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상(象)과 형(形) - 補

소요유 : 2008.07.19 13:35


앞의 글 ☞ 2008/07/11 - [소요유] - 상(象)과 형(形)과 관련되어 보충 글을 덧붙인다.

먼저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어린왕자 (The Little Prince) / Chapter 01 모자와 보아구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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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 -생텍쥐페리

내가 이 책을 한 어른에게 바친 것에 대해
혹시 이 책을 읽게 될지도 모를 어린이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내게는 그럴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사귄 가장 훌륭한 친구가 이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이 어른이 모든 것을,
어린이들을 위해 쓰여진 책들까지도 다 이해할 줄 안다는 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그가 지금 프랑스에 살고 있는데
그는 그곳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말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이 모든 이유들이 충분치 않다면,
나는 이 책을 어른이 되기전 그의 어린시절에 바치고 싶다.
어른들도 처음에는 모두 어린이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어른들은 별로 없다.
그래서 나는 헌사를 다음과 같이 고쳐쓴다.

- 어린시절의 레옹 베르트에게.

The Little Prince - Chapter 01

Once when I was six years old I saw a magnificent picture in a book,
called True Stories from Nature, about the primeval forest.
It was a picture of a boa constrictor in the act of swallowing an animal.
Here is a copy of the drawing.

내가 여섯 살 때에 '자연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원시림에 관한 책속에서
기막힌 그림을 하나 본 일이 있다.
그것은 보아 구렁이가 어떤 짐승을 집어 삼키고 있는 그림이었다.
아래의 그림은 그것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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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book it said:
"Boa constrictors swallow their prey whole, without chewing it.
After that they are not able to move, and they sleep through the six months
that they need for digestion."

그 책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보아 구렁이는 먹이를 씹지도 않고 통째로 삼켜 버린다.
그리고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 그것을 소화하느라 반년 남짓 동안 잠을 잔다.'

I pondered deeply, then, over the adventures of the jungle.
And after some work with a colored pencil
I succeeded in making my first drawing.
My Drawing Number One. It looked something like this:

나는 그래서 밀림 속에서의 모험에 대해 한참 생각해 보고 난 끝에
색연필을 가지고 내 나름대로 내 생애 첫 번째 그림을 그려 보았다.
나의 그림 제 1호였다. 이것은 이런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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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howed my masterpiece to the grown-ups,
and asked them whether the drawing frightened them.
But they answered: "Frighten? Why should any one be frightened by a hat?"

나는 그 걸작품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면서 내 그림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모자가 뭐가 무섭다는 거니?"하고 대답했다.

My drawing was not a picture of a hat.
It was a picture of a boa constrictor digesting an elephant.
But since the grown-ups were not able to understand it,
I made another drawing: I drew the inside of a boa constrictor,
so that the grown-ups could see it clearly.
They always need to have things explained.
My Drawing Number Two looked like this:

내 그림은 모자를 그린게 아니었다.
그것은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 구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 구렁이의 속을 그렸다,
어른들은 언제나 설명을 해주어야만 한다. 나의 그림 제 2호는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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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own-ups' response,
this time, was to advise me to lay aside my drawings of boa constrictors,
whether from the inside or the outside,
and devote myself instead to geography, history, arithmetic, and grammar.
That is why, at the age of six,
I gave up what might have been a magnificent career as a painter.
I had been disheartened by the failure of my Drawing Number One
and my Drawing Number Two.
Grown-ups never understand anything by themselves,
and it is tiresome for children to be always and forever explaining things to them.

어른들은 속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하는 보아 구렁이의 그림들을 집어 치우고
차라리 지리, 역사, 계산 그리고 문법 쪽에 관심을 가져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여섯 살 적에 화가라는 멋진 직업을 포기해 버렸다.
내 그림 제1호와 제2호가 성공을 거두지 못한데 낙심해 버렸던 것이다.
어른들은 언제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자주자주 설명을 해주어야 하니 맥빠지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So then I chose another profession, and learned to pilot airplanes.
I have flown a little over all parts of the world;
and it is true that geography has been very useful to me.
At a glance I can distinguish China from Arizona.
If one gets lost in the night, such knowledge is valuable.

그래서 다른 직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나는 비행기 조종하는 법을 배웠다.
세계의 여기저기 거의 안 가본데 없이 나는 날아 다녔다.
그러니 지리는 정말로 많은 도움을 준 셈이었다.
한번 슬쩍 보고도 중국과 애리조나를 나는 구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밤에 길을 잃었을 때 아주 유용한 일이다.

In the course of this life I have had a great many encounters
with a great many people who have been concerned with matters of consequence.
I have lived a great deal among grown-ups. I have seen them intimately,
close at hand. And that hasn't much improved my opinion of them.

나는 그리하여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점잖은 사람들과 수많은 접촉을 가져 왔다.
어른들 틈에서 많이 살아온 것이다. 나는 가까이서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내 생각이 나아진 건 없었다.

Whenever I met one of them who seemed to me at all clear-sighted,
I tried the experiment of showing him my Drawing Number One,
which I have always kept.
I would try to find out, so, if this was a person of true understanding.
But, whoever it was, he, or she, would always say:

조금 총명해 보이는 사람을 만날 때면 나는 늘 간직해 오고 있었던
예의 나의 그림 제1호를 가지고 그 사람을 시험해 보고는 했다.
그 사람이 정말로 뭘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인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으레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That is a hat."

"모자군"

Then I would never talk to that person about boa constrictors,
or primeval forests, or stars. I would bring myself down to his level.
I would talk to him about bridge, and golf, and politics, and neckties.
And the grown-up would be greatly pleased to have met such a sensible man.

그러면 나는 보아 구렁이도 원시림도 별들도 그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다.
브리지니 골프니 정치니 넥타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어른은 매우 착실한 한 청년을 알게 된 것을 몹시 기뻐했다.

(출처 : http://www.angelfire.com/hi/littleprince/, http://blog.empas.com/choykey/16924043, http://cafe.empas.com/severance81/bbs/b7/read.html?asn=131)

나는 앞의 글에서
“상(象)이란 구체적인 물형의 이면에 숨어 있는 원리를 찾아 이를 추상화한 것”
이라는 말을 했다.

추상(抽象)이란 말에도 상(象)이 들어가 있으니 동어반복이 되고 말았다.
추(推)란 ‘밀추’이니 밀어 낸다는 뜻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멧돌 같은 것으로 갈아낸다든가, 하여 추출 즉 뽑아낸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
여기서는 뽑아낸다라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
상(象)은 ‘코끼리상’이니 추상(抽象)이란 곧 코끼리를 뽑아낸다라는 뜻이 된다.

어린왕자에서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오로지 그림에서 모자만을 본다.
이는 눈 가진 사람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형(形)만을 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그 안에 코끼리가 들어 있음을 안다.
눈에 보이는 현실 안쪽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사물의 이치, 우주의 실상을
동심(童心)은 바로 볼 수 있음인가 ?
흔히 얘기 하듯이 어린 아이는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으니,
그러한가 ?
사실 나는 동심이 비교적 순수하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마냥 지고지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의론은 본론과는 다른 주제이니,
혹 다음 기회가 있다면 다루어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냥 예서 그친다.

어른들끼리 자리하고 앉으면,
‘돈’, '주식', ‘부동산’, ‘옷’, '음식', ‘여자’, ‘남자’, ‘정치’, '골프' ...
이들을 뭉뚱그리면 이내 ‘모자’로 대표되는 그것 외에는 더 이상 나눠 대화할 꺼리가 없다.
이게 마냥 그르다라는 것이 아니다.
그 이내(以內)의 정체(停滯), 이상(以上)의 부재(不在)에 대한 식상(食傷)이랄까 ?
또는, 애지(愛知), 경이로움, 모험, 일탈을 꿈꿀 수는 없는가 ?
하는 동경과 의문이 때로 병발(竝發)하곤 한다.

어느 사이트이건 간에, 구석진 한 모퉁에서나마,
코끼리를 더듬는 모습을 보게 되면 박하사탕 씹듯 기분이 화해지며 반갑다.
그렇다. 군맹무상(群盲撫象)일지언정 이런 이들이 아직 남아 있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내겐 놀라운 기쁨이기도 하다.

욕심에 허갈진 사나운 무리가 가득한 세상 천지에 설혹 군맹이라한들
이런, 목이 길어 슬픈 족속, 눈이 아름다와 못내 슬픈 사슴 같은 이들이
아직도 이 황량(荒凉)한 거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적지 아니 위안이 되는 것이다.

***
***

나는 다른 편에 있어 보지 못했지만,
얼마전에 밭에 '고라니'가 출현했다.
시내로부터 그리 멀지도 않은 곳인데도,
한적한 군부대를 끼고 돌아 도로를 건너온 것이다.
가근방 모두를 둘러보아도 제초제의 공략을 받지 않은 곳이 거의 없으니,
풀이 무성한 이곳으로 원행을 한 것일까 ?
땅콩 싹과 상추 순을 따먹은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 먹을 수 있는 만큼 실컷 먹거라.
그를 보자니 슬그머니 웃음이 일고 만다.

뭣도 모르고 철없이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으니,
나는 아금받은 농부가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아니, 조만간 저들에게 매정한 이웃이 될 날이 성큼 가깝게 다가오고 있지나 않은가 ?
나도 잘 모르는 그 순간까지나마, 내가 고라니와 함께 미소를 지을 수 있음은,
정녕 행복일까 아니면, 고스란히 유예된 슬픔일까 ?
장마철 한 웅큼 파인 웅덩이에 고인 물처럼, 며칠 후 이내 마르고마는 그런 한줌의 유예 말이다.

다음 해 봄에는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지 않아도 되도록,
그들 서식지 가까운 곳에 콩이든, 땅콩 등속을 뿌려 새싹들이 자라도록 할 작정이다.
그 새싹을 먹으면서 고라니가 지난 해 나의 묵은 미소를 기억해낼까 ?
그런데, 이걸 왜 그에게 묻는가 ?
정작은 아마도 내게 물어져야 할는지도 모른다.

고라니라한들 사슴과 그리고 코끼리와 무엇이 다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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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모음

  [1/6] jjjjj IP xx.xx.xx.♡♡♡  작성일 2008년07월26일 01시20분52초  
어린 시절에 <어린 왕자>를 읽고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이 (특히 소녀들 중에) 있을까요? 정말 아름다운 동화였어요.
친구 하나가 불문학을 전공하며 그 책을 원어로 읽었다고 해서
엄청 부러워하던 기억도 있었죠.
언제나처럼, 상과 형이라는 한자를 잘 풀어주셔서 공부 잘 했습니다.
읽으면서는 이해하지만 돌아서면 까먹는게 탈이지만요. 나중에 또
읽고는 해야지요.

한 네다섯살 까지의 동심에는 때가 묻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동심만 해도 사실은 살살 때가 묻기 시작하지요.
제가 어렸을때 엄청 착하단 소리 듣고 자랐는데, 좀 커서는요,
착하단 소리를 들을 기대감에 착함을 위장하고 살기도 했단 것 아닙니까.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사는 거죠...어린 애들 왕따하는 것 노골적이고
무섭잖아요. 하지만 성인들에 비해서는 그래도 순수한 것이지요.

생각난 김에 어린왕자나 다시 한 번 읽어볼까 보네요. 지금도 읽으며
옛날처럼 눈물이 나려나요?
  [2/6] bongta IP 2xx.xxx.xxx.♡♡♡  작성일 2008년07월28일 17시45분55초  
어린 아이는 순수할는지 모르지만, 몽(蒙)하지요.
하기에 격몽(擊蒙)이란 말이 쓰여지곤 합니다.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도 몽한 것을 쳐깨뜨려 보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것을 몽(蒙)이라 할 때,
만약 몽(蒙)하기에 순수(純粹)하다면,
그 순수함은 참으로 수상쩍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그 사람 참 착하고 순수해.”라고 말했지만,
그게 빈정거리면서
“그 사람 참 바보같에.”라고 차마 말하지 못함의 다름 아니라면,
이 또한 부끄러운 노릇이라 하겠습니다.

정녕 순수하면서도 깨어 있을 수 있음이며,
착하면서도 총명할 수 있을까요 ?
이 때라야 과연 ‘맑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수(秋水)
가을 물처럼 차갑고 맑은 그런 경지 말입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두고 어른들이 하나같이 순수하다고 찬양하는 것을 보면,
왠지 모르게 가여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게 스스로 잃어버린 순수함에 대한 자책이기도 하지만,
결코 되돌아가지는 못할 것, 아니 않을 것이면서도,
그런 말 변통만으로 자신을 위로하는데 그치고 말 것이 뻔히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귀하지 않을 세계에 대한,
조상(弔喪)치고는 제법 뻔뻔한 의식(儀式)이라 하겠지요.

어른들은 그런 의미에서 ‘순수’도 잃고, 깨어있지도 못한 참으로 못난 족속들인가 합니다.
게도 구럭도 모두 잃고 만 허깨비같은 가여운 영혼들.

이 대지에 빛살 가득 내려,
못내 찬란한 여름 밤.
이번 기회에,
jjjjj님은 어린왕자를 읽으시고,
저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 조나단을 한번 읽어볼까 싶군요.

참외를 밭에 심었는데,
이게 한번 우르르 열리더니만, 이제는 거의 열린 것이 없군요.
해서 또 심으면 어쩔까 싶었는데,
집식구가 말하길,
그런들 빛이 모자라 제대로 자랄까 ? 하는군요.
아, 그렇군요.
하지가 지나니 해가 점점 짧아지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
식물은 물론 그에 의지하여 사는 뭇 중생들 역시
햇님의 은덕으로 살아가고 있음인 게라,
이 지엄한 깨달음에 문득 놀랍니다.
아, 실낱같이 가녀린 중생들이라니.
해서, 햇빛 그리고 여름의 찬란함을 다시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여기는 장마철이라 요즘 비가 억수로 내렸습니다.
내내, 건강 유의하시고 내외분 다복하시길 바랍니다.

고라니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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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Jd IP xx.xx.xxx.♡♡♡  작성일 2008년07월29일 11시53분25초  
고라니의 먼 자태가 아름답군요,,, 동물들,,왜 그렇게 눈동자가 맑기만 한지,,,소의 눈,,,,멀뚱하고, 천연스러운 눈동자,,,,말의 눈,,,,의젓하기만 하고,,,고양이의 눈,,,심원하고
그러다가,,인간의 눈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비교와 질시, 두려움과 의심과 헛된 기대와 기만과 비겁함이 모두 섟여 있는 인간의 눈,,항상 지치고 초라한 인간의 눈,,,,,,,,,,,,깨어있어서 , 도대체, 무엇을 우리가 이룰수 있단 말인가요.

전 동물의 눈과 자태에서 천국을 느낍니다.
하느님이 만든 원형,,,그 자체가 아닌가요,
  [4/6] bongta IP 2xx.xxx.xxx.♡♡♡  작성일 2008년07월29일 21시07분32초  
저 고라니와 서로 한동안 쳐다보았습니다.
3m도 채 아니 되는 거리에서 마주 선 그와 저 사이에는 무엇이 흐르고 있었을까요 ?
대발(竹簾)처럼 앞을 가린 풀 틈 사이로 저 머루같이 까만 눈동자는,
인간이란 이름의 흉측막측(凶測莫測)한 물건을 보았겠지만,
'지치고 초라한 인간의 눈'에 비친 그는 미쳐 아름다움 이전에 그저 서러움이었습니다.
그게 Jd 님 풀이대로라면,
이내 곧 인간의 서러움이 되겠군요.
그 덩이 서러움 말입니다.

“깨어있어서 , 도대체, 무엇을 우리가 이룰수 있단 말인가요.”

이 말씀을 접하니,
불안(佛眼)이 떠오릅니다.
각자(覺者), 깨달은 이의 눈은 과연 어떠할까 하는 것이지요.

불상을 보면 눈을 감은 듯 실눈을 뜨고 계십니다.
완전히 닫으신 것이 아니니, 이는 곧 자고 있지 않음을 외부에 표상(表象)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눈을 감으신 것은,
실인즉 외물을 차단하고 내관(內觀)하고 계심이 아니실런가 싶기도 합니다.

부처 역시 인간이신 이상,
잠을 자는 상태로, 곧 이게 몽(蒙)이니, 이로서는 이룰 수 없은즉,
깨셔야(醒) 할 터인즉 감을 수는 없을 노릇이랴,
한즉 의표(儀表)가 실눈이라지만,
어쨌든 눈을 감지 않은 것으로 표출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젠 또한 온전히 뜨지 못하는 사연은 무엇이겠습니까 ?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
Jd 님 말씀대로, 인간의 눈은 미덥지 못한 것,
하니 염치없이 활짝 뜬 인간의 눈으로
무엇을 볼 것이며, 또한 무엇을 깨우칠 수 있을런가요 ?

그러하니,
불안(佛眼), 즉 깨우친 눈은
닫지도 않고, 열리지도 않은
실눈이 되지 않을 수 없음이랴.

혹, 부처라면 모를까 ?
이러할새,
무릇 인간은 눈 껌뻑거리다 볼일 다 보는,
파리 앞에 두고, 겨냥 서툰 두꺼비처럼
영 불안(不安)한 족속이라 할 것입니다.

동물은 눈을 감지도, 실눈을 뜨지도 않고,
저리 순연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쯤되면 불안(佛眼)이라한들,
동물들의 눈에 한 수 접히고 들어가야 할런가요 ?

얼마전 스님 한 분하고 토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깨어있어서 , 도대체, 무엇을 우리가 이룰수 있단 말인가요.”
이 말씀,

깨우치기 위하여, 청춘을 반납하고 산에 들어온
저들은 도대체 이룬 것이 있기나 있을까요 ?
각자(覺者)는 아니지만,
그의 제자들인 저들에게 한번 물어보시지요.

저들하고 접하지 않을 때는 잘 몰랐는데,
산동네 들어와,
하나, 둘 직접 접하고 보니, 물어본들 시원한 답을 내릴 분을 구하기는
그리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차라리,
어느 날 뜻하지 않게 풀밭에서 만난 고라니가
아직껏 마음 속에 긴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5/6] Jd IP xx.xx.xxx.♡♡♡  작성일 2008년07월30일 02시27분26초  
bongta님, 저는 요즈음 우리집 고양이 까밀에게 놀라운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치 신께서, 고양이의 얼굴을 하고 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만드실려고 찾아 오지 않았나,,,할 정도로

이놈 하는짓, 온갖 자태,,,귀엽고 예쁘지 않은 데가 한터럭도 없으니 이게 왼일 입니까,,,,,우리 인간도 의식을 획득하기 이전,,무명의 시절에는,,,고양이와 같이 아름답고 새록새록한 존재였을 것 입니다. 그 무명, 전의식의 시절,,,,,그 모습은 우리의 깊은 곳에,우리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모습으로 아직 남아있을 도 모를 일 입니다. 이미 우리의 의식을 떠난 초의식의 세계에서,,,

의식의 대가, 자연의로부터의 분리의 대가는 심대합니다.

풀밭속의 고라니,,,,,얼마나 청초하고 또 아름답습니까 그리고 늠늠하기도 하고,,,, 아니면 이 아름다움이 우리들의 추함의 상대적 반영입니까,,,,

이 적막스런 천지는 아름다움으로 꽉 차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혹시 우리의 눈이 잠시 멀어 버린것은 아닐런지요,,,,,

  [6/6] bongta IP 2xx.xxx.xxx.♡♡♡  작성일 2008년07월30일 19시13분46초  
저들처럼 아름다운 것이 또 있겠습니까 ?
저는 여윈지 이미 4년, 3년이 내리 지나고 있지만,
기르던 강아지 이름들을 아직도 허공중에 대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 물안개처럼 자욱한 그리움들,
제게 사랑을 깨우쳐주고 사라진 저들이 마냥 그립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친구들을 보자니,
미쳐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전에 이내 서러움을 길어올리고 마는
이즈음의 저는, 저들의 고통, 삶의 질곡이 마냥 안타깝습니다.

제 주변에 학대 받는 강아지들은
장마철 뚝방변에 밟히는 사금파리 조각처럼 흔하디 흔합니다.
며칠전에도 진창에 방치된 시베리안 허스키,
개 집터를 돌봐주느라 땀 좀 흘렸습니다.
이 녀석이 괴로운지 새벽녘 하염없이 신음 소리 내며, 울어대더군요.
도대체 돌보지도 못할 것이면서, 사람들이 동물들은 왜 키우는지,
참으로 흉악하기 짝이 없는 처사라 하겠습니다.

풀밭에 들어 있는 고라니는 한없이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면 이내 세상은 두려움과 배고품이 엄습합니다.

왜 이리도 중생의 삶은 고단해야만 하는지 ?
어찌 할 바 없는 이승의 질곡,
아, 중생의 삶은
왜 이다지도 질겨 괴롭고,
벗어날 수 없어 슬픈가 말입니까 ?

애완견이란 이름하에 인간의 품속에 놓인 아이들은
한껏 사랑을 뿜어내고 귀여움을 독차지 합니다.
하지만, 자연에 내던져진 저들은 삶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기에,
부단히 괴롭습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 본디 뜻이 불인이든 無私無心이든간에,
개별 중생들은 고해(苦海)에 들어 있음이니,
저희가 느끼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실인즉 환각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빠지곤 합니다.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잠깐 유예된 순간에 찾아드는 밤손님 같은 것,
밤손님은 미쳐 새벽이 오기도 전에,
부지간(不知間) 잠든 새 무엇인가 귀한 것을 앗아, 기어히 사라져버립니다.

밤비 소리가 아름답지만,
막상 바깥에 나가 비를 맞으면 춥고 배고픕니다.
따스한 벽난로 쬐이며 창밖으로 소록소록 쌓이는 눈을
보는 것이 낭만적이긴 합니다만,
막상 나가서 직접 몸으로 맞이하자면,
이 역시 춥고, 젖은 몸이 축축하니 편치 않습니다.

‘안전’이 절제(切除)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자연에서 과연 오래 지속되겠는가 ?
아름다움이란 결국 실낙원에 대한 그리움의 아지랑이 같은 것,
이게 봄꿈처럼 잠깐 실 풀어 올랐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동물들의 실상을 알게 되고 나서는 이 의문을 늘 가까이 안고 삽니다.
자연계의 동물은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에 놓였거니 하고,
짐짓 태연한 척 지나친다고한들,
인간의 마수에 걸린 동물들은 너무 비참하여
차마 거저 스쳐 지나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억류된 병든 소들.
‘공장식축산’에 희생되는 동물들.
이 따위 어처구니 없는 인간의 만행을 보자면,
끝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치고 맙니다.
그래서 동물들을 보면 아름다움에 앞서 못내 서러움과 슬픔이 일고 마는 것입니다.

저 촛불집회라는 것도,
한낱 인간의 자위를 위한 얄팍한 부르짖음에 그치고 만다면,
참으로 아쉽고 부끄러운 노릇입니다.
명색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떠버리는 저들 인간들의
위선이 가증스럽다 못해 심히 ‘역겹기’까지 합니다.

“아니 먹겠다.” 고 외칠 것이 아니라,

“그리 쇠고기를 만들지 마라,”
“그리 동물을 착취하지 마라”라고 근원을 향해 외치고,
구체적인 실천행으로 나아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런 자각행이 없는 한,
이명박이나, 촛불집회에 나선 사람이나,
그리 먼 거리에 나뉘어 떨어진 사이가 아니다.
이리 저는 외치고 싶은 것입니다.

풀에 벤 제 손가락에 듣는 핏방울 하나 보고도 호들짝 놀라 아파하는 이들이,
저리 혹독하게 유린하는 현장을 두 눈으로 보고도,
그것을 뜯어 먹고 입맛을 쩍쩍 다실 수 있음인가 ?
참으로 인간의 악행은 하늘 위 만장(萬丈)까지 뻗쳤다 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그래서 서러움이 괸 눈에 비추이는 신기루 같은 것.
우리 강아지에게 느끼는 그리움의 운무(雲霧)도
이제와선 또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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