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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니

소요유 : 2008. 7. 14. 21:34


마구니

흔히 직업에 따른 해당 직업인들의 특성이랄까 특질이 이야기꺼리가 되곤 한다.
예컨대, 어린아이들을 상대하는 직업인들은 어린아이를 종일 상대하기 때문에 틀이 잡혀,
어른들 하고 대화할 때도, 그들을 마치 어린아이 타이르듯 조근조근 무엇을 가르치듯
대하는 습벽이 있다라든가,
어떤 직업인들은 평생 남에게 아쉬운 소리 없이, 늘 하소연 하기 바쁜 이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자칫 거만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란 평을 듣곤 한다.

해당 직업인들이 당연 모두 그러한 것이 아닌즉,
직업을 적시하여 논하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또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단정지을 객관적 자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개인의 경험에 입각한 불만이라든가, 선입관에 불과할 수 있다.

나는 오늘 평소 느껴오던 종교인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말하고자 한다.
종교인이라면 신자들까지 포함하는 너른 개념인즉, 좁혀 성직자로 한정하자.
미리 단도리하거니와, 이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그리고 對象 평균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앞으로 얘기할 내용에서 벗어나는 성직자 역시 적지 않으리라는
그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할 마음은 추호도 없음을 밝혀둔다.

성직자가 과연 직업인가라는 의문은 별도로 하더라도,
현대 사회에는 성직자의 사회적 구성 비중이 상당히 높다.
그들의 과세문제가 가끔 사회문제화 되는 것은
사회적 기대를 따르지 못하는 그들의 일탈행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성 비율이 높은 것은, 사회적 공평성 문제에 대한,
우리의 예민한 관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된다.

그들에겐 사회적 중요 공역의 하나인 세금이 부과되지 않으며,
그 신분은 철저히 보호 받는다.
또한 소속 신자들은 성직자를 대개는 우러러 존경한다.

성직자란 탈속하여 신에 귀의한다든가, 신념에 일신을 던진 사람이기에,
여늬 사람들에 비하여 세속적 욕망이 절제되고, 도덕적 수준이 높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지적한 사회적 우대와 인격적 존대(尊待) 속에 놓여진
그들의 위치는 자칫 자신의 신분과 역할을 망각하게 되면
오히려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게 될 소지가 되곤 한다.

예전엔 성직자들이란 유학자(有學者), 엘리트 단위 그룹을 이루었기에
지적, 도덕적 수준이 사회적 평균을 훨씬 상회하였다.
하지만, 요즘 같이 개명한 세상에선 지적이나, 인격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른
신자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성직자들을 남다르게 존경하는 것은,
그들이 참여하고 있는 종교가 내세우고 있는 신념체계, 가르침을 신봉하는 입장에서,
이를 앞장 서서 이끌고 지도하여 주는 그들을 신뢰하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성직자는 신자들을 바르게 이끌어 종교적 가르침으로 훈도하고,
영혼을 그 종교적 지향처로 안내할 책무를 느껴야 할 이유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즉 수행과 덕행을 평생 함께 닦고 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타인을 인도하고 가르친다는 사람이 실인즉 그 길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엇을 도모하려 인간은 집단을 이루고 조직을 만든다.
당연 처음엔 집단을 이룬 원초적인 목표내지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일단 조직이 만들어지면 이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이 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조직 목적 달성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책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목적이 아니라, 조직 유지 자체에 정열을 기우리고,
나아가 자신의 안전과 이해를 위해 복무하곤 한다.

지었다 하면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사찰과 교회가 지어지고,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신자들의 재물과 신심을
내세의 구원과 안녕이란 명목으로 동원하곤 한다.
이쯤에 이르면 이들은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를 위해 복무하는 마구니로 전락하게 된다.
마구니가 별 다른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이내 마구니가 되고, 악마가 되고 만다.

신자들은 그들의 권위에 복속되어 예(禮)가 넘치는 것임을 알면서도
이를 차마 소홀히 하지 못하고 끌려 다닌다.
그러하니 더욱 성직자들은 교만해지고,
신자들을 오도된 길로 이끈다.

위계 구조상 성직자는 신자들 위에 위치하게 되니 이런 폐단이 작출되기 십상이다.
모름지기 성직자라면 하심(下心)하여 더욱 낮은 곳에 임하야 한다.
특히 현대 사회에선 성직자보다 더 뛰어난 재가신자들이 적지 않음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공부도 철저하지 못한 주제에 로만칼라, 승복을 둘렀다고 우쭐댄다든가,
덕행도 높지 않은 형편에, 함부로 신자들을 하대하다가는 큰 탈이 난다.
목사 중에는 신부도 아니면서 로만칼라 깃을 세우는 사람도 있다.
이게 무엇인가 ?
호가호위(狐假虎威) 그야말로 여우가 호랑이 위세를 빌어 우쭐대는 짓이 아닌가 ?
한마디로 사기 행각과 다를 바 없다.
언제가 얘기한 날 세워 다려 입는 스님네들의 분소의 패션 역시 도적과 다름없는 구질스러운 작태다.
(※ 분소의 참고 글 : ☞ 2008/03/11 - [소요유] - 현실장악 二題)

道도 이루지 못하고,
신도들을 바르게 이끌지도 못하였으면서,
연보돈이나, 시줏돈으로 연명한다면,
그야말로 밥이나 축내는 마구니가 아니랴.

오죽하면 부자뿐 아니라, 목사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바늘 귀에 낙타가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하였음이며,
소위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은 어이하여 때때로 자행되었음인가 ?
법난은 당시 황제의 무도함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실인즉 불교 자체의 타락에도 빌미가 있었음이니,
마땅히 성직자 일반은 신자보다 몇 배의 청정심을 닦아야 하리라.

조계사에선 심심하면 이패 저패 패가 갈려 폭력이 난무하지 않았던가 ?
마땅히 스님이라면 이를 부끄러워해야 하리니,
어느 스님처럼 그를 무용담의 소재로 인용한다든가,
신도들 보고 삼천배를 하여야 친견을 허락한다는 등의 위세를 부리기에 앞서,
폐관하고 삼천일을 참회하는 기도를 행하여야 하리라.

내 집 앞 절 주변엔 쓰레기가 적지 아니 버려져 있다.
의당 사찰 측에서 시간을 내서 처리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
언젠가 스님에게 말하였으나 쓴 웃음만 짓고 마시더라.
며칠 전에도 만난 이웃 스님에게 이를 말씀 드렸더니,
스님에겐 각자의 소임이 있으니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말씀이었다.
저들이야말로 청산(靑山)에 깃들어 살아가는 청산의 주인이 아니더냐 ?
그러한즉 청산을 보살피는 소임이라면 그들외에 밖에서 누구를 달리 구할손가 ?

이 세상 어떤 사람에겐들 분주하니 바쁜 제 소임이 없으랴,
청소하는 게, 사찰 주인 스님 소임이 아니라면, 그럼 그게 신자들 소임인가 ? 아니면 이웃 소임인가 ?
내 어렸을 적에는 누구나 제 집 앞 마당은 물론 저 멀리 동구까지 빗자루로 쓸었다.
소임이 어디 따로 정해졌는가 ?
방하착(放下着)을 말하고,
일장춘몽을 노래하며,
짐짓 조(操)를 빼 조촐한 태도를 보였다한들
그게 자기 사찰 주변 정화 하나 하지 못하고 있는 한,
그게 어찌 일점인들 면목이 서는 노릇이겠는가 ?
공업(共業)을 외면하고, 소임을 빌어 제 별업(別業)에 집착하는 안일함이라니.
마구니가 별 다른 것이 아니다.
제 앞가림만 구하고, 사회적 책무를 외면하면 이내 마구니가 되고 만다.
왜 아니 그런가 ?
그럴 양이면 왜 목사, 신부, 또는 중이 되었는가 ?
차라리 여염집 아낙, 필부가 되어 한바탕 봄꿈이나 실컷 꾸다 사라지고 말지.

내 집 앞 사찰은 마이크를 틀어놓고 염불하기 일쑤다.
대찰도 아니고, 그저 조그마한 절집에 무얼 그리 선전할 것이 많은지
동네를 향해 소음을 쏟아내는가 말이다.
언제 찾아 뵙고 여쭈니, 불자들이 원해서 그리 한다고 하더라.
좋은 말로 타이르고 말았으나,
나는 집에 돌아와 스님 수준이 누항(陋巷)의 장삼이사보다 못한
실정에 충격 받아 연 3일간 가슴이 아팠다.
염불 소리도 어쩌다 들어야 좋지, 이 정도면 가히 공해다.
그러하니, 절이 아니라 영업집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백번 싸다.
요즘은 누군가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는지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다.
지나가다 들으니 스님 두분이 염불을 하는데도 채 30여미터도 떨어지지 않아 잘 들리지도 않는다.
개과천선이라도 하였는가 ?
그리 하여도 영업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불교, 기독교 공부를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이런 성직자들의 작폐는 용서가 아니 된다.

도대체가 진속(眞俗)이 불변(不辨)하니,
내겐 성직자가 마냥 속인보다 더 미욱한 사람들로 보이곤 한다.

성직자란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백천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불퇴전(不退轉)의 용기로,
대의(大義)를 의해 자신을 불사르는 사람이 아닐까 ?
대신(大信), 대의(大疑), 대분(大憤)커라.
그러할 때, 성직자는 우리들한테 믿음의 상대요, 존경의 대상이 된다.
아니라면, 신도들의 신심을 연보돈과 시줏돈으로 환치 갈취하는
그저 불한당 밥버러지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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