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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작용 효과

AI : 2023. 2. 15. 22:23


인공지능과 작용 효과

ChatGPT로 인해 세상이 시끄럽다.
인공지능도 지능이라 이를 수 있는가?
ChatGPT는 기실 어지간한 인간보다 실현 지능이 높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라 하여 과연 지능이 아니라 이를 수 있는가?

물론 이번에 발표된 ChatGPT는 GPT-3.5 series 수준임이라,
토출된 결과에 오류가 적지 않고, 허위 사실도 버젓이 내보내고 있다.
하지만, 사람 중에도 사기꾼도 있고, 바보 멍청이도 있지 않은가?
차후 GPT-4 series GPT-5 series로 발전하고,
최신 data로 업데이트되면 그 능력은 축차 배증될 것이 거의 명확하다.

그렇다면 과연 로봇과 사람 또는 인공지능과 지능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일찍이 1950년대에 영국의 앨런 튜링(Alan Turing)은 소위 튜링 테스트라는 것을 제안하였다.

튜링테스트는 사람들이 붙인 것인고, 사실 튜링은 imitation game이라 명명하였는데,
상대를 가리고 대화를 하여 기계인지 인간인지를 판명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대하여는 많은 도전과 시험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980년대의 존 설(John Searle)에 의해 제기된 중국인 방 문제이며,
1990년엔 튜링테스트 통과 컨테스트인 Loebner Prize가 만들어졌다.
컴퓨터가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수준을 평가하는 것인데,
상대평가이긴 하지만, 현재 이 대회에서 우승한 컴퓨터는 여럿이 나왔다.

여기서 잠깐, 그냥 넘어갈까 하였으나,
본글의 주제와 관련되어, 중국인 방에 대한 소개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방 안에 중국어를 모르는 이를 넣고,
외부에서 심사관이 중국어로 질문을 한다고 하자.
방안의 사람이 중국어를 모른다 할지라도,
사전에 주어진 질문/답변 목록을 기초로,
알맞은 답을 내어 심사관에게 건넬 수 있다.

설혹 문답이 완벽하다고 하여도 안에 있는 이의 중국어 이해 여부를 알 수 없듯이,
기계가 튜링 테스트를 거치더라도, 그게 지능인지, 저장된 답변인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결국 튜링 테스트는 적절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문제 제기인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아니 제기되었는데,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시스템 논변(systems reply)이 있다. 

만약 중국어 방에서 완벽한 중국어 답변이 나온다면,
그 과정이 무엇이 되었든 그 시스템 안에서 보았을 때는,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 되었든 기계가 되었든 (시스템) 체계 안에선,
그저 중국어를 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기실 인간인지, 기계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굳이 가르는 실익도 없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systems reply인 것이다.
system 밖에서 system 전체 사정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포함관계가 더 큰 별도의 외부 system을 상정하지 않는 한,
저 논변은 system 안에서 자족적이다.

튜링테스트에서 촉발된 인간과 기계 또는 인공지능에 대한 여러 논변들의 핵심은,
과연 기계가 인간의 수준을 넘을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이 지점을 singularity(특이점)라고 한다.
singularity는 기실 수학이나 물리학 용어인데,
어떤 특이한 사건이 일어나는 point를 뜻한다.

어쨌건 사람들이 singularity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순수한 지적인 호기심일 수도 있지만,
기실 그 밑에는 기계에 대한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다.
도리없이 인간 중심 세계관의 발로라 생각한다.

불교 인식 논리학에 인과효과(artha-kriyā-kāritva)라는 개념어가 있다.
이는 어떤 효과를 산출하는 능력을 뜻한다.
(Artha-kriyā-kāritva literally means ‘the capacity to produce a useful result’.)

가령 불이라면 물체를 태우는 능력,
그릇은 물건을 담는 능력을 보지(保持)한다.
다르마키르티(Dharmakīrti, 法稱)는 인과 효과를 내는 것을 참된 존재라 보았다.
거꾸로 그런 효과가 없다면 존재라 할 수 없다 하였다.
그러니까, 어떤 인과효과를 내는 여부가,
바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판정 조건이라 규정한 것이다.
(※ 참고 글 : ☞ 작용 효과)

이 말은 거꾸로, 어떤 작용을 하지 못한다면,
그 작용 존재(existence)는 없다고 할 수 있다.

튜링테스트 문제로 되돌아가,
다르마키르티 이론에 따르면,
테스트 대상이 인간이냐, 기계냐 따지는 것은 무용하다.
다만 인과내지는 작용 효과가 인간다우면 인간이란 존재로 보면 된다.
아니 인간이란 이름을 붙여 부르면 그뿐이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불교는 세상에 실재(existence), 실체(reality)는 없다는 무아(無我)론을 편다.

一切有為法,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應作如是觀。

‘일체 유의법은,
꿈과 같고,
환영(maya)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갯불과 같다.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니.’

항구적인 실재는 없다.
모든 존재는 저 물거품처럼 찰나간 명멸하다 스러지고 만다.
게다가 작용효과는 무상(無常)하다.
그러하니 무엇이라 이름하든 무슨 상관이랴?
인간이라 부르든, 기계라 부르든.

作用是性이라, 
이는, 유식철학의 소위 三性說인
遍計所執性, 依他起性, 圓成實性
가운데 앞의 둘을 지칭한다.
불교는 본디 無自性이라, 별도의 성품이 따로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轉識成智인 것이다.

하니까 인간이든 사물이든 가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遍計所執性, 依他起性 때문이다.
편협하게 집착하고, 타자와 엮어 생성소멸하는,
무상한 세상을 두고 사람들은 언제나 항구적인 실재를 구하며,
그로 이뤄진 세상을 구축한다.
하물며 알지도 못하는 신까지 창조하지 않던가?
그리고 거기에 기꺼이 복속한다.

모두 이름뿐인 것을.
그런즉 轉識成智란,
식에 빠지지 말고 두 발 굴러 지혜의 길로 들어설 일이다.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 사찰 대웅전 가운데 모셔진 대웅(大雄)이 될 일이다.

양자역학 역시 매크로한 세계의 법칙을 벗어나,
비극소성, 비인과율, 비결정론을 가르치고 있다.
불교에서는 수천 년부터 이미 무법(無法)을 노래하였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사실, 규정할 수 없는 존재를
법(法, rule)이란 이름하에 가상으로 묶어 한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만다.
이는 마치 대보름 전날 제웅을 만들어 태우는 것과 비슷하다.
실재, 실체도 없는 것을 형상화하고서야,
밤에 설치지 않고 겨우 잠을 청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는 불안한 존재의 징표일 뿐인 것을.
(※ 제웅 
짚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물건.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제웅직성이 든 사람의 옷을 입히고 푼돈도 넣고 이름과 생년을 적어서 길가에 버림으로써 액막이를 하거나, 무당이 앓는 사람을 위하여 산영장을 지내는 데 쓴다.)

기계 두려움에 빠질 일이 아니다.
앞글에서 지적하였듯,
전자계산기만 하여도 시험 볼 때 휴대를 못하게 하였지만,
어느 순간 이게 해제되었다.
(※ 참고 글 : ☞ ChatGPT)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ChatGPT도 지레 겁먹을 일이 아니다.
遍計所執性, 依他起性
여기 빠져있으면 존재는 언제나 불안하다.

제 생각 속에 숨었다한들, 여전히 타자와 자신은 분리되어 있다.
이리 분리되어 있는 한,
양자 사이엔 끊임없는 긴장이 생성되고,
타자를 의식하고,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계 설정 하에선 비등점 높은, 그 예비된 갈등을 결코 벗어날 길이 없다.

유튜브를 보고 있으면,
연신 추천, 구독 버튼을 눌러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 양적 수준만큼 인정을 받고,
나아가 수익 구조에 보탬이 되고자 함이다.
이것은 인정투쟁을 넘어,
아예 타자에게 제 존재 전체를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타자에게 제 존재 증명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라면,
주체는 증발되고 다만, 외적 평가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가 거세된 현장,
나는 유튜버들이 구걸하는 버튼 클릭 요구를 들을 때마다,
수익 구조에 함몰되고 만, 그리고 인정투쟁의 객체로 전락하고 만,
주체들의 표류(漂流)를 목격한다.
하지만, 의도된 이 표류를 통해,
자신의 이해를 도모하고,
연신 자기 셈을 그치지 않고 있다.

此由依他緣力故有,非自然有,是故說名生無自性性
(解深密經)

의타기성은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가 다 아는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을 떠올리면 된다.
자성(自性)은 없고 다만, 존재는 인연의 힘에 얽매어 있는 것이다.

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이게 있으므로, 저게 있고,
이게 생하므로, 저게 생한다.

하니까 존재란 철저하니 관계망 속에 매여 있지,
별도로 주체적인 실체가 없다.
이게 기세간(器世間), 세간(世間) 속에서의 존재 실상이다.
이를 철저하니 깨달은 상태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한다.

인정투쟁이 일어나는 단계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말 그대로 ‘두루 계탁(計度)하여 집착하는 성질’을 뜻한다.

호네트는 인정투쟁을 인간세에서 긍정적으로 이해를 하였지만,
유식학에선 이것은 아주 기초 단계인 변계소집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겠다.

의타기성이란,
결코 타자에게 의지하여, 자신의 인정 욕구를 만족시키자 하는,
합목적적 이해의 태도를 긍정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의 실상이 상호 연기(緣起)로 묶여 있음을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연기로 묶여 있기 때문에 타자를 빌어, 내 존재를 입증하려 하지 않는다.
이리 의욕하는 순간, 타자가 수단으로 전락하고,
자신은 가치 추구의 투쟁적 주체가 되고 만다.

유식에서 말하는 원성실성이란,
이런 타자의 의존성에 기초한,
타자의 수단화를 기획하지 않는 청정한 깨달음의 단계에 이른 상태를 뜻한다.
유투버들이 자나 깨나 구독, 좋아요 숫자에 연연하는 한,
저들은 변계소집성을 결코 여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거죽으로는 언제나 입에 단꿀 바르고,
의타기성을 노래한다.
우리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 도와주며 험한 세상을 헤치고 나아가자고 격동한다.
하지만, 그 이면엔, 타자를 수단화하고 동원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종국엔 이러함으로써, 고수익을 꾀하고자 함일 뿐이다.

각자는 독존이기 때문에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영웅, 대웅인 것이다.
창조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며 살아간다면,
그게 곧 유식(唯識)에서 말하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일 것이다.
각자는 저마다 독각(獨覺), 홀로 깨여 천하를 독보(獨步)하는 것일진대,
어찌 영웅이라 이르지 않을쏜가?  
나밖에 별도로 영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계를 의식하는 한 영웅은 없다.
새끼 새 한 마리가 비를 맞으며 떨고 있다.
위협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으므로 이름을 구하고,
그 거적대기를 들추고 동그랗게 몸을 말아 들어 숨을 뿐인 것을.

아, anxiety 불안한 존재여.

이와 관련된 주제 내용은 또 다른 나의 소론을 참고할 일이다.
☞ 찰나멸(刹那滅)과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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