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소통(疏通)과 변비(便秘)

소요유 : 2008.02.12 12:32


※ 본글은 아래 링크와 관련된 글입니다만,
그곳에 쓰기에는 이미 인연이 쇠한 것인즉 여기 자리를 내어
남은 소회를 굴뚝을 벗어나 하늘가로 날아가는 저녁 연기처럼
이리 풀어내어 봅니다.

***

소통이라는 말을 저는 그리 신뢰하지 않습니다.
아니, 조금 빗겨난 자리에서 서서 한가닥 이해를 구한다면, 
소통이라는 말을 빌어 지향하고자 하는 바,
그 결과를 기대하지 않겠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리 작정하게 된 사연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이게 개인적 소종래를 번거로이 쫓아가며 들어낼 필요도 없이,
남이 벌여논 현장을 지나치며, 엿볼 때도 그리 제 짐작을 배반하지 않더군요.

얼마전 이 자리에서, 다소 시건방지게 들으셨을지도 모를 저의 독백,
즉 저는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요유(逍遙遊)하고자 하였을 뿐이라는 말씀은 일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염치 없이 이 자리에 다시 선 이유는,
그런 이유들을 뜬금없이 풀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실은 여기 주막에 걸린 ‘소통(疏通)’이란 글을 우연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안성맞춤으로 손에 잡혀, 그래 다시 돌아왔습니다.

☞ 소통(疏通) 바로가기

취하셔서 빡빡 우기던 "뚫어뻥"이든 최신 ‘소통기’ 든
무엇을 동원해도 막힌 변기가 뚫리지 않았다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였더니, 결국은 꽉찬 정화조를 치웠더니 뻥 뚫렸다라는 이야기시더군요.
마침 제가 풀어놀 이야기와 비슷하여 잠깐 웃었습니다.

한창 파르스름할 때, 침술을 배웠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침술도 침술이지만,
침술 사부님이 이모저모 찔러주시던 세상 살림살이 말씀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그 중 한 말씀에 이르시기를 변비를 통하게 하려고,
이즈음 사람들은 무작정 하제(下劑)를 사용할 뿐이다라고 나무라셨습니다.

하제란 무엇이냐 하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아래를 뚫는 약제를 말합니다.
밑이 막혔으니, 이를 해결하려고 사제(瀉劑), 즉 설사질 하는 것을
백방의 기둥 방책으로 삼게 되는 것이지요.

차전자피를 주성분으로 한 아락실이라는 변비약이 있습니다.
이게 뱃속에 들어가면 잔뜩 불어 올라 장압을 올리기 때문에
그 힘으로 변을 밀어내자는 것이지요.
둘코락스라는 약도 대장을 자극하고, 변에 수분을 충분히 공급하여
효과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모두 하제(下劑) 일색입니다.
혹여 이리 주어 섬기니, 제가 변비환자가 아닌가 오해하고 계실 분이 있을까 싶군요.
저는 한번 대사 치루면 먹은 것의 110% 주저없이 싸내놓습니다.
욕심이 없는 소치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저의 어림짐작으로는 여성분들은 80%~90% 이상이 모두 변비환자입니다.
그들은 하룻 저녁 잠자리에 들면 빌딩을 밤사이 대여섯 채 이상 지웠다 허뭅니다.
앙가슴 사이에 복작이는 심사가 내(川)를 이룹니다.
이리 자반뒤집기를 밤새 대여섯차례 하니,
애간장이 다 녹고, 똥끝이 죄다 타버려 변비가 아니 생길 수 없습니다.

한자로 변비(便秘)를 보면 ‘秘’자 숨길 비자가 들어 있습니다.
이게 참으로 그럴 듯합니다.
대장내에 변을 부끄러이 숨겨둔 것을 이르고 있음이 아닙니까 ?
그래서 천하의 계집들은 그리 부끄러움이 많은가 봅니다.
하기사 요즘은 이도 다 옛말입니다.
그렇다 하여 이들이 변비가 없어진 게 아니라, 현대사회에선 더 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리 뻔뻔해진 것은 도대체 어떤 비밀을 품었기 때문일까요 ?
알지만, 이 자리에서는 말을 아끼고자 합니다.
제 길도 바쁜데, 곁 길로 갈 수는 없으니까요.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

시대가 이 때쯤이로되, 지금 성함을 기억하지 못하겠는데,
어떤 달리기 잘하는 조선 사람이 계셨답니다.
이 분이 달리기 경주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달리던 중 배가 살살 아파,
길가 풀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기보다 뒤쳐진 이들이 이틈에 전부 앞서 달려 나갑니다.
대사를 다 치루고 나선,
다시 경기에 복귀한 그 분은 오히려 힘을 더 내어
앞 선 이들을 모조리 따라잡고 급기야 우승을 했답니다.

통변(通便)인즉 곧 통기(通氣)인 것입니다.
대변을 시원하게 싸재끼면 이내 金氣가 통하여
생명력의 근원인 水氣를 살려내니, 힘이 벋치게 됩니다.
이게 즉 금생수(金生水)하는 이치인 겝니다.

옛말에 아침에 거기가 서지 않는 사람에겐 돈도 빌려주지 않는다 합니다만,
변비가 있는 사람 곁에는 가급적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기막힐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변비, 즉 불통인즉 기색(氣塞) - 기 막힘이니
곁에 있다 그리 봉변 당하기 십상입니다.

일언이폐지하고,
제 선생님 말씀이 변비를 통하게 하려면 아래를 뚫으려 할 것이 아니라,
막힌 위를 열어재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제(下劑)가 아니라 토제(吐劑)에서 뜻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취처할 혈 자리는 이러이러하여야 하다고 하셨지만,
그 보다 더욱 시급한 것은 밤 사이 빌딩 짓기 놀음을 그만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취지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오크통에 들은 술을 덜어낼 때,
술이 나오는 조그만 구멍을 열었다고 하여 받을 병으로 술이 제대로 흘러내리지 않습니다.
반대편 큰 마개를 열어야 공기가 들어가면서 콸콸 잘 쏟아지게 됩니다.
이치가 이러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게 술통도 아닌, 감정의 동물인 사람에게선 어디 쉽겠습니까 ?
하니, 여성분들이 거죽으로는 향기가 나는 듯 그럴듯하지만,
알고 보면 뱃 속으로는 똥이 그득 들은, 걸어다니는 가죽부대이기 십상입니다.
실제 맥을 짚어보면 그들은 대개 金氣, 水氣가 전부 부박(浮薄)하달까,
망측스런 지경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게 백골관(白骨觀)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음욕이 치성(熾盛)하여 도무지 공부에 진척이 없는 사람들에겐
좋은 처방이 될 것입니다.
제 얘기가 아니더라도, 실은 불경에 이런 類의 이야기는 적지 않습니다.
속몸이 이리도 부정(不淨)하니
어찌 음욕이 다스려지지 않을손가 ?
이를 일러 부정관(不淨觀)이라고도 하니,
실인즉 저들 몸뚱아리야말로 도에 이르는 징검다리가 아니겠는가 ?

***

위에서 말한 주막의 ‘소통(疏通)’이란 글 마지막에,
예전의 일방형 게시판을 고쳐,
답글도 달 수 있도록 조치하여,
이로서 소통을 소망하신다고 하였더군요.

그런 것도 모르고 소요유할 뿐이라고 혼자 놀아났으니,
못내 부끄러운 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댓글 아냐, 댓글에 손자 덧글을 몇 차 아래로 달 수 있도록 채비한들,
그런 하제(下劑)만으로 소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이런 의문을 되던져 봅니다.

저는 이런 외부의 기능적 장치도 혹간 소용이 되겠지만,
인간 각자가 가진 울체(鬱滯), 즉 토제(吐劑)의 대상이 되는 그것들의
근원적인 해방이 없이는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소통(疏通)의 반대는 흔히 불통(不通)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보다는 밀색(密塞)이라고 새겨 푸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疏 : 드물고 성기다.
密 : 빽빽하다.
塞 : 막히다.

이리 한자 훈을 새겨놓고 보면, 뜻이 오롯히 떠오릅니다.
즉 소통(疏通)이란 무엇인가 성기어 통하기 쉬운 상태를 이릅니다.
차로에 차량이 적으면 잘 달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 주장이 물러(軟) 남과 다름이 서로 용납되거나,
아주 같아 다툼이 없는 상태를 이릅니다.

반면 밀색(密塞)이란,
제 주장, 사상이 굳고 빡빡하여 남과 대립하고 있은즉,
한 곳에 deadlock 즉 교착되어, 막혀(塞)있는 상태를 이릅니다.

그런데, 사람들간의 생각이 꼭 같거나,
소통되어야 할 필연적 이유가 있기는 있습니까 ?
소통, 소통 !
이리 아끼듯 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보면 저는 게서 잠깐 멈칫거리게 됩니다.

그 글에서 YS주모께서 말씀하시길,
“우연히 알게 된 것입니다만, 이 판을 통해 상처를 입은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알게, 또 모르게 제가 입혔던 상처에 대해 그 분들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리 하셨습니다.

그런데, 상처도 입고, 지청구도 받고, 미움도 받고, 욕도 먹고 하면 아니 됩니까 ?
소통이라는 게 꼭이나 칭찬 받고, 공감하여만 됩니까 ?
저처럼 구시월 독오른 뱀처럼 짐짓 삿대질 하고, 욕하고 하지는 않더라도,
비가 오면 비 온다고 말하고, 눈 오면 눈 온다고 말하면 아니 됩니까 ?
그러다 빗물에 옷이 젖거나, 목덜미에 눈가루 들어간들 그게 피한다고 될 일입니까 ?
그게 두려우면 아예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됩니다.
여기 같으면 주막에 오지 않으면 됩니다.

저는 불만입니다.
여기 주막에 늘 고은 음악만 흐르고, 꽃비만 내리는 것이.
그래서 가끔은 과객같은 이가 참으로 주막엔 귀한 손입니다.
그걸 몰라보고 있으니, 참으로 협량스런 화상들만 그득하다 할 밖에.
이들 모두 쓸어 담은들, 간장 종지 하나를 제대로 채울려나 ?

소통만 되면 무엇합니까 ?
소통의 내용이 더 중요한 것 아닙니까 ?
황빠들 간의 소통을 황까는 비웃습니다.
마찬가지로 황까들의 공감 내용을 황빠는 매국노라고 부르짖으며 성토합니다.
노빠들간의 노비어천가 역시 반노들의 웃음거리에 불과합니다.
반노들의 그들을 향한 비난은 노빠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악행에 다름 아닙니다.

실제 이 참담하게 허물어져 버린 노들(盧野)에서 아직도 노비어천가를
목 놓아 부르며, 우는 이들도 여전히 적지 않습니다.
저들은 여기 주막에서도 목격되듯이,
이를 자신들만의 관점이 아니라, 사실이자, 진리라고 굳이 우기고 있습니다.
국민들 거개가 외면한 이 비참한 역사현장에서
그들은 제들끼리만 사실의 적손(嫡孫)입니다.

그렇다면,
빠입니까, 까입니까 ?
진정 그 누가 옳은 것입니까 ?
아니, 세상에 정녕 옳은 게 있기나 한 것입니까 ?
더 나아가, 그런 물음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 일이기나 합니까 ?

여기 YS에서도 공감이란 깃발을 높이 들어 선양하며,
이를 추구해야 할 가치로 삼는 분들을 뵙습니다.
하지만, 그게 저들 황빠나 노빠들처럼, 여기 주막내에서
행여 패거리를 짓고, 재처럼 식은 앙가슴을 덮히려는 것이 아니란 보장이 없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공감 또는 소통이란 게,
세계를 분할하여, 울타리 짓고, 
제 뜻이나 감정에 복무시키려는 기도와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
공감, 소통 그 내용에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이를 ‘구실’로 자신의 현재 감정을 따쓰하게 데우는데 요긴한 것은 아닙니까 ?

하지만 아십니까 ?
사람의 선의, 공감 따위의 감정은 찰라적인 연소(燃燒)와 비슷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허공중에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것을.
때문에 잇대어 소비할 연료가 바로 필요합니다.
다음 차례의 선의와 공감이 겨울 아궁이 땔감처럼 연신 소용됩니다.
누군가는 수고로이 초부(樵夫) 노릇을 해야 하고,
또 누군가는 열심히 풍구질을 해대며 불목하니 역할을 하여야,
이들 지칠줄 모르는 걸객(乞客)들을 만족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늘 허갈져 여기 저기 그를 구하러 다니기에 분주합니다.
못내 지쳐 급기야 그들은 자신들만의 성곽을 짓습니다.
그들은 선의, 공감이 샘처럼 솟아날 그들만의 성곽을 짓고 그 안에 거합니다.
그들만의 달팽이집 안에선 꽃이 피고, 샘이 마르지 않고 솟습니다.
자가발전, 자체생산이기에 이젠 불안하지 않습니다.

이게 선의, 공감, 소통을 즐겨 노래하는 이들의 실상입니다.
이들을 저는 빠돌이라고 부릅니다.
노빠, 유빠, 황빠, 명빠, 문빠 ...
이들 빠로 불리워지는 이들은 크건, 작건
감정의 외연기관에 다름 아닙니다.
저까지 포함하여 행여 앙빠들이 여기 주막에 서성거리고 있는 것은
혹 저들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
그렇다면, 못내 두려운 일입니다.

저들이야말로 충성스런 황국의 신민(臣民)들입니다.
저들을 붙잡아야 기업체는 물건을 많이 팝니다.
이를 요즘엔 충성고객이라 부릅니다.
저들을 많이 끌어 모아야 교회당이 성령이 충만한 곳으로 기록(?)됩니다.
이를 일러 광신도라 부릅니다.
저들 넋 빠진 빠돌이, 강시들을 많이 모아야
정치모리배들도, 연예인도 한 몫 잡을 수 있는 겝니다.

이쯤 되면,
공감이라는 것, 소통이라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분할하고, 획정(劃定)하려는 아주 흉측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법 우울한 얘기입니다.

***

밀색(密塞) 또는 불통(不通)을 소통(疏通)케 하는 토제(吐劑)로서 
즉 예컨대, 여기에 등장하는 댓글 같은 그런 기능 장치의 채비로 가능하리란
꿈을 일찍이 포기한 역사적 인물이 있습니다.
사랑, 예법, 그리고 여기에서 어떤 분이 외쳤던 공감 같은 것을 동원한들 
이 험한 세상을 건너기는 지난하다고 토로한 사람이 있었지요.
바로 법가의 완성자 한비자란 사람입니다.

여기 잠깐 거기 등장하는 이야기 두 토막을 소개합니다.

미자하는 위나라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에 임금의 수레를 몰래 탄 자는 월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 註 :  월형刖刑은 중국 고대 형벌 오형중 하나로 발뒤꿈치를 베는 형벌임.)
그런데,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났다는 사실을 미자하에게 알려 주었다.
미자하는 임금의 명이라 속이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나갔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어질다고 여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효자로구나. 어머니를 위하느라 월형의 죄를 범하는 것도 잊었구나.”
어느 날은 미자하가 임금과 더불어 과수원을 노닐면서 복숭아를 따먹다가
맛이 달다고 다 먹지 않고 남은 반을 임금에게 드렸다.
임금은 기뻐하며 말했다.
“나를 사랑하여 맛있는 것도 제가 다 먹지 않고 나에게 먹게 하는구나.”
그러다가 미자하의 고운 얼굴빛이 시들고 총애가 식어져서 임금에게 벌을 받게 되었다.
임금은 말했다.
“미자하는 본래부터 그랬다. 일찍이 나의 수레를 내 명령이라고 속여 탄 일도 있고,
자기가 먹다 남긴 복숭아를 내게 먹인 일도 있었다.”
(※ 미자하 : 남자임.)

세난(說難)편에 나오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미자하가 한 행동은 하나지만,
임금의 사랑 유무에 따라 선악이 뒤집혀집니다.
그러하니 설득의 어려움은 정작은 설득의 내용이 아니라,
설득하고자 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이 쪽의 마음을 거기 꼭 들어맞게 하는데 있다고 한비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설득의 상대는 임금입니다.
그가 천하를 구하고자 하는 큰 뜻을 품고 있는지 아닌지 몰라도,
일단은 임금의 눈에 들어야 일을 도모할 수 있으므로,
여늬 諸家와 다를 것 없이 임금에게 자신을 세일하는 게 으뜸 과제입니다.
이 날 이후, 저는 복숭아를 먹을 때면, 가끔 미자하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YS 복숭아를 베물어 먹을 때는 YS댁만을 생각하는 게
주막 사람들이 취하여야 할 마땅한 도리라 할 것입니다.
천하에 염치없는 과객이지만, 여기 YS 주막을 빌리고 있은즉,
이리 겸사를 차립니다.

한비자는 ‘설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를 ‘소통’으로 환치하여도 별로 그릇 될 것이 없습니다.
내 의견과 같으면 소통이 잘 되는 것이고,
어긋나면 불통이 되지요.
소통이 뭐 별난 것인가요.

여기 주막 어떤 식객처럼
‘사실이냐 관점이냐’ 이런 유치한 도식으로 세상을 백날 갈라보았자,
결론이 납니까 ?
참으로 싱거운 노릇이지요.

번거롭지만 하나 더,
이것은 그리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느 날 韓나라 昭候가 술이 잔뜩 취해서 그만 선잠이 들어 버렸다.
마침 소후의 관계(冠係:머리에 쓰는 冠을 관리하는 일)를 맡은 신하가
추울 것을 염려하여 옷을 가져다가 임금에게 덮어주었다.

얼마 후 소후가 눈을 떴다.
소후는 자기에게 옷을 덮어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어 보았다.

‘내게 옷을 덮어준 사람이 누구인가 ?’
‘관계를 담당한 사람입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그러자 소후는 의복계(衣服係)와 관계(冠係)를 함께 처벌했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속 뜻은 무엇일까요 ?
몇몇 전제 또는 관점에 따라 해석과 이해가 갈리겠지만,
여기 이 자리에선 소개하는 것외에 더 이상 참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善意 앞에선 법가의 마음을 되새기며,
公.義, ↔ 私.利 이 4字만 남겨둡니다.

***

마침 주막에 내걸린 ‘소통(疏通)’이란 글이 꼭 4년전 이맘 때쯤 쓰여진 글이라,
예사롭지 않군요.
당시 주모는 똥을 소재로 신년 벽두를 겨냥하셨습니다만,
저 역시 똥을 주막 한가운데 내던지며, 대보름을 장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깡통에 불 지펴,
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달 보며 꿈을 사립니다.
4년전 YS 주막기둥 주련에 걸린
주모의 말씀 기려 쫓아,
지금 똥 한바가지를 퍼다 주막에 쏟아놓고
달마중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심술궂은 처사이긴 합니다만,
혹 알겠습니까 ?
모두들 덕분에 똥꿈이라도 진하게 꾸실지.
이리 달덩이처럼 푸짐한 덕담을 한 무더기 싸재끼며,
홀로 어슬렁 소요유합니다.

초엿새
맑고 시린 날
옷깃 여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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