여만 라인에 이르는 작품을 홀로 완성한 적이 있지만,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내가 당랑거철이라 주제 모르고,
감히 자연의 비밀을 엿보려 하였음을 깨닫고 만다.
부끄러운 노릇이다.
내게 시간이 허여된다면 인공지능에 투신하고 싶다.
아아, 지는 노을이 그저 붉고뇨. 

내가 예전에 썼던 한 구절이 여기에 있다.

무공적(無孔笛), 몰현금(沒絃琴)이라고 하는 것,
즉 구멍 없는 피리, 줄 없는 거문고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김영삼이 때문에 쓸데없이 우마(牛馬)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대도무문(大道無門)에서
대도는 왜 무문이어야 하겠는지요?

신라시대의 금척(金尺),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 역시 사정이 이러했으리라.
즉 금척엔 눈금이 새겨지지 않았을 터이며,
만파식적 역시 구멍이 없는 피리였을 터.
만약 금척에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면,
딱 새겨진 만큼만의 척도(尺度) 구실만 하였을 터,

하지만, 금척이든 만파식적이든 밖에서 구하려 한들,
그게 밖에 있을 턱이 있겠으며,
있다 한들 구할 수 있을런가?
(※ 참고 글 : ☞ 공진(共振), 곡신(谷神), 투기(投機) ①)

또한 혼돈(渾沌) 이야기는 어떠한가?
(※ 참고 글 : ☞  究)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피리를 만들겠다며,
칼과 꼬챙이를 들고 열심히 구멍을 뚫기 분주하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그 짓을 한들,
그래 칠규(七竅), 구규(九竅) 구멍마다,
오욕칠정 질질 흘리며, 온갖 더러움 범벅인 그대 인간들이,
과연 한계령 바람이 될 수 있을런가?

도대체,
바람은 언제가 되어야,
한계령 푸른 산허리에 기막힌 혼을 풀어내는 바람이 될 수 있을런가?

나뭇잎은 언제가 되어야,
맑고 고은 설악산 단풍이 될 수 있을런가?

싸움닭은 언제가 되어야,
열자에 나오는 목계가 될 수 있을런가?

사람은 언제가 되어야,
저 한계령 바람이 되고, 설악 단풍이 되고, 열자의 목계(木鷄)가 될 수 있을런가?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설악산 한계령을 넘다가
입을 벌리고 단풍을 본다.

바람은 어떤 기막힌 영혼을
품었기에
푸른 산허리에 닿아
저렇게 흐드러지게 꿈이
풀리고
줄에 닿으면 소리가 되고
물에서는 은빛 춤이 되는가

나는 도대체 얼마만큼 맑고
고은 영혼을 품어야
그대 가슴을 만나
단풍처럼 피어날까.

언제쯤이나
언제쯤이나 나의 아픔은
그대 마음 줄을 울리는
소리가 되고
저렇게 기막힌 영혼이
될 수 있을까.』

( 任文赫 作 -- 「단풍을 본다」 全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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